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초회왕의 시해(弑害)》

오토산 2020. 5. 11. 09:14

초한지(楚漢誌)72

 초회왕의 시해(弑害)

 

 항우는 하루속히 도읍을 팽성으로 옮기고 싶었다.

때마침 범증이 팽성에 가 있었으므로,

항우는 범증에게 계포(季布)를 보내어,

 

"의제(義帝)를 빨리 다른 곳으로 쫒아 보내도록 하라 ! "

 하는 엄명을 내렸다.

 

 범증이 항우의 뜻을 의제에게 전하니,

의제가 개탄하면서 말한다.

 

"나는 이 나라의 제왕이오.

제왕이 명령을 내리면 신하는 그 명령을 아랫사람들에게 전달할 의무만이 있을 뿐이오.

 항우는 그 옛날 나를 임금으로 내세우는 덕택에,

제후들도 항우에게 협력하여 진나라를 정벌할 수가 있었던 것이오. 

 나는 항우와 유방이 출진(出陳)할 때,

함양을 먼저 함락시키는 사람을 관중왕에 임명하겠노라고

철석같이 언약을 했던 일이 있었소.

그런데 항우는 그 언약을 배반하고 유방에게서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더니

 이제는 나까지 산속으로 정배를 보내 버리려고하니,

세상에 이런 불충스러운 행패가 어디 있단 말이오 ?"

 

"....."

 범증은 얼굴이화끈거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의제가 다시 말을 계속한다.

 

"나의 신하인 항우가 이제 와서는 나의 위에 올라서려고 행패를 부리니,

이것은 어찌 인신(人臣)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소.

그대는 항우의 아부(亞父)가 아니오 ?

 항우에게 잘못이 있으면 죽음으로써 간언을 올려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 그대는 양심도 없는 사람이란 말이오 ?"

 

 의제의 공박이 준엄하기 짝이없어서,

 범증은 땅에 엎드려 아뢴다.

 

"신도 패왕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사오나,

패왕은 끝내 듣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계포 장군까지 보내와

<불원간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 올 테니, 폐하를 빨리 다른 곳으로 가시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신으로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다만 폐하의 처분만 바랄 뿐이옵니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요.

무릇 대신이라는 자는 마땅히 신도(臣道)에 따라서 임금을 섬겨야 하는 법이오.

 그대가 항우에게 아부하는 소인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범증은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려 아무말도 못 하고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런 연후에 계포를 항우에게 돌려보내면서 그간의 경과를 사실대로 알려 주었다.

 항우는 계포로부터 상세한 보고를 받고, 주먹을 치며 대로했다.

 

"의제라는 자는 본시 무명 수자(無名竪子 : 별 볼일 없는 사람)하던 인물을

우리 가문에서 내세워 옹립한 것인데,

그자가 이제 와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고 덤비니,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자는 나보다 유방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

계포 장군 ! 이 자를 어찌 했으면 좋겠소 ?"

 하고 물어보았다.

 

 계포는 항우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는 극렬 분자인지라,

그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의제가 유방과 짜고 대왕을 해치려 한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의제를 제거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에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후일에는 큰일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항우는 계포의 말을 옳게 여겨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한다.

 

"장군의 의견에는 나도 동감이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소."

 

"그까짓 의제를 없애 버리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인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

 

 "의제는 명색만은 당당한 <제왕(帝王)>이오.

 따라서 <제왕>을 죽여 버리면 나는 역신(逆臣)으로 몰려

 천하의 비난을 사게 될 것이니, 그 점이 두렵다는 말이오."

 계포는 그 말을 듣고 소리내어 웃으며 말한다.

 

 "대왕 전하 ! 그런 점은 조금도 염려 마시옵소서.

다만 대왕께서는 의제에게 <침주로 천도하시라>고

 정중한 표문(表文) 한 장만 올리시면,

만사는 감쪽같이 해결할 방도가 있사옵니다."

 

"표문을 올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단 말이오 ?"

 

 "제가 구체적인 방도를 말씀 올리겠습니다.

구강왕(九江王) 영포와 형산왕(衡山王) 오예와,

 임강왕(臨江王) 공오 등을 침주로 오는 산중에 대기시켜 두었다가,

그들로 하여금 의제를 죽여 없애게 하면

, 대왕께서는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으시고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계략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장군의 계략은 참으로 명안이오.

그러면 그 방법을 쓰기로 합시다."

 

 항우는 그날로 여포,오예,공오에게 연락하여

팽성에서 침주로 통하는 산간에 군사들을 은밀히 매복시켜 놓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의제에게 다음과 같이 지극히 정중한 표문을 올렸다.

 초패왕 신 항우는 의제 폐하께 글월을 올리옵니다.

 

신 항우는 어명을 받들고 진나라를 정벌한 뒤에,

국법에 의하여 진황제 자영을 죽이고 천하를 정복했으니,

이제 의제께서는 사실상 천하의 제왕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팽성은 군사적 요충이기는 하오나,

 폐하께서 거처하실 안락한 곳은 못 되옵니다.

하오니 폐하께서는 침주로 옮겨 오시고,

 그 대신 신이 팽성으로 이동함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침주는 호남의 명군(名郡)으로,

 산수가 수려할 뿐만 아니라 유명한 동정호(洞庭湖)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폐하께옵서 지내시는데 이 이상 좋은 곳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침주로 속히 옮겨 오시도록 하시옵소서.

 

 표문에 담겨 있는 문구(文句)만은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제는 항우의 표문을 받아 보고,

 좌우의 중신들을 서글픈 시선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항우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 침주로 빨리 옮겨 오라고 성화같이 재촉하고 있으니

 이는 신하로서의 도리에 벗어난 일이오.

