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정국 상소문 (政局 上訴文)》

오토산 2020. 5. 10. 09:47

초한지(楚漢誌)70

 정국 상소문 (政局 上訴文)

 

 장량은 한왕의 국장(國葬)을 치루고 나서 한 달쯤 지난 뒤에, 항백을 다시 찾아왔다.

 항백은 장량을 반갑게 맞아들이며 묻는다.

 

"선생은 앞으로 거취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

 장량은 슬픈 얼굴로 대답한다.

 

"나는 국왕을 돌아가시게 만든 죄인이니, 내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러니 이제는 세상의 뜻을 버리고 주유 천하(周遊天下)로

여생을 방랑으로 마칠 생각이오."

 

 장량이 이렇게 엉뚱한 대답을 하게 된 것은 친구인 항백에게 조차,

자신이 갖게된 항우에 대한 철천지한의 결심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항백은 지금 항우의 밑에서 상서령(尙書令)을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의 비밀을 송두리째 털어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항백은 장량이 벼슬길로 나갈 뜻이 없음을 알고 은근히 안심하면서,

 "그렇다면 당분간 우리 집에서 휴양을 하도록 하시지요."하고 말했다.

 

 다행히 항백의 서재에는 만여 권의 서적이 쌓여 있엇다.

 장량은 그 중에 <상소문집(上訴文集)> 이라는 책을 읽어 내려 가다가,

 어느 날 놀라운 명문 한 편을 발견하였다.

그 문장은 어떤 사람이 항우에게 올린 상소문이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하지도(天下之道)에 대해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무릇 올바른 치도(治道)란, 세력을 존중하는데 있지 아니하옵고

천하의 기미(機微)를 명찰하는 데 있다고 생각되옵니다.

천하의 기미란, 강약(强弱)과 허실(虛實)에 도통하고,

이해(利害)와 득실(得失)의 실체를 터득함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만약 천하의 기미에 통하지 못하면, 그 세력이 제아무리 막강하여도

그것은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패망하게 되는 법이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군세(지지율: 支持率)를 너무 과신하지 마시고,

천하의 기미를 명철하게 살리도록 하시옵소서.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일시적인 득세만으로

천하의 인심을 얻으시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옵니다....>

 

 장량은 그 상소문을 읽어 보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그 상소문이야 말로 천하의 치도에 도통한

현사(賢士)의 문장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항우에게 이런 상소문을 올린 인물이 과연 누구일까 ?)

 장량으로서는 상소문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 사람이야 말로 대원수(大元帥)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밤 장량은 항백에게 넌즈시 이렇게 물어 보았다.

 

 "이 상소문은 천하의 명문인데, 이것은 누가 쓴 상소문이오 ?"

 그러자 항백이 대답한다.

 

"이 상소문은 한신(韓信)이라는 장수가 항왕(項王)에게 올린 상소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항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왔지만,

 이처럼 경륜(經綸)이 높은 상소문은 저도 처음 보았습니다."

 

 장량은 머리를 거듭 끄덕이며,

 "그 점은 나 역시 동감입니다.

 그렇다면 한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한신은 본시 회음(淮陰) 출신으로 집도 가난하려니와,

지체가 무척이나 비천(卑賤)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범증은 그의 재능을 유난히 귀하게 여겨,

그를 대장으로 등용하도록 여러 차례 품고(稟告)한 일도 있었으나,

항왕은 그 말을 듣지 않으시고 아직도 <집극랑>이라는 하급 벼슬 자리에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중이옵니다."

 

 "항왕이 이 상소문을 읽어 보고도

 한신을 등용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

 

"항왕은 이 상소문을 읽어 보고 한신을 등용하기는 커녕

오히려 <젊은 놈이 방자하기 짝이 없다>고 대로하시면서

<엄중 처단하겠다>는 것을, 제가 중간에서 가까스로 무마해 놓았습니다."

 

 "음 !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

그러면 한신이라는 사람은 나이가 몇 살이나 된 사람이오 ? "

 

"이제 겨우 30을 넘어선 지사형(志士型)의 무장올시다."

 

"아, 그렇군요.

젊은 사람의 생각이 보기보다는 매우 예리합니다."

 

 장량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 속마음으로는,

 (한신이 이처럼 비범한 인물이라면,

한 번쯤 그를 만나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결심을 하고,

비밀리에 그를 찾아보기 위해, 다음날 아침 여장을 꾸리고 항백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으니,

 나도 이제는 길을 떠나야겠소이다."

 항백은 장량을 만류하며 말한다.

 

"선생은 저의 집에 계시지않고,

어디로 가신다고 길을 떠나시렵니까 ?"

