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熱國誌)《장량의 기사 회생(起死回生).》

오토산 2020. 5. 5. 12:11

열국지(熱國誌)60

 장량의 기사 회생(起死回生).

 

 장량은 유방을 먼저 돌려보내고 항우가 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항우는 이튼날 아침이 되어서야 유방을 찾았다.

 

"패공은 어디로 갔느냐 ?"

 장량은 항우가 술에서 깨어 유방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

달려와 허리를 굽혀 보이며 아뢴다.

 

"패공은 술이 대취하여 패상으로 먼저 돌아가시면서,

저더러 남아 있다가 노공께 인사를 여쭙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며 말한다.

 

"아니 그래.

유방이 나에게 인사도 없이 맘대로 돌아가버렸단 말인가 !

 세상에 그런 무례스러운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 "

 범증은 이때다 싶어 항우에게 말한다.

 

 "패공은 겉으로는 유약한 듯 꾸미고 있으나,

내심으로는 웅대한 야망을 품고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죽여 없애려고 세 가지 계략을 세웠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골탕을 먹인 사람은 다름아닌 장량입니다.

 이런 괘씸한 자를 지금이라도 참형에 처해 ,

후환이 없도록 주공께서는 명하여 이자의 목을 당장 베어 버리도록 하시옵소서."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 불같이 노하며, 장량을 노려보며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여봐라 !

저놈을 당장 끌어내 목을 베어 버려라 !"

 명령이 떨어지자 기골이 장대한 호위 병사들

4,5명이 달려들어 장량을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항우를 쳐다보며 말한다,

 

"본인은 죽기 전에 노공전에 충고의 말씀을 한마디만 여쭙고 싶사옵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노공 자신의 장래를 위해 제 말씀을 꼭 들어 주시옵소서."

 

"이놈아 !

네가 나에게 무슨 할말이 있다는 것이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당장 해봐라 ! "

 장량은 단정히 꿇어앉아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우선 노공께서는 제게 대한 오해부터 풀어 주시옵소서.

노공께서는 저를 패공의 부하로 알고 계시는 모양이오나

저는 한(韓)나라의 재상일 뿐이지, 패공의 사람은 아니옵니다.

패공의 부하가 아닌 제가 무엇 때문에 패공을 위해 노공을 속이려 하겠습니까 ?

 항차 노공의 권세가 천하에 떨치고 있음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온데,

제가 왜 어리석게 패공의 편을 들겠습니까.


노공께서 마음만 가지면 패공을 제거하는 일은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도 쉬운 일 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공께서 술자리를 빌어 패공을 죽이려 하셨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계책이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는 데도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온데,

천하의 대왕이 되실 노공께서 술자리를 빌어 패공을 죽였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노공의 옹졸함을 얼마나 비웃을 것이옵니까.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되면, 만인이 우러러 보는 대왕이 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바라옵건데 노공께서는 저를 죽이지 마시고 패상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진국(秦國)의 옥새와 중보(重寶)들을

 모두 노공에게 갖다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옥새를 손에 넣으셔서 천하의 주인이 되시면

노공을 우러러 받들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오리까.


그러나 지금 저를 죽여 버리시면

옥새는 노공의 손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패공이 옥새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리면

천하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옵니다.

이런 점을 깊이 고려하시기를 바라옵니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물처럼 말하는 장량의 논조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항우는 장량의 말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더구나 자신의 손에 옥새를 넣지 못하게 되면 천하의 대세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말에는 가슴이 철렁하는 충격을 느꼈다.

 항우는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 골똘히 생각하다,

문득 고개를 들며 장량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

그대를 살려 준다면 진나라 옥새를 틀림없이 가져 오겠는가 ?"

 장량이 대답한다.

 

"이를 말씀입니까 !

저를 패상으로 돌려보내 주시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옥새를 갖다 바치겠습니다."

 범증이 옆에서 참고 듣다 못 해 항우에게 고한다.

 

"장량은 죽지 않으려고 꾀를 부리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 꾐에 넘어가 저자를 살려 보내서는 아니되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옥새를 가져다 바치겠다>는 말에 혹해서

장량을 죽일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기에 오히려 범증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즉석에서 꾸짖어 말한다.

 

 "군사의 말대로 홍문연 연회에서 유방을 죽였더라면

 나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오."

 그리고 장량에게 다시 말한다.

 

"그대를 패상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진나라 옥새를 반드시 가져오시오.

약속을 어기면 나는 백만 대군을 일으켜

 유방의 군사를 콩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오."

 

"천지 신명께 맹세하고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장량은 다시 한번 굳은 언약을 하고 패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유방은 장량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내가 죽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선생의 덕택이었습니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변절자 조무상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무슨 재주로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까 ?"

 장량은 그간의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을 하고 말한다.

 

"항우 장군은 패공께서 인사도 없이 돌아가셨다고

크게 분노하면서 저의 목을 베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나라 옥새와 보물들을 항우 장군에게 갖다 바치기로 약속하고,

살아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묻는다.

 

"옥새란 전국(傳國)의 보배요.

그것을 항우에게 갖다 주면 나는 어떡하란 말씀이오 ?

그 언약은 설마 지키려고 약속하신 언약은 아니겠지요 ?"

 

"아니옵니다.

일단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옵니다."

 유방은 그 대답을 듣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면서 장량에게 따지듯이 말한다.

 

"이제 알고 보니,

선생은 나를 위한 사람이 아니라 항우를 위한 사람이었구려.

옥새를 내준다는 것은 <관중왕>의 자리를 내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인데

나더러 어찌 옥새를 내놓으라는 말씀이오 ?"

 

 유방의 불만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장량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침착하였다.

