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초한지를 시작하며 》

오토산 2020. 5. 10. 09:20

초한지(楚漢誌)69

이제부터 초한지.

 

 유방은 장량과 작별을 한 뒤,

다시 갈 길을 재촉하였다. 

 포중(褒中)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5리쯤 갔을때

후미에서 별안간 난데 없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뒷편에서 무슨 일로 저렇게 떠들어대고 있느냐 ?"

유방은 측근에게 물었다.

 

 그러자 바로 그때,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유방에게 말한다.

 

 "대왕 전하 !

조금 전에 우리가 건너온 금우령 고개에 굉장한 산불이 일어났사옵니다."

 

 "금우령 고개에 산불이 났다고 ?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 ?"

 

 "대왕 전하 ! 

 조금 전에 장량이란 자가 도망을 가면서,

자기를 잡으러 오지 못하도록 모든 잔도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뭐야 ?

장량이 도망을 가면서,

추격을 못 하게 모든 잔도에 불을 놓았다고 ?"

 

 그제서야 뒤를 돌아다보니,

 금우령 고개 일대에는 불길이 맹렬하게 솟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장량이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무슨 이유로 모든 잔도를 불태워 버린 것일까 ?)

 

 유방이 그 이유를 몰라서 몹시 불안해 하고 있는데,

군사들은 저마다 아우성을 치면서 말한다.

 

 "장량이란 자가 모든 잔도를 불태워 버렸으니,

우리는 장차 어느 길로 고향에 돌아간단 말인가 "

 

 "누가 아니래 !

고향에 돌아갈 길이 끊겨 버렸으니,

 우리는 영영 고향에 못 돌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 ! "

 

 "장량이란 자가 이처럼 배은 망덕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 자를 우리 손으로 죽여 버릴 걸 그랬어."

 

  장량에 대한 군사들의 원성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잔도가 불타 없어지면 ,

병사들이 심심 유곡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완전히 끊겨 버리기 때문이었다.

 유방도 그 점이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량 선생이 그럴 수가 ..... ? 

 장량 선생조차도 나를 배신하고 떠났단 말인가.... ?"

 

 유방이 소리 내어 원망스럽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소하가 급히 달려와 이렇게 아뢴다.

 

 "대왕 전하 !

 산불이 일어나 다리가 다 타버렸다고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장량 선생은 조금 아까 저와 작별을 하고 떠나실 때,

우리의 이로움을 위해,

잔도를 모조리 불태우고 가시겠다고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놀랐다.

 

 "우리가 언젠가는 그 다리를 이용해

다시 함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데,

 어째서 장량 선생이 그 다리를 모조리 끊어 버렸단 말이오 ?"

 

 유방은 소하의 말을 듣고도,

장량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리를 끊어 버리면

우리에게 이로운 점이 뭐가 있다는 말이오 ?"

소하가 다시 아뢴다.

 

 "장량 선생은 다리를 끊어 버리는 데서 오는

네 가지의 이로운 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우리 손으로 다리를 끊어 버렸다는 소문이 퍼지면,

 항우는 우리에게 회군의 의사가 전혀 없는 줄로 알고

우리를 경계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이 이로운 점의 첫째이옵고,

 

 둘째,

항우는 장한과 사마흔, 동예 등을 삼진왕(三秦王)으로 임명하여,

우리가 함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길목을 지키고 있는데,

항우가 경계하지 않으면 삼진왕들의 경계 태세도

절로 소홀해질 것이니,

이것이 이로운 점의 둘째이옵고,

 

 셋째,

우리 군사들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끊겼기 때문에 도망가기를 단념하고,

상하가 일치 단결하여 대왕께 충성을다할 것이니,

그것이 이로운 점의 셋째이옵고,

 

 넷째,

항우의 제후(諸侯)들은 우리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지면서

저희들끼리 세력 다툼이 일어날 것이니,

이것은 이로운 점의 넷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량 선생은 이같이 이로운 점이 많은 것을 내다 보시고,

돌아가시는 길에 잔도를 계획적으로 불태운다고 하셨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혀를 차며 감탄한다.

 

 "장량 선생이 그처럼 깊은 생각을 하신 줄도 모르고,

나는 일시나마 선생을 의심했으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오.

 그러면 우리는 안심하고 행군을 계속 합시다."

 

 이렇게 일행이 포중에 도착하자,

 유방은 길일(吉日)을 택하여 즉위식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한왕(漢王)에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소하를 재상(宰相)으로 삼고,

조참(曺參), 번쾌, 주발, 관영 등을 원로 공신에 봉하는 동시에,

모든 장병들에게 논공 행상을 후하게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군(軍), 관(官), 민(民)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내렸다.

 

 <민,관,군은 비록 하는 일과 신분이 다를지라도,

 서로의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점에서는 추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군과 관의 기본 사명은

백성들을 안락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데 있으므로,

금후에는 모든 시책을 백성 위주로 펴나가도록 하리라.>

 

 이와같은 훈시가 널리 알려지자,

백성들은 한왕을 친부모처럼 높이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 년이 경과했을 때에는,

 백성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인이 찾아갈 때까지 주워가는 일이 없게 되었고,

밤에도 대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다.

