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熱國誌)62
초패왕 (楚覇王) 항우.
항우는 자영과 많은 백성들을 죽여 버린 뒤에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항우에 앞서 유방이 함양을 먼저 점령했지만 유방은
항우의 후환이 두려워 일부러 패상(覇上)으로 옮겨 갔고,
항우는 마치 자기가 함양을 처음 점령한 듯이 당당하게 입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자신이 <관중왕>이 되기 위해서였다.
항우가 함양에 입성하여 진나라의 궁전들을 두루 돌아보니,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하여 모든 궁전들이 눈부시도록 호화로웠다,
"아아, 진황(秦皇)이 이같은 부귀를 남겨 둔 채 멸망해 버렸으니,
그들은 죽기가 얼마나 억울했을고 ! "
항우는 호화 찬란한 궁전들을 돌아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하고 있었다.
범증이 그 말을 듣고 항우에게 아뢴다.
"진황이 나라를 망친 것은 부귀에 눈이 어두워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충신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오래 유지해 가려면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고,
충신들의 간언을 소중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항우는 그 말에는 입을 다문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윽고 본영으로 돌아오자, 항우는 범증에게 의견을 묻는다.
"나는 함양을 점령하고, 진나라의 옥새도 손에 넣었소.
허니 ,이제는 정식으로 관중왕에 즉위했으면 싶은데,
군사의 생각은 어떠시오 ?"
범증이 대답한다.
"주공께서 관중왕에 즉위하시려면
팽성에 계신 회왕(懷王)의 조명(詔命)을 받으셔야 합니다.그
러하니 팽성으로 사신을 보내 조명을 받아 오도록 하시옵고,
그동안에 애쓴 모든 대장들에게 논공 행상을 하여,
전공에 따라 응당의 성과를 하사 하시도록 하시옵소서."
"논공 행상을 베푸는 것은 급한 일은 아니니,
회왕에게 사신부터 보내기로 합시다."
항우는 관중왕이 빨리 되고 싶어 숙부인 항백을 팽성으로 보내
회왕의 조명을 받아 오게 하였다.
그런데 회왕은 항백을 만나자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항우 장군과 유방 장군이 출병할 때,
나는 두 분에게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에게 관중왕을 임명하겠소> 하고
언약했던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오.
그리고 함양을 먼저 점령한 사람은 항우 장군이 아니라
유방 장군임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이오.
그런데 내가 어찌 지난날의 약속을 어기고 항우 장군을 관중왕에 임명할 수 있겠소.
그것은 무리한 요구요."
그러자 항백은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항우 장군은 전공이 지대했을 뿐만 아니라, 덕망이 매우 높사옵니다.
게다가 유방 장군은 성품이 나약하여 왕의 중책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부디 항우 장군에게 관중왕의 조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항백이 무리한 요구를 해 오자
회왕은 정색을 하며 항백을 꾸짖는다.
"장군은 무슨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고 계시오.
인군(人君)은 신의(信義)를 어겨서는 안 되는 법이오.
나는 지난 날 ,두 장군에게 분명히 언약한 바가 있는데,
그 언약을 어떻게 무시하고 항우 장군에게 관중왕을 제수하라는 말이오.
그런 애기는 두번 다시 입밖에도 내지 마시고
빨리 돌아가서 항우 장군에게 내 말을 그대로 전해 주시오."
회왕의 결심은 확고 부동하였다.
항백이 면목없이 돌아와 항우에게 사실대로 고하니,
항우가 진노하며 펄펄 뛴다.
"회왕이라는 자는 우리 가문에서 받들어 모신 왕이 아닌가 ?
그런데도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제까짓 게 무슨 공로가 있다고
관중왕의 자리를 좌지우지 하겠다는 게야.
그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할 수없이 내가 길일(吉日)을 택해서
내 맘대로 왕위에 오르기로 하리라 ! "
항우의 권세가 커지고 나니
이제는 초회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투였다.
(큰일 났구나.
초나라의 중심 인물인 초회왕을 무시하면 나라꼴이 뭐가 될 것인가 ?)
범증은 한숨을 쉬면서 항우에게 강력하게 간한다.
"초회왕은 어디까지나 초나라의 대왕이시옵니다.
그 어른을 무시하고 법통을 유린하면 나라가 파괴되오니,
그 점을 각별히 삼가하셔야 합니다."
항우는 그제서야 자신의 언사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알겠소이다.
아무리 그렇기로 관중왕 자리를 유방에게 넘겨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
"주공께서 관중왕이 되셔야 한다는 것은 소신도 동감이옵니다.
그러나 주공께서 관중왕으로 즉위하시려면
회왕의 격(格)을 한층 더 높여서 제위(帝位)의 존칭으로 부르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의 법통이 세워지지 않사옵니다."
"내가 관중왕이 되는데 그런 법통이 꼭 필요하다면 그렇게 합시다그려.
그렇다면 나의 칭호는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소이까 ?"
범증이 다시 대답한다.
"왕의 존칭은 역사를 고려해 제정하는 것이 순리이고
경솔하게 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다행히 역사에 밝은 장량이 지금 우리에게 머물러 있사오니,
그 사람의 의견을 한번 들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가 좋은 이름을 제시해 주면 그대로 사용할 것이로되,
만약 나쁜 이름을 고르게 되면 우리에게 반심을 품고 있는 증거이므로,
그때에는 장량을 죽여 없앨 구실이 되옵니다."
범증은 장량이라는 존재가 눈엣가시처럼 고깝게 여겨지어,
그런 수법으로라도 장량을 죽여 없앨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항우는 범증의 말대로 장량을 불러다가 이렇게 부탁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관중왕에 즉위할 생각인데,
칭호(稱號)를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자방(子房: 장량의 號)은 역사에 밝으시니,
역대 제왕(帝王)들의 존호(尊號)를 참작하여
나에게 좋은 칭호를 하나 지어 주기 바라오."