그러나 항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필경 무슨 변을 당할 지도 모르니,

나는 곧 침주로 떠나야 하겠소."

 

"....."

 

 좌우의 중신들은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무슨 화를 당하게 될지 몰라,

모두들 허리만 굽신거릴 뿐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의제가 팽성을 떠나려 하자,

 백성들이 길가에 엎드려 울면서 호소한다.

 

 "저희들은 폐하의 성덕으로 그동안 마음놓고 살 수가 있었사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옵서 돌연 침주로 떠나가신다고 하니,

언제 또다시 돌아오시게 되실 것이옵니까?"

 

의제는 목이 메어 대답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

백성들과의 이별이 피차간에 그렇게나 슬펐던 것이다.

이윽고 대강에 이르러 배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게 불며 물살이 거칠어 돛대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어 배를 강가에 매어 놓고 그날 밤은 민가에서 자게 되었는데,

 의제는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게되었다.

 

의제가 꿈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고 하노라니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더니, 

 홀연 어린 동자(童子) 둘과 선녀(仙女) 하나가 나타나더니

의제에게 큰절을 올리며 아뢴다.

 

 "폐하 ! 저희들은 천제(天帝)의 명을 받들고, 폐하를 모시러 왔사옵니다.

지금 용궁에서 천제께서 만조 백관들과 함께 폐하를 기다리고 계시오니,

저희들과 함께 용궁으로 임어(臨御) 해주시옵소서."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의제는 의아스러워 묻는다.

 

"용궁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데,

어찌하여 나보고 용궁으로 가자고 하느냐 ?"

 그러자 동자가 대답한다.

 

 "폐하는 제왕의 덕을 갖추고 계신 훌륭한 어른이오나,

 지금은 적제(赤帝)가 득세하여 날뛰고 있으므로,

 제위를 그자에게 물려주시고 용궁으로 들어오시라는 천제의 분부가계셨사옵니다."

 

"뭐야 ?

제위를 적제에게 물려주고 용궁으로 들어오라고 .... ?"

 

 의제는 깜짝 놀라 배에서 뛰어나오려고 하다가 ,

 문득 깨어 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의제는 꿈이 하도 이상하여 측근에게 꿈 이야기를 말하니,

 "폐하 ! 그 꿈은 매우 불길한 꿈이옵니다.

 이대로 행차하시다가는 무슨 변을 당하실지 모르오니,

팽성으로 환어(還御) 하심이 좋을 줄 아뢰옵니다."

 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가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의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떠난 이상, 팽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천수(天壽)라면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나는 어떤 변을 당하더라도 침주로 가기로 하겠다."

 하고 침주로의 길을 중단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다음날 의제는 일찌감치 배를 타고 침주를 향하여 떠났다.

 그리하여 대강(大江)을 절반쯤 건넜을 때,

건너편 산속에 숨어 있던 영포, 오예, 공오 등이

세 척의 배에 군사들을 가득 싣고 다가오더니,

 

 "저희들은 항왕의 명에 의하여, 폐하를 마중나온 군사들이옵니다.

폐하가 의제가 틀림없으시다면,

옥부(玉符)와 금책(金冊)을 증표로 보여 주시옵소서."

 하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의제는 배를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말인즉 <마중을 나왔다>고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살기가 등등하였다.

 의제는 위험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제왕의 위엄을 지키려고 의연한 자세로 그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나를 마중나온 것이 사실이라면,

 제왕인 나에게 증표를 보여 달라는 것이 무슨 무례스러운 짓이냐.

세 명의 장수가 강 한복판까지 많은 군사들을 몰고 온 것을 보면,

너희들은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냐 ?"

 

 의제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포, 오예,공오 등은

 군사를 몰고 배 위로 달려 올라오더니,

의제에게 달려들어 이리떼처럼 난도질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의제는 몸에 수많은 상처를 입고 뱃전으로부터 물 속으로 떨어지며

 서쪽 하늘을 향하여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천하의 역적 항우란 놈은 듣거라.

 나는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네 놈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으리라."

 

의제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처참하게도 수중 고혼(水中孤魂)이 되었다.

 한편, 의제를 환영하기 위해 강가로 몰려나와 있던 백성들은

 의제가 영포 등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되는 끔찍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고

저마다 치를떨었다.

 

더구나 80객 어부(漁夫)인 동공(董公) 노인은,

의제가 영포의 손에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눈물을 뿌리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의제께서 역적들의 손에 시해되셨으니,

 우리들은 시체라도 찾아 내어 정중히 장사를 지내 드려야 하지 않겠나.

오늘 밤 여러분들은 모두 강가에 나와 , 의제의 시체를 찾도록하자."

 

 그날 밤, 백성들은 의제의 시체를 찾아내려고

저마다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강가로 달려나왔다.

 그리하여 배를 나눠 타고 수중 탐색을 계속하기를 여러 시간 만에,

마침내 시체를 발견하였다.

 

의제의 얼굴을 직접 대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용포(龍布)와 용을 조각한 옥환(玉環)을 팔목에 차고있는 것으로 보아,

의제의 시체임을 알 수가 있었다.

 

 백성들은 의제의 시체를 뭍으로 모셔 올려 비밀리에 장사를 지내 주면서,

한결같이 이를 갈며 맹세하였다.

 

"우리들은 언젠가는 한왕 유방을 모셔다가 임금님으로 삼고,

 항우에게는 의제의 원수를 갚기로 하리라."

 

계속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