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熱國誌)68
금우령(金牛嶺) 에서의 장량과의 이별.
장량은 항우와 작별을 하고 패상으로 돌아와 유방에게 아뢴다.
"항우의 허락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으니, 파촉으로 신속히 떠나도록 하시옵소서.
만약 범증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또 무슨 일을 벌이려 할지 모르옵니다."
유방은 부모님을 내버려두고 떠나는 것이 지극히 가슴 아팠지만,
지금 형편에서는 그대로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방이 군사들과 함께 패상을 떠나려고 하자,
수십 명의 노인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울면서 ,유방에게 호소한다.
"저희들은 그동안 패공 덕택에 마음놓고 살아갈 수가 있었사온데,
이제 패공께서는 저희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고 하옵니까 ?
저희들을 버리고 떠나시려거든 ,차라리 저희들을 죽이고 떠나시옵소서."
노인들의 태도로 보아,
그것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소임이 분명하였다.
그러기에 유방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내, 이번만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여러분들과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으나,
여러분들 곁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여러분들을 다시 찾아올 것이니,
여러분들은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시기를 바라오."
그러나 노인들은 울면서,
유방의 옷깃을 움켜잡고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대왕께서 무슨 이유로 이곳을 떠나시려는지 알 길이 없으나,
저희들은 이제 앞으로 누구를 믿고 살아가라는 말씀이옵니까.
정녕 이곳을 기어코 떠나시려면, 저희들을 모두 죽이고 떠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저희들도 모두 패공을 따라가게 해주시옵소서."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유방은 길이 막혀 떠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소하가 숙연한 자세로 노인들에게 말한다.
"지금 우리들은 초패왕에게 쫒겨서 부득이 이곳을 떠나는 길이오.
이처럼 딱한 사정을 모르고 여러분들이 끝까지 우리를 붙잡고 늘어지면,
우리들과 여러분들은 초패왕의 손에 다 함께 죽게 될 것이오.
우리가 오늘은 부득이 여러분들과 작별하고 떠나기는 하지만,
패공께서는 머지않아 여러분들을 다시 찾아오실 것이니,
여러분들은 후일을 기약하고 오늘은 속히 떠나도록 해주시오.
그 길만이 우리도 살고, 여러분들도 사는 길이오."
노인들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물을 머금고,
길을 열며 제각기 작별인사를 고한다.
그리하여 출발이 겨우 가능하게 되자,
장량이 번쾌를 불러 말한다.
"갈 길이 바쁘니, 번쾌 장군은 군마를 신속히 전진하게 하시오.
도중에 무슨 돌발지사(突發之事)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전후방 경계를 삼엄하게 하면서, 쉬지말고 행군을 계속해야 하겠소."
파촉으로 가는 길은 출발부터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왜 이처럼 험난한 산속으로 쫒겨 들어가야만 하는가 ! )
군사들과 함께 험악한 협곡(峽谷)으로 말을 몰아 나가는
유방의 심정은 마냥 처량하기만 하였다.
유방의 군사는 산길이 아무리 험악해도 쉬지 않고 전진을 계속 하였다.
패상을 떠난지 90리 만에 안평현(安平縣)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다시 40리를 더 행군하여 부풍현(扶風縣)을 지난뒤,
봉상군과 보계현을 거쳐 대산관(大散關)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산관은 파촉으로 들어가는 초입(初入)에 불과하였다.
정작 길이 험악하기는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태산 준령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데,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천야만야(千耶萬耶)한 절벽 위에 있는
오솔길 하나뿐이어서, 발을 한 번만 잘못 디뎌도 그대로 천길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절벽위에 있는 오솔길을 그래도 좋은 편이었다.
길을 더해 갈 수록, 산이 하도 높고 골짜기가 너무도 깊어서,
때로는 이쪽 절벽과 저쪽 절벽 사이에 통나무로 가로질러 놓은
잔교(棧橋)도 수없이 많았는데,
그런 다리를 한 번 건너가려면 군사 여럿의 추락사를 면할 길이 없었다.
본디 유방의 군사들은 평야가 넓디 넓은 산동(山東)출신이 많았던 탓에,
산길에 익숙하지 못 한 까닭에 희생자는 더욱 많았다.
(내가 죄없는 젊은이들을 이렇게 까지나 희생을 시켜야 하는가 ? )
유방은 사랑하는 부하들이 벼랑아래로 떨어져 죽는 광경을 볼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처량한 심정은 군사들도 마찬가지여서,
"목숨을 걸고 싸워서 진나라를 정벌한 우리가,
무엇때문에 새도 날아가기 어려운 산속으로 쫒겨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
이처럼 험악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고향에는 영영 못 돌아가게 될 것은 아닌가 ?
