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유방의 대패》

오토산 2020. 5. 25. 11:50

초한지(楚漢誌)97
유방의 대패(大敗)

한편 초나라 왕후(王后) 우미인은 아버지 우자기와 함께 밤도망을 쳐서

닷새 동안이나 고생을 한 끝에, 남편이 있는 제나라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남편 항우에게 울면서 호소한다.

"팽월 장군이 변절하여 팽성을 한왕에게  내주는 바람에

국가의 모든 재물과 군사들을 고스란히 한왕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신첩은 그대로 있었다가는 큰일나겠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밤도망을 쳐왔사오니

폐하께서는 이 원한을 신속히 풀어 주시옵소서."
항우는 우미인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유방이라는 필부가 감히 팽성을 점령하였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내 당장 달려가 유방을 생포하리라."

항우는 용저(龍狙)와 종이매(鍾離昧) 두 장수를 불러,
"나는 팽성으로 가서 유방을 생포해 버릴 것이니, 그대들은 제나라를 계속하여 공격하라."하고 명한 뒤에,

자기 자신은 3만 군사들을 거느리고 밤낮을 잊고 팽성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팽성에서 30리쯤 떨어진 강변에 진을 치고,

팽성이 있는 유방에게 다음과 같은 선전 포고문을 보냈다.

<나 초패왕은 유방에게 이르노니, 그대를 한왕으로 봉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대는 파촉에서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편안하게 지냈으면 그만일텐데,

이제 무슨 욕심에서 관중을 점령하고 여기까지 침범해 왔느냐.

그대가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 돌아가지 아니한다면,

나는 싸움을 크게 벌여 그대의 목을 내 손으로 쳐버리고야 말겠다.

겁이 나거든 당장 물러나거나, 자신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싸우러 나오라.>

유방은 항우의 선전 포고문을 읽어 보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회신을 항우에게 보냈다.
<나는 영토가 탐이 나서 초나라를 점령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의제를 시해한 대역 죄인을 하늘을 대신하여 벌하려 왔을 뿐이다.

하늘의 그물눈이 아무리 성글다 하더라도 죄인을 결코 놓쳐 버리지 않는 법이니,

그대가 스스로 물러가지 않을 진데, 반드시 패망하게 될 것을 각오하라.>

한왕은 회신을 보내고 나서 이미 귀순해 온 장수들을 긴급 소집하여

항우의 공격에 대한 철통 같은 방비책을 세워 명령하였다.

제1진 = 은왕 사마공, 제2진 = 낙양왕 신양, 제3진 = 상산왕 장이, 제4진 = 한왕 자신이 지휘,

제5진 = 총대장 위표가 사마흔,동예,유택 등과 함께 팽성 본진을 사수할 것.

한왕은 팽성으로부터 10리 밖으로 나와 진을 치고,

항우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항우는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좌우에 용봉 일월기(龍鳳日月旗)를 휘날리며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데, 그 위세가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항우가 선두로 달려 나오며 노기 충천한 어조로 한나라 진영을 향하여 고함을 지른다.

"필부 유방은 속히 나와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용서치 않으리로다."

항우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중에 10척 장검을 휘둘러 대는데,

바람을 가르는 칼의 울음 소리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제1진인 사마공이 장검을 휘두르며 마주 달려 나갔다.
항우는 사마공을 보자, 큰소리로 꾸짖는다.

"사마공은 듣거라. 나는 너를 은왕에 봉해 주었거늘,

너는 무슨 억하 심정으로 나를 배반하고 유방의 편이 되었느냐 ?"
사마공이 비웃듯이 대답한다.

"나는 의제를 위해 대역 죄인을 벌하러 나왔을 뿐이다.

대역 죄인의 입에서, 배반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항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마공에게 질풍같이 덤벼들었다.
사마공은 10여 합쯤 싸우다가 항우를 도저히 당해 낼 길이 없어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항우가 맹렬히 추격하는데, 항우가 타고 있는 말은 <오추>라는 천하의 명마인지라,

단박에 사마공을 따라 잡아 한칼에 사마공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러자 제2진인 신양이 달려나가 싸움을 가로 맡았다.
항우는 또다시 신양을 큰소리로 나무란다.