 

 "내가 장군 댁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남에 눈에 뜨게 되면

  피차간에 이롭지 못할 것 같으니, 이제는 깊은 산속에 숨어 버리려는 것이오."

 

장량은 거짓말을 꾸며 항백과 작별을 하고 거리로 나온 후,

 몸에는 해어진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땟국이 꾀죄죄 흐르는 방갓(方笠)을 쓰고,

어깨에는 밤(栗)이 가득 들어있는 자루를 둘러메고,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이름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도사(道士) 행세를 하기 시작하였다.

 

 장량은 이런 꼴로 거리를 누비고 다니면서도 아이들을 만나기만 하면

자루 속에 들어있는 밤을 여남은 톨씩 뿌려 주곤 하였다.

아이들은 밤을 얻어먹는 재미에 장량이 나타나기만 하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장량은 그 중에서 가장 똑똑해 보이는 아이 하나를 눈여겨 보아 두었다가,

어느 날 그 아이와 단 둘이 남게 되자,

 아이에게 밤을 듬뿍 안겨 주면서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였다.

 

 

 "내가 너에게 재미있는 노래 하나를 가르쳐 주고 싶은데,

 너는 그 노래를 나에게 배우려느냐 ?

 만약 네가 노래를 배우겠다고 하면 네게 밤을 얼마든지 주겠다."

 

"밤을 얼마든지 주신다면 노래를 배울께요."

 

 "그러면 내가 노래를 가르쳐 줄 테니,

잘 듣고 따라 불러 보거라."

 그리고 장량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담장 저편에 방울 소리 울리니

 소리는 들려도 사람은 보이지 않네

 몸이 귀하게 되어도 고향에 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서 밤길을 가는 것과 같이 허무한 일이다.

 

 소년이 노래를 제대로 부르게 되자,

장량은 그 소년에게 다시 이런 부탁을 하였다.

 

"너는 이 노래를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어서,

모든 아이들이 너 처럼 잘 부르게 하여라.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누구한테서 배웠냐고 묻거든,

 꿈에 어떤 백발 노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었다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너는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

 소년이 의아하게 여기며 반문한다.

 

"아저씨가 가르쳐 주었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안 돼요 ?"

 

"그렇게 대답했다가는,

너는 천지 신명께 무서운 벌을 받아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알겠어요.

그러면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할께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장량이 농사꾼으로 변장을 하고 거리에 나와 보니,

 아이들은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장량이 아이에게 가르쳐 준 노래를

신바람 나게 , 따라 불러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량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때마침 항우가 민정을 살피려고 미복 잠행(微服潛行)을 나왔다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매우 놀라게 되었다.

 그 이유는 노래말의 내용이 초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있는 자기를

야유하는 노래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 어떤 놈이 나를 야유하려고 저런 노래를 퍼뜨리고 있단 말인가 ?)

 항우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들에게 다가가 물어 보았다.

 

"애들아 !

 이런 노래를 누가 가르쳐 주더냐 ?"

 그러자 한 아이가 항우 앞으로 나서며 대답한다.

 

 "이 노래는 사람한테서 배운 노래가 아니에요.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가르쳐 주신 노랜걸요."

 

"뭐야 ?

 꿈에 나타난 백발 노인에게서 배운 노래라고 ?"

 항우는 크게 놀라면서,

불현듯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꿈에 백발 노인이 어린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면,

그것은 나더러 고향인 팽성으로 돌아 가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니겠는가 ?

그렇다면 나는 팽성으로 도읍을 빨리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항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대궐로 돌아온 후,

문무 백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말한다.

 

"요즘 저자 거리에는 내게 대한 괴이한 노래가 널리 퍼지고 있는데,

경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소 ?"

 문무 백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한다.

 

"지금 저자 거리에 무슨 노래가 퍼져 돌아가고 있는지,

저희들은 잘 모르옵니다."

 

"모른다니 ?

그 노래는 하늘이 나에게 내려 보내신 계시가 담긴 것인데,

그 노래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오 ?"

 

 

"그 노래가 어떤 노래이옵니까 ?"

 

"이런,

답답한지고 ! "

 

항우는 혀를 끌끌 차며 아이들에게서 들은 노래의 가사(歌詞)를

만조 백관들에게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리고,

"<몸이 귀하게 되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음은 비단옷을 입고서

밤길을 가는 것과 같이 허무한 일이다>고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내가 관중왕이 되어서도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을

 나무라는 내용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

 팽성은 나의 출생지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초나라의 도읍이오.

그러니 나는 길일을 택하여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 가기로 하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자 간의 대부(諫議大夫) 한생(韓生)이 나서며 아뢴다.