 

"패공께서는 분노를 거두시고

 이 문제를 좀더 거시적(巨視的)으로 생각해 보시옵소서."

 

"옥새를 내주자면서 무엇을 거시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씀이오 ?"

 유방의 분노는 여전히 맹렬하였다.

 유방이 장량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장량은 다시 입을 열어 설명한다.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의 계략을 자세히 들어주소서.

지금 우리가 옥새를 내주지 않으면,

항우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우리에게 쳐들어올 것은 명약 관하한 일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옥새를 빼앗기게 될 뿐만 아니라,

 패공은 포로의 신세를 면하기가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옥새란 하나의 물건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로써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옵니다.

 명분없이 옥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덕을 쌓지 못하면 천하를 잃게 되지만,

비록 옥새가 없더라도 덕을 쌓는다면 천하는 절로 얻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패공께서는 옥새를 미련 없이 내주어서 항우를 기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 연후에 패공께서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그동안에 덕을 쌓도록 하시옵소서.

그러면 옥새가 없더라도 천하는 패공에게 절로 귀속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장량의 손을 힘차게 움켜 잡으며 말한다.

 

"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내가 어리석었소이다.

 옥새를 미련 없이 내드릴 테니, 오늘이라도 항우에게 갖다 주소서."

 다음날, 장량은 홍문으로 항우를 찾아와 옥새와 중보(重寶)를 헌상하며 말한다.

 

"이미 약속드린 대로 옥새를 가지고 왔사옵니다

. 실은, 패공께서 직접 가지고 오셨어야 옳을 일이오나

 어제 대취하셨던 관계로 몸이 불편하시어 제가 대신 가지고 왔사옵니다."

 항우는 크게 기뻐하면서 옥새와 보옥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연 천하의 보물들이 틀림없구나 ! "

 한점의 티끌도 없는 보옥들은 들여다 볼 수록 영롱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항우는 더할 수 없이 기뻐하다가,

옥(玉)으로 된 술잔 하나를 범증에게 집어 주면서,

 "이 옥배(玉盃)를 군사에게 드릴 터이니,

앞으로는 이 술잔으로 술을 드시오."하고 말했다.

 

그러자 백발이 성성한 범증은 그 옥배를 받아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으로

산산조각이 나도록 깨뜨려 버리며,

 

 (아아, 항우와는 더불어 도모할 바가 못 되는구나 !

장차 천하를 얻을 사람은 패공이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패공의 수급(首級)만이 필요하지,

이까짓 술잔 따위가 무슨 보배란 말인가.

우리는 언젠가는 패공에게 포로의 신세를 면하기가 어려우리라.)

 하고 혼자말로 장탄식을 하고 있었다.

 

 항우는 범증이 자신이 하사한 옥배를 깨뜨리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하며 말했다.

 "내가 특별히 내려 준 옥배를 무슨 이유로 깨뜨리오 ! "

 범증은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한다.

 

 "그 옛날 제(齊) 나라의 위왕(威王)은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이

조차(照車)라는 수례를 보배라고 자랑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비웃으면서,

<나에게는 네 명의 현신(賢臣)이 있으니,

 그보다 더 귀한 보배가 어디 있겠느냐> 하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보배를 가볍게 여기고,

어진 신하를 귀하게 여겨온 그런 지혜를 주공께서는 본받도록 하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유방의 목일 뿐이지,

그가 보내 온 옥새나 보물 따위는 아니옵니다.

 그런데도 주공은 그가 보내 준 옥새와 보물을 받아 들고 더없이 기뻐하시니,

이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오리까.

 주공께서 신에게 옥배를 하사하신 그 은총은 십분 고맙게 생각하고 있사오나,

지난날의 일들은 너무도 한탄스럽사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서야 노여움을 풀고

범증에게 달래듯이 말한다.

 

"유방은 사람 됨됨이가 워낙 나약한 까닭에 큰 일을 도모할 인물이 못 되오.

군사는 무엇이 걱정되어 이렇게나 겁을 내시오 ?"

 범증이 다시 대답한다.

 

"그 옛날 등왕(鄧王)은 초문왕(楚文王)을 죽이지 않았다가 초나라에 망했고,

초왕은 진문공(晋文公)을 죽이지 않았다가 진나라에 망한 역사가 있사옵니다.

주공께서는 패공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셨사온데,

 이것은 마치 용(龍)을 바다에 놓아주고,

호랑이를 산에 놓아준 것과 다름이 없어서

다시는 붙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하여 얼른 항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노사(老師)께서는 지나친 기우(杞憂)를 하고 계시옵니다.

패공께서는 노공을 형님으로 받들어 모시고 계시온데,

어찌 다른 뜻이 있으오리까. 부디 지나친 걱정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항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장공의 말씀이 옳은 말씀이오.

유방같이 나약한 자가 어찌 감히 내게 항거할 수 있으리오."

 그리고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장량에게 다시 말한다.

 

 "장공은 유방의 그늘에 머물러 있어 보았자 별 볼일이 없을 테니,

이제부터는 그를 떠나 나를 도와주면 어떻겠소 ? "

 범증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놀라며

항우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고 말한다.

 

 "우리는 장량조차 죽이려다 실패를 하였는데,

 이런 자를 붙잡아 두어서 무엇에 쓰실 것이옵니까.

내놓고 우리를 해치려는 자는 막아 내기가 쉬워도,

장량처럼 그늘에 숨어서 우리를 해치려는 자는 막아내기가 어려운 법이옵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범증의 간언을 우습게 여기며 대답한다.

 

"우리에게 갇혀 있는 몸이 무슨 용을 쓸 수 있다고 그런 걱정을 하시오 ?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군사는 조금도 걱정 마시오."

 이리하여 장량은 본의 아니게

항우의 진영에 연금(軟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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