차라리 이럴 바에는 이제라도 되돌아 나가,
항우의 초군(楚軍)과 싸움으로 결판내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
하고 저마다 입을 모아 불평을 해댔다.
대장 번쾌도 그 말을 옳게 여겨 큰소리로 외쳤다.
"자, 그러면 여러분의 뜻대로 우리들은 이제부터 말머리를 돌려,
초군을 쳐 버리기로 합시다."
유방도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던지
칼을 뽑아 들고 군사들에게 말한다.
"회왕과의 약속대로라면 함양에 먼저 입성한 내가 관중왕이 되었어야 옳을 일이오.
그러나 항우는 회왕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내게서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고,
우리들을 파촉으로 쫒아 보내고 있는 중이오.
이대로 파촉으로 들어가 버리면 다시는 함양으로 나오는 것이 어려울 것 같으니,
나는 여러분의 뜻에 따라 함양으로 회군(回軍)하여,
항우와 사생 결판을 내기로 하겠소."
유방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울분이었다.
이렇게 군사들과 함께 말머리를 돌리려 소란스러워지자,
장량은 크게 당황하며 소하,여이기 등과 함께 유방에게 간한다.
"대왕께서는 장졸들의 무분별한 불평에 현혹되시어
큰일을 그릇쳐서는 아니 되옵니다.
파촉은 험난한 곳이기는 하오나,
대왕께서 대사를 도모하시기에는 이 보다 좋은 곳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군사를 아무리 크게 키워도 항우는 그 사실을 알 길 없으니,
우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있겠습니까 ?
우리는 힘을 길러 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항우와 싸우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데, 대왕께서는 회군령을 속히 거두어 주시옵소서."
유방은 분노를 삭이느라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언행이 경솔했음을 깨닫고 장량에게 조용히 말한다.
"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내가 너무 울분에 찬 명령을 내렸소.
회군령을 철회할 것이니, 파촉으로 행군을 계속하게 하오."
....길은 갈수록 험악하였다.
일행이 금우령(金牛嶺)을 넘어갈 때, 여이기 노인이 유방과 장량에게 말한다.
"이 험한 고개를 <금우령>이라 하옵는데,
이렇게 불리게 된 데는, 깊은 유래가 있사옵니다."
장량이 반문한다.
"어떤 유래인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선생께서 알고 싶으시다니 여쭙겠습니다."
그리고 여이기 노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옛날, 진나라의 혜왕(惠王)은 촉국(蜀國)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촉나라에는 다섯 명의 신력(神力)을 가진 역사(力士)가 있어,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진혜왕은 그들을 제거해 버릴 생각에서,
무쇠로 다섯 마리의 소(牛)를 만들어 놓고
<다섯 마리의 철우(鐵牛)들은 날마다 다섯 말(斗)의 황금똥(黃金糞)을 싼다.
진나라가 오늘날처럼 부유해진 것은 오로지 다섯 마리의 철우들 덕택이다> 하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놓았다.
촉왕은 그 소문을 믿고, 진나라의 철우가 탐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철우를 훔쳐오기 위해서, 길을 새로 만들고
다섯 명의 역사들로 하여금 진나라에 잠입하여 철우를 훔쳐 오게 하였다.
그러나 진혜왕은 철우를 훔치러 들어온 다섯 명의 역사들을 유인하여
이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그들이 새로 만들어 놓은 길을 이용하여
촉나라로 쳐들어가, 마침내 촉나라를 멸망 시킬 수가 있었다.
여이기 노인은 이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이 고개 이름을 <금우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때부터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건너오고 있는 이 잔도(棧道)가 바로 그때 만들어 놓은 다리입니다."
하고 말끝을 맺었다.
장량은 그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심각한 얼굴로 잔도를 건넌다.
장량은 금우령 고개를 무사히 넘어서자,
말에서 내려 유방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저는 대왕을 여기까지 모시고 왔으니,
이제는 작별을 고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하겠습니다."
유방은 너무도 뜻밖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선생은 고국을 떠나신 이후로 일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를 줄곧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나를 버리고 떠나시겠다니, 나는 어떡하라는 말씀입니까 ?"
장량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저는 대왕을 도와 드리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오니,
그 점은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옵니다."
"나를 도와 주시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시다니요 ?
고국에 돌아가셔서 어떻게 나를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
나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제가 고국에 돌아가서 대왕을 위해
꼭 해야 할 중대한 일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그 세 가지가 어떤 일들인지, 선생은 자세히 설명해 주소서."