"나는 너를 낙양왕에 봉해 주었거늘,

너는 무슨 이유로 나를 배반하고 유방에게로 돌아섰느냐 ?"
신양은 항우에게 다가서며 대답한다.

"한왕은 그대와 달리, 성품이 관후하시어 한왕을 받드는 사람은 이미 나만이 아니다.

천하의 인심이 이미 한왕에게 집중되었으니, 그대도 투구를 벗어 던지고 속히 항복하라.

곱게 항복하면 초왕으로서의 지위만은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항우는 분통이 터져 올라서 맹수같이 신양에게 덤벼들었다.
신양은 요리조리 항우를 피해 다니며 계속 놀려대었다.

"나는 너를 위해 충고를 했거늘, 너는 아직까지도 네 죄를 깨닫지 못하고 덤벼 오느냐.

그러고서야 언제나 철이 들겠냐 ?

신양이 항우와 20여 합을 겨루며 피해 다니다가 마침내 힘이 부족하여 쫒기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3진 대장, 장이가 달려 나가 싸움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용맹이 워낙 신출 귀몰한지라, 쫒겨 가는 신양의 목을 한칼에 날려 버린다.
장이는 그 광경을 보자 감히 싸울 용기가 없어 말머리를 돌려 제풀에 쫒기기 시작하였다.

"이놈아 !

네가 가면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 "

과연 항우는 천하 무적의 괴장(魁將)이었다.
항우가 장이를 급히 추격하다 보니, 멀리로부터  수많은 정기(旌旗)를 앞세우고

군고(軍鼓)를 요란스럽게 울리며 이쪽을 향하여 행군해 오는 군사들이 있었다.

항우가 추격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한왕 유방이 수많은 장수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백마를 타고 유유히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그 광경을 보자 분노로 전신이 떨려 와, 한왕을 향하여 쏜살 같이 달려나가며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역적 유방은 듣거라. 일찍이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에 불과하던 너를, 한왕으로 봉해준 사람은 내가 아니었더냐.

네가 지난날의 은혜를 저버리고 여기까지 침범해 왔으니,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용기가 있거든 당장 싸워서 결판을 내자. 그만한 용기가 없거든 투구를 벗어 던지고 내게 곱게 항복 하여라."

항우의 언동은 오만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한왕은 의연히 맞서며 항우에게 꾸짖듯이 말한다.

"그대는 필부의 만용을 믿고 큰소리를 그만 치거라.

대역 죄인이 어찌 감히 천병의 위세를 꺾을 수 있단 말이냐 ?"

항우는 더 이상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 한 손에는 방천극(方天戟)을 휘어 잡고,

한 손으로는 용천검(龍泉劒)을 휘두르며 유방을 향해 덤벼오는데,

그 위세는 마치 100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덤벼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이쪽에서는 번쾌,주발,시무,근흠,노관 등의 맹호 같은 대장들이 한왕을 호위하며

동서 사방에서 제각기 덤벼 나오니, 제아무리 귀신 같은 항우도 혼자서는 당해 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항우는 좌충 우돌하며 고군 분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초군 측에서도

항장,계포,환초,우자기 등의 대장들이 휘몰아쳐 나와서, 양군 대장들은 천지가 진동하는 혼전을 벌였다.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기를 무려 30여 합, 마침내 번쾌등이 힘에 부쳐서 쫒기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후진에 있던 위표가 용맹스럽게 달려 나온다.
항우는 위표를 보자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이 괘씸한 반역자야.

네 놈이 무슨 낯짝으로 나에게 덤벼드느냐 !"
그러자 위표가 큰소리로 꾸짖듯이 대꾸한다.

"그대야 말로 은의(恩義)를 배반하고 의제를 시해하고, 한왕을 좌천시키지 않았느냐,

그나 그뿐이랴, 그대는 시황제의 황릉을 파헤쳐서 금은 보화를 가로챘고,

진나라의 죄없는 군사들을 20만이나 생매장해 버리지 않았느냐.

세상 사람들은 그대를 원수로 알고 있거늘, 그대야말로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나타났는냐 ?

