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熱國誌)《항우의 막무가내(莫無可奈)》

오토산 2020. 5. 6. 12:16

열국지(熱國誌)61

 항우의 막무가내(莫無可奈)

 

 항우는 옥새를 손에 넣자 위세가 더욱 등등해져서,

그때부터는 홍문에 버티고 앉아 본격적으로 <관중왕> 행세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뿐만이 아니고 그때부터는 범증의 간언(諫言)을 역겹게 여기고

 오히려 장량의 말만 귀담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항우가 중신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매우 노여운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진나라의 옥새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부터 이 나라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머물러 있은 지 달포가 넘도록 진왕이었던

 <자영>이라는 자가 아직도 패공의 그늘에 머물러 있는 채로

나에게 항복을 하러 오지 않고 있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 ?

속히 패공에게 사신을 보내 자영을 당장 내게로 보내도록 하라 ! "

 

 항우의 명령이고 보니 어느 누가 감히 거역할 수가 있으랴.

 항우의 이름으로 유방에게 서한이 보내졌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패공과 함께 진나라를 정벌하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된 지 이미 달포가 넘었소.

 그런데 패공은 삼세 황제(三世皇帝)였던 자영을 붙들어 놓고 나에게는 항복하러

 보내지를 않으니, 혹시라도 그대가 나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오 ?

이 나라에 통치권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나 뿐이오.

그대가 만약 나에게 다른 뜻을 품고 있다면 나는 무력으로 다스릴 결심이니,

다른 뜻이 없다면 자영을 속히 항복하러 보내시오.>

 

 그야말로 협박장과 다름없는 서한이었다.

 유방은 서한을 받아 보고, 즉시 중신회의를 열었다.

 

 "항우는 <관중왕>을 자칭하면서, 자영을 자기에게 항복하러 오게 하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

 만약 자영을 보내주지 않으면 싸움을 각오해야 할 것이오.

그를 보내주면 항우를 관중왕으로 인정해 주는 셈이니,

나로서는 이 문제를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그러자 소하가 대답한다.

 

"항우는 워낙 세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도저히 싸울 형편이 못 되옵니다.

하오니 자영을 보내 주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면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 셈이 아니오 ?"

 

"그 점은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사옵니다.

왜냐하면 자영을 보내기만 하면, 항우는 자영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항우의 악명이 높아져서 민심이 주공에게로 돌아올 것이니,

 항우가 아무리 관중왕이라고 제아무리 날뛰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유방은 소하의 말을 옳게 여겨 자영을 불러 말한다.

 

"항우 장군이 당신더러 항복하러 오라는 서한을 보내 왔으니,

당신은 항우를 찾아가 항복을 해야 하겠소."

 그러자 자영은 얼굴빛이 새파래지며 대답한다.

 

"저는 차라리 여기서 죽을지언정 항우 장군은 못 찾아가겠습니다."

 유방은 자영의 얼굴을 의아스럽게 쳐다보며 묻는다.

 

"당신은 이미 나에게 항복한 일이 있으니,

항우 장군에게 다시 한번 항복하기로 무엇이 두려워 못 가겠다는 것이오 ?"

 그러자 자영이 울면서 대답한다.

 

 "저는 인자하신 패공에게 항복을 하였기에 목숨을 보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우 장군은 성품이 포악한 관계로 제가 찾아가 항복하게 되면,

 저를 반드시 죽여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인자하신 패공의 그늘을 떠나서 어찌 죽음의 길을 택하겠나이까 ?"

 

유방은 자영의 신세가 너무도 측은하여 억지로 항우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늙은 중신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유방에게 아뢴다.

 

"만약 진왕(자영)을 보내 주지 않으면 항우 장군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이곳의 수십만 병사와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자영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유방에게 고한다.

 

"항우 장군은 족히 그럴 만한 사람입니다.

 저로 인해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제가 어찌 그런 고통을 감당할 수가 있으오리까.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죽음을 각오하고 항우 장군을 찾아가 항복을 하겠습니다."