장량이 다시 대답한다.
"첫째는 항우를 팽성에 도읍을 해놓게 하고,
장차 대왕께서 도읍하실 함양은 그대로 비워 두게 하는 일이옵고,
둘째는 천하의 제후들을 설득하여 항우를 배반하고
대왕전에 귀의(歸依)하도록 만들어 놓는 일이옵고,
셋째는 대왕께서 한(漢)나라를 일으켜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꼭 필요한 대원수(大元帥)가 될 인재를 널리 구해,
대왕전에 미리 보내는 일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에 크게 감동하여
장량의 손을 움켜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오오 ! 선생께서 나를 위해 이처럼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신지, 미처 몰랐소이다.
선생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이별이 아무리 아쉽기로,
내 어찌 선생을 붙잡을 수 있으오리까."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세가지 큰일을 반드시 이루어 놓고,
대왕께서 함양으로 들어오실 날만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러하오니 , 대왕께서는 파촉에 도착하신 연후에
어떤 고난이 있어도 참고 견디시옵소서.
그리고 파촉에 아무리 오래 계셔도 3년을 넘기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빠르면 이태 안에 함양으로 회군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선생의 말씀대로 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 참겠소이까.
그런데 선생께서 대원수가 될 만한 인물을 천거해 보내 주시더라도,
나는 무슨 증거로 그 사람을 알아볼 수가 있으오리까 ?"
그러자 장량이 대답한다.
"이제부터 소하 승상과 한 통의 증문(證文)을 작성하여
두 조각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대원수가 될 만한 인재를 발견하거든 ,그 증표를 주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소하 승상이 만약 그 인물을 소개하거든, 대왕께서는 저를 믿으시고
그 사람과 천하의 대사를 숨김없이 상의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장량이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유방은 작별이 아쉬워 장량에게 다시 말한다.
"마지막으로 선생에게 부탁이 하나 있으니,
꼭 들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무슨 분부이신지, 어서 말씀해 주시옵소서.
대왕께서 바라시는 분부를 거행하겠나이다."
그러자 유방은 새삼스레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선생께서도 아시다시피, 나의 부모님은 지금 항우의 손에 볼모로 잡혀 계시오.
선생께서 혹시 나의 부모님을 만나 뵈올 기회가 계시거든,
<나는 부모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항우의 강압에 못 이겨 부득이 쫒겨가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가까이 모셔다가 효성을 다하겠다>고 하더라고 말씀드려 주소서."
그렇게 말하는 유방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뜨겁게 흘러 내리고 있었다.
"삼가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매우 죄송스러운 말씀이오나,
저는 갈 길이 바쁘오니 이만 작별을 고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나 유방은 전별연(餞別宴)과 전송(餞送)도 없이 그
냥 헤어지기가 너무도 섭섭하여,
"여러 대장들과 함께 술이나 한잔씩 나누고 떠나도록 하소서."
하고 말했다.
그러나 장량은 사양을 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면
좋지 않은 소문이 널리 퍼질 것이니, 아무도 모르게 떠나기로 하겠습니다.
이제 소하 대인만 잠깐 만나 보고 그대로 떠나겠으니,
대왕께서는 허락해 주시옵소서."
"선생과 술 한잔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기가 너무도 섭섭하지만,
선생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굳이 붙잡지는 아니하겠습니다."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나 오늘의 작별은 후일에 반드시 커다란 기쁨을 가져올 것이니,
과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그러면 이 이상 붙잡지 않을 것이니,
부디 몸 편히 떠나시옵소서."
유방은 목이 메어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못 할 지경이었다.
장량은 유방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소하를 돌아 보며 말한다.
"내가 없는 동안 대인께서는 대왕에게 내 몫까지 충성을 다해 주소서.
우리 두 사람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치면 무슨 일인들 못 해 내리까.
후일 내가 천거한 사람이 증표를 가지고 오거든 ,
대왕께 품하여 그 사람을 꼭 대원수로 기용해 주소서."
하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제가 선생의 몫까지 충성을 다할 것이오니, 선생은 안심하고 떠나소서.
우리가 오늘 작별하기로 어디 영원한 작별이겠나이까."
두 사람은 굳은 언약을 나누고 드디어 작별하였다.
그리하여 장량은 누구의 전송도 받지 않은 채, 다만 종자(從者) 두 명만 데리고,
조금 전에 그토록 힘겹게 넘어온 금우령 고개를 다시 넘어갔다.
계속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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