 "대왕 전하 !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하늘의 계시가 아니옵고,

어떤 자가 조작한 노래일 것이옵니다.


이왕 천도(遷都)를 하시려면 팽성으로 가실 것이 아니라,

함양으로 옮기도록 하시옵소서.

함양으로 말할 것같으면, 동쪽으로는 황하(黃河)와 함곡관(函谷關)이 있고,

 서쪽에는 대룡관(大龍關)과 산란관(山蘭關)이 있고,

 남쪽에는 종남산(終南山)과 무관(武關)이 있고,

북쪽에는 경위수(涇渭水)와 동관(潼關0이 있어,

군사적으로도 난공 불락의 요새이옵니다.

게다가 삼산 팔수(三山八水)의 어간에는 옥야(沃野)가 천리로 전개되어 있어서,

 함양이야 말로 천부(天府)의 도읍지이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함양을 버리시고,

 하필이면 팽성으로 천도를 하시려고 하옵니까 ?"

 

 한생의 진언(進言)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다.

 함양이야 말로 한 나라의 도읍지가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코웃음을 치면서, 한생에게 반박한다.

 

 "함양으로 말할 것 같으면 , 시황제가 도읍했다가 망친 곳이오.

남이 망한 곳에 내가 왜 도읍을 하겠소 ?

내가 팽성으로 천도하려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소."

 

"그것은 어떤 이유이옵니까 ?"

 

 "첫째, 나는 정도(征途)에 오른 지 3년이 넘도록

아직 고향에 한 번도 돌아가 보지 못햇으니 그것이 첫째 이유요.

둘째, 함양에는 산이 많아 자연 전망이 나쁘니 그것이 둘째 이유요.

셋째, 하늘은 나에게 초나라로 돌아가라는 계시의 노래를 내려 주셨으니,

이것이 팽성으로 천도하려는 세 가지 이유요."

 한생은 그 말을 듣고 다시 간한다.

 

"태양이 중천에 높이 솟아 있어야만 따듯함을 골고루 베풀어 줄 수 있듯이,

제왕은 중앙에 군림해야만 만인의 추앙을 받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고향에 돌아가시는 것만을 영화로 생각하시옵니까 ?

 팽성으로의 천도에 대한 점은 다시 한 번 고려해 보시옵소서."

 그러나 항우는 조소를 지으며 다시 반박한다.

 

"천하 만민 모두가 내 것이니,

 내가 어느 곳에 도읍을 하거나 마찬가지가 아니오 ?

그러니 내가 가고 싶은 팽성으로 천도하려는 것이오."

 한생이 또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지난 번에 범증 승상이 팽성으로 떠나실 때,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데도 이동하지 말라는

 부탁이 있었던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대왕께서는 승상과의 언약을 벌써 잊어버리셨사옵니까 ?"

 그러자 항우는 별안간 노기가 등등하여 한생에게 호통을 내지른다.

 

"천하의 대왕인 내가,

  범증과의 약속을 꼭 지켜야 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

나의 행동을 구속할 자는 아무도 없으니, 경은 잔말 말고 썩 물러나시오 ! "

 간의 대부 한생은 마지못해 어전을 물러나오며,

 홧김에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세상사람들이 <초나라 놈들은 갓을 쓴 원숭이 같은 놈들>이라고 놀리더니,

과연 그 말이 옳았구나 ! "

 

항우는 그 말을 어렴풋이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옆에 있는 진평에게 묻는다.

 

 "한생이 지금 밖으로 나가면서 내게 욕을 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였소 ?"

 

그러자 진평은 항우의 질문에 사실대로 고한다.

 "간의 대부는 지금 밖으로 나가면서,

 대왕 전하를 가리켜 <갓을 쓴 원숭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퍼부은 것으로 들렸사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옥좌에서 벌떡 일어서며,

벼락 같은 호통을 질럿다.

 

"한생이란 놈이 대왕인 나를 이처럼 모욕할 수가 있느냐 ... ! 

 여봐라 ! 집극랑 한신은 어디 있느냐.

 한생이란 놈을 지금 즉시 거리로 끌어 내어,

펄펄 끓는 기름솥에 삶아 죽이도록 하라 ! "

 

 한신이 항우의 명을 받고,한생을 죽이려고 네거리로 끌고 나오니,

 구경꾼들이 시방에서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 구경꾼들 중에는 장량도 농사꾼으로 변장을 하고 숨어 있었다.

 

네거리 한복판에 커다란 가마솥이 걸리고, 장작불이 지펴지고 ,

기름이 지글지글 끓기 시작하자,

악에 받친 한생이 군중들을 향하여 일장 연설을 퍼붓는다.