 

 그야말로 집집마다 격양가(擊壤歌)를 높이 부르는

태평 성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장량은 유방에게 작별을 고한 뒤에 파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며, 고국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봉주(鳳州)를 지나 보계산(寶鷄山)을 넘어가고 있노라니까,

별안간 먼 앞에서 말을 탄 일단의 군사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장량과 마주치자,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묻는다.

 

 "혹시,

 선생은 장량 선생이 아니시옵니까 ?"

 

 "그렇소만,

당신네들은 누구시오 ?"

 그러자 군사들은 새삼스레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저희들은 항백(項伯)장군의 명을 받고,

선생을 도와 드리기 위해 오는 중입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를 도와주러 오다뇨 ?

나를 어떻게 도와주려고 왔다는 말이오 ?"

 

 "항백 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파촉으로 가는 길은 워낙 험하여

패공과 장량 선생이 고생이 막심하실 것이니

 저희더러 길을 인도해 드리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항백의 우정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항백 장군의 우정이 고맙기 그지 없구려.

 그러나 패공께서는 이미 파촉으로 들어가셨고,

나는 사정이 있어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오.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 수고스럽게도 여기까지 와 주셨으니,

 나도 여러분과 함께 돌아가 항백 장군을 한번 만나 뵙기로 하겠소."

 

 장량은 발길을 돌려,

항백을 먼저 만나 보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여정(旅程)을 바꿔 버렸다.

 

 그리하여 그 길로 항백을 찾아가니,

 항백은 버선발로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주며 말한다.

 

 "선생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선생께서는 파촉으로 가시지 않고,

어인 일로 혼자 떨어지셨습니까 ?"

 

 장량은 그동안의 경과를 솔직히 말해 주고,

 "고국을 떠난 지가 너무 오래 되어 ,

이제는 그곳 사정을 살펴 보려고 가는 중입니다."하고 말을 하니,

별안간 항백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지면서,

 

 "장량 선생이 떠나신 뒤에

이곳에서는 엄청난 비극이 있었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장량이 크게 놀라며,

 

 "엄청난 비극이라뇨 ?

 어떤 일이 있었길래

<엄청난 비극>이라고 말씀하시오 ?"하고

되받아 물어 보았다.

 

 항백은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키려는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선생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선생께서 너무도 비통해 하실 것같아,

 저는 그 애기를 입에 담기조차 두렵습니다."

 장량은 그럴수록 초조한 감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십니까 ?

어떤 일이라도 상관없으니,

무슨 비극이 있었는지 빨리 말해 주시오."

 

 장량이 재우쳐 묻자,

항백은 마지못해 사실대로 대답한다.

 

  "너무 놀라지 마시옵소서.

 바로 어제 한왕(韓王)께서

항왕의 손에 살해되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왕께서 항우의 손에 살해되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

한나라 도읍에 계신 한왕께서

어떻게 항우의 손에 살해 되셨다는 말씀이오 ?"

 

  그러자 항백은 한왕이 살해된 경위를 자세히 말해 주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항우는 장량이 자기를 버리고

유방과 함께 파촉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곧 한왕을 호출하였다.

그리하여 한왕이 달려오기가 무섭게 다짜고짜로,"

 

 "유방과 짜고 나를 배반하려고

장량을 파촉으로 보내 버렸으니,

 너는 나의 원수다 ! "하고 호통을 치며,

한왕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왕께서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 셈이구려."

장량은 목을 놓아 통곡하다가 항백에게 다시 묻는다.

 

 "그러면 대왕의 시신(屍身)은 어찌 되었소 ?"

 

  "한왕의 시신은 본국에서 국장(國葬)을 지내게 하려고

 제가 어제 고국으로 돌려보내 드렸습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나는 고국으로 급히 돌아가야 하겠소이다."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아침에 떠나시면 어떻겠습니까 ?"

 

 "한 (韓)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내가

대왕을 위하여 순절(殉節)은 못 하나마,

 어찌 한가롭게 귀국을 지체할 수 있으리오.

나는 이 길로 고국에 돌아가겠으나,

한 달 안으로 장군을 다시 찾아오기로 할 테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때를 기다리고 있겟습니다."

장량은 항백과 작별을 하고 나자,

고국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고국에 돌아와 보니,

 한나라의 조정은 온통 비통에 잠겨 있었다.

 장량은 대왕의 영전에 엎드려 흐느껴 울며,

떨리는 목소리로 맹세하듯 말한다.

 

 "대왕께서 신이 불민(不敏)한 탓으로

폭군 항우의 손에 시해(弑害) 되셨으니,

항우는 이제 신에게는 불구 대천(不俱戴天)의 원수입니다.

신은 대왕의 혼령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리고자,

 천지 신명에 맹세코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장량의 맹세가 얼마나 처절했던지,

동석하였던 만조 백관들도 모두 함께 목을 놓아 울엇다.

 

 지금까지는 유방과 항우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한왕 <시해 사건>이 난 지금에 와서는,

항우는 장량의 천철지한의 원수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