 

자영은 그날로 항우를 찾아가 항복장(降伏狀)을 올렸다.

 항우는 용상(龍床)에 높이 올라앉아 자영을 굽어보며 큰소리로 외친다.

 

"너의 조부(祖父)는 육국(六國) 백성들을 포로로 삼아 10여 년간을 괴롭혀 왔으니,

그 죄가 막중하도다. 그로 인해 너를 참형에 처할 터인데 마지막으로 할말이 없느냐 ?"

 자영은 눈물을 뿌리며 말한다.

 

"육국을 정벌한 사람은 제가 아니고 제 조부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군께서 저를 죽임으로써 원한을 풀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주신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예끼 이놈 !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네가 감히 선정을 운운하느냐 !

여봐라 이 자리에서 당장 저놈의 목을 쳐 버려라 ! "

 그러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영포가

자영의 목을 한칼에 날려 버렸다.

 

 자영의 머리가 땅 위에 뒹굴어 떨어짐과 동시에 붉은 핏줄이 공중에 치솟아 올라 ,

땅바닥은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며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실로 처참하기 짝이 없는 살인극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피를 보고 쾌연히 웃으며 말한다.

 

"이제야 나의 원한을 풀었다."

 

 자영의 죽음이 진나라 백성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하여 눈물을 뿌리며 항우의 잔학성을 비난하였다.

 

"패공은 덕이 높고 인자한데,

항우는 잔학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그렇다면 진시황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항우에 대한 백성들의 비난은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항우의 횡포에 대한 백성들의 비난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서,

그 소리는 마침내 항우 자신의 귀에도 들어가 버렸다.

 항우는 그러한 소문을 듣고 불같이 노했다.

 

"아니 그래,

유방은 명주(明主)이고 나는 악군(惡君)이라고 한다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

 

이는 필시 진나라때 녹(祿)을 얻어 먹던 자들의 소행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려야 하겠다."

 항우가 격노하자 범증이 말리며 말한다.

 

"패공은 함양에 들어와 <약법삼자>으로 민심을 평화롭게 수습했사온데,

 주공께서는 항복해 온 자영을 죽이셨습니다.

이제 다시 백성들까지 죽이신다면

민심이 이반(離叛)되어 천하를 얻지 못하시게 되옵니다. 거듭 바라오니,

백성들까지는 죽이지 말아 주시옵소서."

 항우가 말한다.

 

"나는 진나라의 무도(無道)를 징벌하러 왔으므로 자영을 죽인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로 인해 백성들이 나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내게 대한 반역임이 분명한데,

그런 놈들을 그냥 살려 두란 말이오 ?"

 범증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그 옛날 노(魯)나라의 왕은

죄없는 궁녀(宮女) 한 명을 죽였다가 9년간 가뭄을 겪은 일이 있엇습니다.

옛글에 <한 사내가 원한을 품으면 유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한 계집이 원한을 품으면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자영 한 사람을 죽인 것만으로도 원성이 이처럼 자자하온데,

이제 다시 백성들까지 죽여 버린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무엇으로 막아낼 수가 있으오리까 ?

 백성들의 원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가라앉을 것이오니 ,

 주공께서는 부디 노여움을 진정하시옵소서."

 항우는 마지못해 4,5일 동안 분노를 참고 있엇다.

 

그러나 백성들의 원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음으로 항우는 마침내 분통을 터트리며,

영포로 하여금 진나라 왕족(王族) 8백여 명과 관인(官人)이었던

백성들 4천 6백여 명을 본보기로 몰살 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함양 거리는 시산 혈해(屍山血海)를 이루어

눈을 뜨고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항우는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므로,

범증은 항우의 발을 부등켜 잡고서 울면서 말했다.

 

 "그 옛날 탕왕(湯王)은 오랫동안 가뭄이 들자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려고 했던바,

하늘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비를 내려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군주들은 이처럼 백성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킬 각오까지 있었던 것이옵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백성들을 궁휼히 여기셔서 죽이기를 그만 하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이같은 범증의 간언을 듣고서야 백성들을 더 이상 죽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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