한푼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거든 당장 물러가거라 ! "

항우에 대한 위표의 매도는 차마 듣기가 거북할 정도로 신랄하였다.
항우는 위표에게 배반 당한 것만으로도 절통할 판인데, 온갖 악담까지 퍼부어 오므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

그리하여 장창을 휘두르며 덤벼드니 위표도 장창으로 맞서오는 것이었다.
위표도 무술이 넉넉한 장수인지라, 두 사람은 20여합이 넘도록 겨뤘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항우는 장창을 내던지고 길이가 20척이나 되는 무쇠 채찍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덤벼들었고 위표는 무쇠채찍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한나라 군사들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후퇴를 시작하자 항우의 군사들이 한나라 군사들의 덜미를 눌러 와 ,

창으로 찌르고 장검으로 후려갈기니,

한나라 군사들의 시체가 잠깐 사이에 산을 이루었고 그들이 흘린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전투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 되다보니,

한왕은 눈물을 머금고 팽성에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군사들을 잃고 함양을 향해 쫒겨 가고 있노라니까, 유택이 뒤에서 급히 따라오며,
"사마흔과 동예가 항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태공(太公) 내외분을 비롯하여, 

여 왕후(王后)와 두 분 왕자도 모두 항우에게 포로가 되셨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

 "뭐야 !

나의 가족들이 모두 항우에게 붙잡혔다고 ?"
한왕은 기절 초풍할 듯이 놀랐다.

그는 싸우러 나올 때 자기 일가족을 팽성을 지키게 하였던 사마흔에게 맡겼었다.

그런데 사마흔이 항우에게 항복을 하면서 한왕의 일가족을 고스란히 넘겨 주었던 것이었다.
한왕은 땅을 치며 후회한다.

"아아, 장량 선생과  한신 장군이 그토록 만류하더니만,

나는 고집스럽게 팽성으로 왔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그분들을 만날 것이냐 ?"

그러나 후회란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되씹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한왕이 비탄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홀연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초나라 군사들이 동서 사방에서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한왕의 주변에는 그를 호위하는 병사가 불과 2,3백 기였다.

그러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초군의 숫자는 어림잡아, 수천명에 달하지 않는가 ?  

 

졸지에 독 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어 버린 한왕은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우러러 합장하며,
"아아, 하늘이시여 !

이 어리석은 유방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하고 축원을 올렸다.

 한왕이 하늘을 향하여 똑같은 축원을 세 번 올리고 나니, 이 무슨 난데없는 기적일까 ?

지금까지 멀쩡하던 하늘에 별안간 검은 구름이 일더니,

일진 광풍이 무섭게 불기 시작하며 폭우가 억수로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폭풍우와 함께 뇌성 벽력이 천지를 뒤집을 것만 같이 사나우니,

초나라 군사들이 혼비 백산하여 저 멀리 숲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한왕이 폭풍우를 이용하여 철통 같은 포위망을 뚫고 단숨에 20여 리 가량 도망쳐 나오니,

그제서야 날씨가 멀쩡하게 개었다.

(아아,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 )
한왕은 하늘을 향하여 감사를 올리며 다시 앞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개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항우는 군사들을 향하여 외쳤다.
"독 안에 든 쥐를 그냥 놓쳐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추격을 다시 개시하라 ! "
그러자 군사 범증도 옆에서 격려하며 말한다.

"한왕이 도망을 가도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회에 그를 기필코 생포하여 후환을 깨끗이 없애야 한다.

상금을 후하게 줄 테니, 누구든지 한왕을 반드시 생포해 오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대장 정공(丁公)과 옹치(雍齒)가 다시 3천 병력을 거느리고 한왕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한왕은 그런 줄도 모르고 열심히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얼마를 가다 보니, 초장 정공이 어느 새 뒤를 바짝 쫒아오는 것이 아닌가 ?

이제는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었다.
한왕은 도망가기를 체념하고 뒤로 돌아서서 정공을 마주 보며 이런 말을 해보았다.

"장군은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옛날부터 <어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반드시 도와 준다>고 하였소.

장군이 만약 나를 도망가게 내버려두어 주기만 하면, 나는 후일에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 것이오.

그러나 장군이 포악 무도한 항우를 돕기 위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장군 손에 곱게 죽을 것이오."

 한왕으로서는 궁여의 일책이었다.