 

 "만천하의 백성들은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나는 간신배들 처럼 나라를 망친 것도 아니고, 국법을 어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오.

어리석은 항왕이 아이들의 노랫말에 속아서 도읍을 팽성으로 옮기려고 하기에,

함양으로 천도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간언을 올렸다가 죽게 되는 것이오.

나는 오늘 죽어 없어지겠지만, 여러분들은 두고 보시오.

 나는 분명히 말해 두거니와 이렇듯 우매한 항왕은

조만간 유방의 손에 필연적,망하고 말 것이오."

 

 한생이 예언 같은 말을 외쳐대자,

한신은 꾸짖듯이 나무란다.

 

"간의 대부는 아무리 억울하기로 말씀을 조심해 주시오.

만약 그런 악담이 항왕의 귀에 들어가면, 나까지 화를 입게 되겠소."

 그러나 한생은 계속해 외쳐댄다.

 

"나는 나라를 올바르게 인도하려다가 죽기는 하지만,

 후일 백성들이 나의 충성을 알게 될 것이며,

 황천길에 만날 천제(天帝)께서도 나의 충성을 알아주실 것이다."

 

 그러자 한신은 그 말이 아니꼬운 생각이 들어서,

 "대부는 간언을 올렸다가 죽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당연한 처벌이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한생은 길길이 뛰며,

한신에게 대든다.

 

"그대는 내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나를 모욕하는가.

나의 충성에 잘못이 있다면 어디 말해 보라 ! "

 한신은 위연한 어조로 대답한다.

 

 "대부는 자신의 충성을 너무도 자긍스럽게 여기시니 , 감히 한 말씀 올리겠소이다.

 대부가 간의(諫義)의 중책을 맡고 계시는 동안,

죽음으로써 간언을 올려야 했을 중차대한 사건들이 너무나도 많았소이다.

그런데 여태까지는 줄곧 아무런 말씀도 없다가 ,

죽게 된 이마당에 이르러 충성을 내세우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

 한생은 그 말을 듣고 더욱 화를 내며 말한다.

 

"지난날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단 말인가 ?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기탄없이 말해 보게 ! "

 

한신은 죽게 된 사람과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죽게 된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생은 그런 침묵을 잘못 해석하고, 따지듯이 물어댓다.

 

"내 충성에 잘못이 있었다면 어서 말 해 보라고 했건만,

어째서 말을 못 하는가 ?그러면서도 나의 죽음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한신도 계속 침묵만 지킬 수는 없었던지,

 "대부께서 그렇게까지 자신의 충성을 고집하신다면,

내가 평소에 보아 온 대부의 언행에 대한, 나의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리겠소이다.

 항왕이 젊었을 때 경자관군(卿子冠軍)의 수령이었던 송의(宋義) 장군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로는 그것은 분명한 하극상(下剋上)이었소이다.

 그런데 대부는그 일에 대하여 어찌하여 일언 반구의 간언도 올리지 않았소이까 ?


그나 그뿐 입니까 ?

얼마 전에 항왕이 삼세 진황(三世秦皇) 자영을 죽일 때에도,

 진시황의 무덤을 파헤쳤을 때에도, 대부는 한 말씀의 간언도 올린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항왕이 진나라 군사 20만 명씩이나 생매장을 했을 때에도 아무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천도 문제로 간언을 올린 것은 무슨 까닭이었습니까 ? 

 

항왕은 승상의 간언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한 항왕에게 간언을 올린 것은 죽음을 자초한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한신의 논변은 장강 유수처럼 도도하였다.

 그러려니 천하의 충신으로 자차하던 한생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한신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대부는 항왕을 원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어린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 퍼뜨린 그 사람을 원망하소서.

모르면 모르되, 그런 노래를 지어 퍼뜨린 사람은,

지금 구경꾼들 속에 숨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까부터 군중 속에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장량은

한신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다른 사람의 등뒤로 몸을 감췄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

 (한신이라는 사람은 과연 무서운 인물이구나 !

저 사람을 대원수로 발탁하게 되면,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가 있겠구나 ! )

 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이렇게 한생이 죽고 나자,

항우는 계포(季布)장군을 팽성으로 보내면서,

 "시급히 천도할 테니,

승상 범증과 상의하여 팽성에 대궐을 새로 짓도록 하라."

 하고 명했다.

 

 이제는 항우에게 팽성으로의 천도를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신은 항우의 명령이라서 할 수 없이 대부 한생을 죽이기는 했지만 ,

항우는 자신이 오랫동안 모실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어디론가 떠나갈 생각을 품게되었다.

 

계속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