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의제의 국장과 유방의 오판》

오토산 2020. 5. 23. 12:43

초한지(楚漢誌)95
의제의 국장(國葬)과 유방의 오판(誤判)

한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하남성(河南城)에 이르니,

성주 신양(申陽)이 많은 백성들과 함께 멀리까지 마중을 나왔다.
신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이곳에는 <동공 삼로(董公三老)>라고 부르는 세 분의 현로(賢老)가 계시는데,

그분들이 대왕 전하를 꼭 배알하고자 하옵니다."

"동공 삼로 ... ?

그분들은 어떤 노인들이오 ?"

"지난날 항우가 의제(義帝)를 살해하여 시체를 강물에 던져 버렸을 때,

항우의 반역 행위에 의분(義憤)을 느끼며 의제의 시체를 자기네 손으로

직접 건져 내어 정중하게 장사를 지내 드린, 이곳의 어르신네들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눈물겹게 감동하였다.

"오오, 그런 어르신네들이라면 내 어찌 만나 뵙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분들을 꼭 만나 뵙고 싶으니, 수레를 보내 정중히 모셔오도록 하오."

이윽고 세 사람의 노인들이 한왕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가 80 고개를 넘어 신선같이 거룩해 보이는 호호백발의 노인들이었다.
한왕은 몸소 머리를 숙여 장읍(長揖)하면서 말한다.

"귀하신 어르신네들을 진작 찾아 뵙지 못해 죄송 망극하옵니다."
세 노인은 한왕에게 국긍 배례를 하며 아뢴다.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켜 초패왕을 치신다 하옵기에,

저희들 세 늙은이는 대왕 전하에게 꼭 사뢰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 왔사옵니다."

"고마운신 말씀이시옵니다.

무슨 말씀이라도 들려주시면 고맙게 경청하겠습니다."

한왕이 세 노인을 당상으로 정중히 모셔 올리니,

그들은 다시 한 번 국긍 배례를 하면서 말한다.

"자고로 덕(德)을 순응하는 자는 흥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항우라는 자는 극악 무도하여,  의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빼앗았으니,

그 어찌 그를 천하의 도둑이라 아니 할 수 있으오리까.

인자(仁者)는 만용(蠻勇)을 휘두르지 않고,

의자(義者)는 완력(脘力)을 쓰지 않는 법이옵니다.

자고로 뚜렸한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키면

설사 전쟁에 승리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법이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지금 아무런 명분도 내세우지 아니하시고 초(楚)를 정벌하려

하시니, 그래 가지고서야  천하의 인심을 어떻게 규합할 수 있으오리까 ?

저희 세 사람은 그 점이 염려되어 대왕 전하를 찾아 뵙게 되온 것이옵니다."

동공 삼로의 충고는 놀랄 만큼 신랄하였다.
한왕은 노인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머리를 수그리며 물었다.

"고마우신 말씀이시옵니다.

그러면 어떤 명분을 내세워야할 지, 가르침을 주소서."
그러자 한 노인이 대답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출정(出征)에 앞서 의제의 발상(發喪)을 만천하에 선포하셔야 하옵니다."

"의제의 발상 .... ? "
한왕은 노인들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해 그렇게 반문하자,

노인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잔학 무도한 항우의 손에 시해된 의제의 유해(遺骸)는

저희들 세 사람이 강물에서 건져내어 장사를 정중하게 지내드리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지내 드린 장사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에 불과할 뿐,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줄 만한 공적(公的)인 국장(國葬)은 아니었습니다.

의제의 서거(逝去)는 마땅히 국장으로 치뤄야 옳을 일이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초나라를 치기에 앞서,

먼저 의제의 국장부터 치루셔야 할 것 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참으로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의제를 정식으로 국장 지낸 일이 없으니,

이 기회에 의제의  국장을 공적으로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노인들은 한결같이 감격해 하며 다시 아뢴다.

"대왕께서 의제의 국장을 치루고 난 뒤,

초나라를 치게 되면, 그때에는 초나라를 치는 명분이 뚜렷해질 것이옵니다.

명분이 이 처럼 뚜렷해지면, 어느 후백(侯伯)인들 대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

한왕은 <동공삼로>의 충고가 한없이 고마워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했다.

"세 분 어르신네의 가르침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의제의 국장을 반드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문제와는 별개의 부탁입니다만,

세 분 어르신네는 이제 앞으로도

항상 저의 곁에 계시면서 저를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약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세분을 지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세 노인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모아 대답한다.