죽음을 피할 길이 없을 때에는 오줌이 약이 되기도 하거니와, 되는 대로 해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공은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별안간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띠어 보이며,
"천하의 영웅인 한왕을 구태여 내 손으로 생포할 생각은 없소이다

. 눈을 감아 줄 테니 빨리 도망을 가시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

 한왕이 크게 안도하며 말을 급히 달려 다시 도망가기 시작하니,

정공은 천천히 뒤를 쫒아오며 허공을 향해, 연실 화살을 쏘아 갈기고 있었다.

 

잠시 후에 옹치 장군이 달려와서,
"한왕이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장군은 보셨지요 ?"하고 묻자

정공이 대답한다.

'한왕을 쫒아가며 화살을 연방 쏘아댔지만,

그 자가 어찌나 빨리 달아나는지 결국은 놓쳐 버리고 말았소이다."
그러자 옹치가 화를 내며 말한다.

"에이, 여보시오.

한왕을 발견했다가 놓쳐 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오 ?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니 함께 추격합시다."


 한왕은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적은 또다시 맹렬하게 추격을 해오고 있었다.
추격을 해 오는 적의 대장은 정공이 아니고 이번에는 옹치 장군이었다.

한왕은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닫자, 말을 내버리고 길가에 있는 우물 속으로 숨어 버렸다.
적병들은 그런 줄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한왕은 우물 속에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제는 바람이 차고 배가 고파서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딘가에 숨을 곳을 찾아야만  하겠기에 캄캄한 산속을 천방 지축으로 얼마를 가다 보니,

저멀리 산 밑에 등잔불을 켜 놓은 오막살이가 한 채 보였다.

 

"주인장 계십니까?"
한왕이 덮어놓고 그 집 앞으로 다가가 주인을 부르니,

"뉘시오 ?"하고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80 노인이었다.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찾아 왔사옵니다.하고 

한왕이 공손히 말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밖으로 나오며,
"어서 들어오시지요.

길이 몹시 저무셨군요."하며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왕이 입고 있는 황금 전포(黃金戰袍)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라며,
"손님은 어디서 오시는 왕공(王公)이시옵기에, 이렇듯 길이 저무셨습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한왕은 노인의 태도와 언동이 믿을만 하다고 여겨서,
"사실인즉, 나는 한왕 유방올시다.

팽성에서 항우에게 대패하여 여기까지 피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고 사실대로 솔직히 말해 주었다.

노인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더니,

방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인덕이 높으신 대왕의 용안을 이렇게 지척에서 뵈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일승 일패(一勝一敗)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하옵는데,

귀하신 몸으로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고초가 얼마나 많으셨사옵니까 ?"

그리고 부엌으로 내려가 저녁상을 정성껏 차려 오는 것이었다.
한왕은 저녁밥을 먹으며 주인에게 물었다.

"노인장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
노인이 대답한다.

"저는 척씨(戚氏) 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마을에는 60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사온데,

모두가 척씨인 관계로,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척가장(戚家庄)이라 부르옵니다."

"혼자 사시는 것을 보니 아드님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아들은 없사옵고, 올해 열여덟 살 된 딸이 하나 있을 뿐이옵니다.

지금 뒷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곧 불러 내어 대왕전에 인사를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주인 노인이 무남 독녀를 불러 내어 한왕에게 인사를 시키는데,

그 얼굴과 몸매가 천하 일색이었다.

"허어 ...

노인장의 따님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구려."

한왕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이 튀어나왔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문득 얼굴을 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산중에 허부(許負)라는 명관상가(名觀相家)가 있사온데, 그분의 말에 의하면,

이 아이는 장차 크게 될 아이라고 하옵니다.

천만 다행으로 대왕께서 오늘 소생의 집에 오셨사온데,

이 일은 결코 우연한 인연이 아니옵니다.

대왕께서는 하늘이 정해 주신 인연으로 아시옵고, 오늘 밤 이 아이를 친히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왕은 워낙 색을 좋아하는 고로,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흐뭇하였다.
그러나 한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지금 싸움에 패하고 도망을 가는 길이오.

그런 내가 어찌 젊은 여인의 장래를 약속할 수 있으리오."

"하늘이 정해 주신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는 끊지 못하는 법이옵니다.

그러하니 이 아이는 오늘 밤 대왕에게 맡기겠사옵니다."

주인 노인이 어린 딸을 억지로 떠맡기는 바람에 한왕은 마지못하는 척하고

그날 밤 주인집 처녀와 깊은 인연을 맺고 말았다

. (이 여인은 후일에 한고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많은 설화를 남긴 <척부인>이다.)