장량은 뜻밖의 부탁에 대뜸 의아심이 솟아올랐다.
(범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무슨 이유로 나에게 부탁을 하는 것인가 ?)
장량은 그런 의심이 솟아올라서,
"역사는 저보다도 연륜이 깊으신 범증 군사께서 더 밝으신데,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어찌하여 저에게 부탁하시옵니까?"하고
넌즈시 항우의 대답을 떠보았다.
그러자 항우가 대답한다.
"범증 군사는 역사는 자신이 없는지,
이 문제는 자방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군요."
장량은 그 말을 듣고 범증이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범증이 어떻게 해서라도 ,
트집거리를 만들어 나를 죽이려고 존호를 제정하게 하라고 한 것이 분명한게로다.
그렇다면 나는 책잡힐 대답은 해서는 안되겠군.)
내심으로 이렇게 결심한 장량은
항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삼황 오제(三皇五帝)가 계셨습니다.
삼황이란 하늘에서 내려오신 제왕을 부르는 존호였사옵고,
오제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천하를 덕으로
다스린 임금님들을 부르는 존호였습니다.
그러므로 항우 장군께서는 마땅히
제호(帝號)로 부르셔야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러나 많은 백성과 병사들을 죽인 자기가 감히<제왕(帝王)> 이라고
자칭하기에는 양심에 꺼려서,
"굳이 제호를 쓰지 않아도 좋으니 다른 칭호는 생각나는 것이 없으시오 ?"
하고 물었다.
장량이 다시 대답한다.
"오제(五帝)이후에는 삼왕(三王)이라는 성왕(聖王)들이 계셨습니다.
은(殷)나라의 주왕(周王)과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모두 그런 성군이었습니다.
그분들 역시 인의(人義)를 소중히 여기고,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려 나가셨습니다.
항우 장군께서는 그들의 성덕(聖德)을 본받아
왕호(王號)를 쓰셔도 무방하실 것이옵니다."
장량은 범증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으려고 항우를 무작정 추켜세워 주었다.
항우는 그럴수록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양심이 있는지라,
수많은 생명들을 죽인 주제에 자기 자신을 성군이라 자칭하기에는 마음이 꺼려서,
"삼왕 이후에는 왕들을 뭐라고 불렀소 ?"하고 물었다.
장량이 다시 대답하는데,
"왕은 아니면서,
실질적으로 천하를 지배해 온 사람들 중에는
<오패(五覇)>라고 불이어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과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공(莊公) 같은 분들이
모두 그런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비록 자신을 <왕(王)>이라고 자칭하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을 위해 폭정(暴政)을 물리치고 위엄을 천하에 떨쳤던 분들이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 다섯분을 <오패>라고 칭송해 오고 있는 것이옵니다.
지금 항우 장군께서는 그 위세를 천하에 떨치고 있사오니,
장군께서는 <패(覇)> 자에 <왕(王)>자를 더붙여 ,
<패왕>이라고 부르게 하시면 어떠하겠습니까 ?"
(패왕 ...? 패왕 ...? 그렇다면 ,
나의 출신인 초나라를 덛붙여 ,초패왕(楚覇王)이라고 부르게 하면 되겠군 !
초패왕 ...? 초패왕 ....? 그것 참 ... !)
항우는 <패왕>이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기뻐하며 말했다.
"단순히 <왕>이라는 칭호는 너무 많이 쓰여서 그런지 낡은 냄새가 풍기지만,
자방이 말씀하신 <패왕>이라는 칭호는 위엄도 있으려니와
싱싱한 맛이 풍겨서 너무도 좋소이다.
나는 본시가 초나라 태생이니, 그러면 나를 <초패왕(楚覇王)>이라 부르고,
초회왕은 한 계급을 높여서 <초의제(楚義帝)>라고 부르게 하겠소.
좋은 칭호를 제정해 주셔서 매우 고맙소이다."
항우는 즉석에서 시종을 불러 <초패왕>이라는
자신의 칭호를 만천하에 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범증이 그 소식을 듣고 항우에게 급히 달려와 간한다.
"주공께서는 관중왕에 즉위하시더라도
<패왕>이라는 칭호를 쓰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반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반문한다.
"나는 <패왕>이라는 칭호가 마음에 꼭 드는데,
군사는 어째서 그 칭호를 써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오 ?"
범증이 대답한다.
"정치에는 왕도(王道)가 있고, 패도(覇道)가 있는 법이옵니다.
<왕도>라 함은 인의(仁義)로 다스려 나가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옵고,
<패도>라 함은 인의를 무시하고 무력과 권모 술수(權謨術數)로
공리(功利)만을 도모하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그러니 왕의 칭호를 어찌 <패왕>이라고 부를 수 있으오리까 ?
장량은 주공을 욕보이려고 일부러 그런 칭호를 권한 것이 분명하오니,
그자를 당장 처단해 버리셔야 하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오히려 범증을 나무란다.
"군사는 모르는 소리를 그만하오.
<패왕>이라는 칭호는 내가 좋아서 결정한 것인데,
장량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를 처벌하란 말이오.
또 내가 무력으로 천하를 잡은 것만은 사실인데,
<패왕>이라고 부르기로 뭐가 나쁘다는 말이오 ?"
항우는 범증의 충고를 일축해 버리고,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항우"라고 하면 잊혀지지않을 ,
<초패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왕도>와 <패도>의 정치 철학을 이해할 리가 없는 항우에게는
<패왕>이라는 칭호가 기운차게 느껴져서 좋았던 것이다.
계속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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