"대왕께서 보시다시피,

우리 세 사람은 이미 90 고개를 바라보고 있는 늙은이들입니다.

여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부귀와 영화에 탐내겠습니까.

대왕께서 일찍이 함양에 입성하시어 진(秦)나라의 학정(虐政)을 깨끗이 제거하신 뒤,

약법삼장(略法三章)으로 백성들을 평화롭게 다스려 나가시는 것을 보옵고

저희들은 <저분이야 말로 천하의 주인이 되실 어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외람되이 간언을 올렸을 뿐이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대왕께서 <도탄속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을 하루속히

구출해 주시옵소서>하는 염원뿐이오며 다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 노인은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어전에서 물러나려고 큰절을 올린다.
한왕은 모처럼 찾아온 <세 분의 귀한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기가 민망스러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세 분 어르신네께 술이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사옵니다."하고

만류하였으나 세 노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저희들은 나이가 많아 술을 이길 힘이 부족하여 금주(禁酒)를 하고 있사오니,
대왕께서는 이 점을 너그러이 양해하여 주시옵소서."

한왕은 자신의 성의를 어떤 식으로라도 표시하고 싶어서

세 노인에게 각각 비단 한 필씩과 쌀 한 섬씩을 선물로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노인들은 그것조차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에게 참다운 선물을 주시려거든 포악 무도한 항우를 하루속히

정벌하시옵고, 도탄 속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을 건져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대왕 전하에게 받고 싶은 선물은 오직 그 하나 뿐이옵니다."

한왕은 어쩔 수 없이 세 노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곧 낙양으로 달려가 한신을 만났다.
한신은 <동공 삼로>의 이야기를 듣고 말한다.

"항우를 정벌할 명분을 구하기 위해서는 대왕께서 손수 ,

의제의 국장을 널리 선포하도록 하시옵소서."

이리하여 한왕은 의제를 장사지내는 격문을 손수 기초하였는데,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늘에는 해가 하나 뿐이듯 땅에는 반드시 군주가 한 분만 계시는 법이다.

일찍이 의제께서 제위(帝位)에 오르시자,

만천하의 왕자(王者)들과 각지의 후백(侯伯)들이 한결같이 의제를

오직 한 분 임금님으로 받들어 옴으로써, 천하는 태평 성대를 이루었다.

그런데 초장(楚將) 항우는 자신의 효용(驍勇)을 믿고 대역 무도(大逆無道)하게도

의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가로챘으니,

이는 하늘도 용서치 않으려니와

신하(臣下)의 도리로써도 있을 수 없는 역적 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본인은 의제의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정중히 국장을 치룬 후에

대역 괴수(大逆魁首) 항우를 박멸함으로써 천륜(天倫)을 바로 잡고자 한다.

이에 나는, 먼저 관중을 평정한 바가 있으며,

이제부터는 파초 대장정에(破楚大長征)의 길에 오르려 하는 바이니,

만천하의 왕후(王侯)들은 이 성업(聖業)에 적극 협력해 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이다.

                                                                                    한왕 유방(漢王劉邦) >

                   이 무렵 초나라의 상태를 살펴 보자.
항우는 팽성으로 도읍을 옮겨간 뒤,

학정의 학정을 거듭하여 민심은 자꾸만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것은 다른 제후들과 왕족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그들은 항우에게서 차츰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항우의 죄상을 성토하는 한왕의 격문이 나온 것도 바로 그 무렵이어서,

그 격문의 파급 효과는 놀랄만큼 대단하였다.

평소부터 항우의 무지막지한 횡포에 불만을 품어 오던 변방 제후(邊方諸侯)들은,

<대역 괴수 항우를 치기 위해 정의의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한왕의 격문을 보고

저마다 앞을 다투어 한왕에게 협력하겠다는 뜻을 자원해 왔다.

그리하여 낙양에서 의제의 국장을 장엄하게 치르고 났을 때에는,

한왕이 좌우할 수 있는 군사가 무려 56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한왕은 용기를 얻어 한신에게 말했다.

"동공 삼로의 말씀대로 의제의 국장을 치루고 나자,

각지 제후들의 협력으로 이렇게나 많은 군사들이 모여졌소.

이제는 군사력으로도 항우에게 두려울 것이 없게 되었으니,

조만간 그를 본격적으로 쳐부수면 어떻겠소 ?"

이렇게 말하는 한왕의 태도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한신이 조용히 아뢴다.