다음날 한왕은 새벽같이 일어나 길을 떠나려고 하니,

주인 노인이 한왕의 손을 붙잡으며 말한다.

"제가 나이가 많아 대왕을 다시는 뵈옵기 어려울 것 같으니 며칠만 더 묵어 가시옵소서."
한왕이 대답한다.

"내가 싸움에 대패하는 바람에 모든 장수들과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못 됩니다.

뒷수습이 끝나는 대로 사람을 보내 , 어르신과 따님을 모셔가겠소이다."

 노인은 한왕의 사정을 알게 되자 굳이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왕이 척희(戚姬)부녀와 작별하고 얼마를 가다 보니,

한떼의 군사들이 급히 쫒아오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하후영>이었다.
한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아니, 장군은 팽성에서 전사한 줄 알았는데,

여긴 어쩐 일이오 ?"

"그러잖아도 팽성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간신히 탈출하여 낙오된 군사를 수습해서

대왕의 아드님 두 분까지 구출해 가지고 왔사오니 기뻐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후영은 마상에서 왕자 형제를 내려 놓는다.
한왕은 어린 아들 형제를 부등켜안고 목을 놓아 울었다.

"너희들 형제가 살아 돌아와서 기쁘다마는,

너희들의 조부모님과 어머니는 어찌 되었느냐 ?"

 

이렇듯 탄식을 하는 한왕의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여 일행은 다같이 소리 없이 울었다.
한왕이 하후영과 함께 얼마를 가다 보니,

저 멀리 전방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이쪽을 향하여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것은 또 어떤 군사들이냐 ?"
하후영이 유심히 살펴보니,

그들이 휘날리는 깃발은 모두 붉은 깃발로써,

선두의 깃발에는 <파초 대원수 한신>이라는 대장기가 아니던가 ?
하후영이 한왕에게 고한다.

"대왕 전하 !

한신 장군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가 봅니다."

 한왕이 크게 기뻐하며 마주 달려 가니,

장량과 진평이 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아뢴다.

"대왕 전하께서 행방 불명이 되셨다기에 전하를 찾기 위해서 달려 나오는 길이옵니다."
한왕은 장량을 만나자 눈물을 비오듯 쏟았다.

 "오오, 군사께서 나를 찾기 위해 몸소 여기까지 나와 주셨구려.

한신 장군은 어디 계시오 ?"
그러자 장량이 대답한다.

"함양을 지키는 일도 중요한 일이옵기에,

한신 장군은 함양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고, 신과 진평 만이 나왔사옵니다."

"그렇다면 한신 장군의 대장기는 어찌된 일이오 ?"

"초나라 군사들은 한신 장군의 깃발만 보아도 겁을 내기에,

임기 웅변으로 한신 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왔사옵니다."

장량이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기발한 묘안이었다.
한왕은 장량의 지략에 새삼 감탄하면서 말한다.

"내가 이 꼴이 된 것은 선생의 만류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오.

나의 어리석음을 너그럽게 용서하시오."

"황공하옵게도 무슨 말씀을 하시옵니까.

최후에는 반드시 우리가 승리할 것이오니, 일시적인 실패를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한왕이 다시 말한다.

"내가 위표같은 못난 위인을 총대장으로 발탁한 죄로 이렇게 된 것이라오."
장량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이미 지나간 일은 두 번 다시 거론하지 마시옵소서.

신에게 깊은 계략이 있사오니, 머지않아 오늘의 원한을 깨끗이 갚아 줄 날이 있을 것이옵니다."

일행이 길을 재촉하여 영양성(榮陽城)으로 찾아가니,

성주 한일휴(韓日休)가 성문을 활짝 열어 한왕과 장량을 반갑게 영접한다.
이렇게 한왕을 비롯한 일행들이 피곤한 몸을 영양성에서 며칠을 쉬고 있노라니까,

그 사이에 번쾌와 주발, 그리고 왕릉을 비롯하여 위표까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다.

한왕은 이로써 옛날의 진용을 다시 갖춰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한왕은 위표의 총대장 직위를 박탈하고 고향으로 그를 쫒아 보내고야  말았다.

                                  
계속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