지역문화

비지 남치리선생의 묘소를 다녀와서

오토산 2020. 3. 8. 22:48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2703



비지 남치리선생의 묘소를 다녀와서



3월 8일 코로나19로 마음은 아직도 얼어붙은 겨울이나   춘분을 앞둔 계절은

봄이 찾아와 태화소공원에 산수유꽃이 피어나는 봄을 만끽하며 강변을 걷는데.

  서정규 원림초등동기회장님이 전화가 와서 김용주 안동교회장로님과 함께

     비지 남치리 선생의 묘소 탐방을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하여 따라 나섰다. 


원림리 양지마가 고향인 김장로님은 노암마을을 지나 양지마에 주차하고

동네사람들과 인사를 하면서  뒷산(천지산)을 올라가며 산길을 안내하였다.


원림리(院林里)는 1635년 남치리선생을 모시는 노림서원(魯林書院)이 세워지면서

마을이름을 원리(院里 서원마)라 하였고 원리와 노림을 따서 원림리라 하였다.

노암마을은 권씨들이 일직에서 원리 남쪽으로 세거하면서 암(岩)자를 쓰면 좋다하여

 노암(魯岩)으로 불렀고 현재 도시근교 전원주택지로 많이 개발되고 있으며 

노암마을의 남쪽 천지산 아래마을이 양지마이다.


천지산(天地山)은 갈라산맥이 뻗어와서 종결되는 곳에 우뚝솟아 비룡상천(飛龍上天)

형국이라 하며 묘소를 찾아가는 길에는 솔잎낙엽(갈비)이 탐스럽게 쌓여 있어서

어릴때 겨울땔감을 하면서 산을 오르던 추억을 떠 올리게 하였다.


비지남선생지묘(賁趾南先生之墓)란 비석이 세워진 묘소에는

 서애 류성룡선생이 찬(撰)을 한 묘비가 단기 4297년 改立이라 쓰여져 있었고

망주석에 별도 초석이 설치된 모습을 볼수 있었고  묘소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며

원림과 현내리의 마을 모습들을 내려보면서 구경하고 내려왔다.


비지 남치리(賁趾 南致利 1543~1580) 선생은 본관은 영양, 신신藎臣의 삼남으로

 유일재문하에서 수학하고 뒤에 퇴계문하에들어가 계문안자溪門顔子란 칭호를 들을

만큼 학행이 독실하였고 스승의 상사때 28세의 나이에도 상례相禮로 추대되었으며

 한강 정구와 함께 학행이 뛰어난 숨은인재 9명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고

저서로는 비지집(賁趾集)이 있다.


묘소를 답사하고 내려와 손씨들이 많이 살았다는 손고개를 넘어서 현내리로 갔다.

현내리(峴內里)는 가현과 내리의 '현'자와 '내'자를 따서 지어졌다고 하며

마을뒷산에는 이조참의, 홍문과 부제학을 지내고 외직인 경상도관찰사겸출척사로

안동에 순찰왔다가 객관에서 돌아가시어 타락산(駝駱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된

경주이씨 청호공파 청호 이희(淸湖 李暿(1404~1449)선생의 묘소가 보였고

묘소아래 노림사(魯林祠 魯林齋)가 있었으나 잠겨져 있어서

다음기회에 찾아보기로 하고 노림서원이 있었던 서원마로 향했다.


천지산이 건너보이는 서원마입구에는 서원건립시 심었다고 전하는

400여년 된 회화나무가 지키고 있었고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노림서원 자리는 택지로 변하여 가고 있었고 입구에 안동시문화유산 제35호인

 남비지고택만이 옛 선비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늘도 비지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한나절을 즐겁게 보내게 되었다.

안내를 하시며 함께 하여주신 김용주 장로님과 서정규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사 한마디

비단은 귀하지만 모든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아니지만

걸레는 천하지만 모든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다.

인생을 사는데는 비단같은 사람 보담 걸레같은 사람이 더 필요하고

때로는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를 아름답게 해주는 인생을~~



마을에서 만난 농부는 봄농사를 준비하고~~



산천의 갈비는 겨울땔감으로 탐스러워~~
























비지 남치리선생 묘소와 고택



현내리 노림사와 원림마을의 모습

산수유꽃이 봄을 알리는 태화소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