"자고로 병기(兵器)는 흉기(凶器)에 속하옵고,

전쟁은 흥망을 가르는 중대사이옵니다.

그러므로 병력이 많다고 전쟁을 함부로 일으켜서는 아니 되옵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와 시운(時運)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반드시 승산(勝算)이 있를 때에만 일으켜야 하옵니다."

한신의 말은 장량의 말과 흡사했다.

한왕은 그 말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즉석에서 반문한다.

"장군은 어떤 점이 마땅치 않아 초나라로 쳐들어가기를 만류하시오 ?"
한신이 다시 대답한다.

"신이 며칠 동안 천문을 살펴 보온즉,

군사를 지금 일으켜서는 대단히 불길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하니 당분간은 군사들의 훈련을 꾸준히 시키면서

군량미를 충분히 비축해 두었다가,

명년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쳐들어감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한신의 의견은 장량의 견해와 일치되는 점이 너무도 많았다.

장량은 함양을 떠나기 전에 한왕에게 <지금은 천시가 불리하니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심이 좋을 것이옵니다> 하고 분명히 말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왕은 통일 천하를 하루속히 성취하고 싶은 조바심에서

장량의 충고를 무시한 채 기어이 발군(發軍)해, 낙양까지 온 것이었다.

한왕은 애초에 먹은 마음이 한신에게 제지당하자,

한신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장군이 처음에 포증(褒中)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에는

두 달도 되기 전에 빨리 동정(東征)의 길에 오르라고 권고했었소.

그때에는 전쟁에 대한 우리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던 때였소.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크게 다르오.

우리는 이미 관중(關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군사도 막강해지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와서는 오히려 초나라로 쳐들어가기를 만류하고 있으니,

그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이오?"

한왕의 말에는 한신의 반응이 석연치 않게 여기는 기색조차 엿보였다.
한신은 한왕의 미심쩍은 질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하여 의심을 풀어 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품고하였다.

"항왕은 지금 제나라와 양나라를 공략하는 중이온데,

그 전쟁이 수습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연(燕)나라와 조(趙)나라가

항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둘의 세력은 지극히 막강합니다.

 

신이 짐작하옵건데, 항왕은 군사를 양쪽으로 나누어

연나라와 조나라도 동시에 공략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때에는 초나라의 군사가 양분되는 관계로 매우 허약해질 것이옵니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려서 쳐들어가야만 필승을 기할 수가 있사옵니다.

신이 <즉시 발군>을 만류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옵니다."

 한왕은 그제서야 납득이 되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이번만은 자기의 의지대로 싸워 보고 싶어서 한신에게 이렇게 말을한다.

"초나라 군사들이 모두 자국을 떠나,

원정중이므로 정작 초도(楚都)인 팽성은 텅 비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면 팽성을 점령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오.

이번에는 나 자신이 몸소 진두에 나서서 그런 계략을 써 보기로 할 테니,

대원수는 함양을 지키고 있다가,

만약 내가 불리하게 되거든 급히 달려와 도와주기나 하시오."

 한왕은 전에 없이 한신을 배제하는 태도로 나왔다.
장량이 그 광경을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간한다.

 

"대왕께서 직접 진두 지휘를 맡고 나서시는 것은 법도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위험 천만한 일이기도 하옵니다.

그러하니 이번 기회에 팽성을 기어코 공략하시려거든

반드시 한신 장군을 대동하고 나가시도록 하시옵소서."
그러나 한왕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오랫동안 실전을 멀리해 왔소이다.

그래서 이번만은 직접 싸워 보고 싶어서 그러니,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 주시오."

 한왕의 의지가 너무도 확고 부동하므로

장량과 한신은 더 이상 간언을 올리기가 어려웠다.
한신이 한숨을 쉬며 어전을 물러나오니,

모사 여이기 노인이 뒤를 따라 나오며 걱정한다.

"이번 싸움은 대왕께서 직접 지휘를 하시겠다는데,

원수는 그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
한신이 대답한다.

"항우는 천하의 맹장이므로 우리 편 장수들은 누구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오."

"원수는 그런 사정을 잘 알고 계시면서 어째서 대왕을 직접 따라 나서지 않으시오 ?"

"지금은 시운(時運)이 우리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누가 대왕을 모시고 나가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왕께서 실패하셨을 때를 대비하여

함양이라도 확실히 지키고 있을 생각입니다."

 한신은 한왕이 패배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다음 단계의 전략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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