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열전 (漢高祖 列傳) (125)
황제로의 등극
유방은 초나라까지 평정하고 나자 곧 군사를 철수시켜, 하남(河南)에서 통일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산동 지방에 노(魯)나라가 하나 남아 있었지만,
노나라 따위는 워낙 조그만 나라였기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장량이 나서며 말한다.
"노나라가 비록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이오나,
그 나라를 그냥 내버려두고 떠났다가는 후일에 다시 전쟁을 겪게 되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노나라도 우리 손에 넣어서 후환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유방은 매우 의아스러워하면서 반문한다.
"노나라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소국인데,
선생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시오 ?"
장량이 다시 대답한다.
"노나라는 보잘것없는 소국임에는 틀림 없는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노나라는 공자(孔子)가 태어나신 나라인 관계로, 예의(禮義)가 대단히 바른 나라입니다.
지난날 회왕(懷王)께서는 일시나마 항우를 노공(魯公)으로 봉했던 일이 있는 까닭에,
노나라 백성들은 지금도 항우를 깍듯이 주공으로 모셔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들이 만약 항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오(東吳)의 호걸들과 결탁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온다면,
그 세력을 막아내기는 결코 항우에 못지 않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선생께서 그런 말씀을 깨우쳐 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커다란 과오를 범할 뻔했습니다.
그러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노나라까지 평정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군사를 몰고 노나라로 가 보니 아니나다를까,
장량의 말대로 노나라에서는 성루마다 조기(弔旗)를 높이 올려 걸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항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한왕은 성을 포위하고 나서 여러차례 공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노나라 백성들은 끄떡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루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항우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만 계속적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유방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철포(鐵砲)와 화전(火箭)으로 노성(魯城)을 단숨에 괴멸시켜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량이 유방의 손을 붙잡고 말리며 간한다.
"노나라는 주왕(周王)의 후예로서, 공자의 덕화로 예의가 무척 바른 나라인 까닭에,
세상 사람들은 노나라를 무척 존경합니다.
그런 나라를 어찌 단순한 무력으로 다스릴 수가 있을 것이옵니까 ?"
"그러면 그들을 무엇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이오 ?"
"무력으로 굴복시켜서는 결코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을 것이오니
, 오직 예의와 의리로써 설복하는 길이 있을 뿐이옵니다."
"예의와 의리로 설복해야 한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좋을지 선생께서 가르쳐 주소서."
유방은 장량에게 간곡한 어조로 부탁을 한다.
장량은 심사 묵고하다가 대답한다.
"노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면, 항우의 수급을
성문 앞에 높이 걸어 놓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노나라 백성들은 지금도 항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중인데, 그의 수급을 보여주게 되면,
마음이 돌아서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를 철천지 원수로 여길게 아니오 ?"
"물론 그런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모여든 저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어떻게 설득한다는 말씀이오 ?"
"항우의 머리를 높이 걸어 놓으면 백성들이 저마다 달려와 항우의 죽음을 애통해할 것입니다.
특히 항우의 위세를 잘 알고 있는 노부(老夫)들은 더할 나위 없이 항우의 죽음에 의문을 갖게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의제 회왕(義帝懷王)을 시해한 장본인이 항우라는 것을 알리고 백성들을 잔학하게 학대한 일까지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 한왕이 하늘을 대신하여 항우를 벌했노라 말하게 되면,
노나라 백성들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을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그렇게만 되면 대성공이옵니다."
유방은 장량의 계교를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과연 선생의 계교는 신출 귀몰하십니다.
그러면 항우의 수급을 내걸고, 우리 사람들을 내세워 노나라 백성들을 설득해 보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성문앞에 높다란 장대를 세워 놓고, 그 위에 항우의 수급을 내걸었더니,
과연 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어 항우의 수급을 올려다보며 저마다 애통해 하였다.
특히 촌부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서 항우의 수급에 읍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촌부(村夫)로 가장한 한나라 세객(說客)들이
삼삼 오오 모여들어 울고있는 노부들을 비웃듯이 나무랐다.
"항우는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노인장들은 무엇때문에 항우의 죽음을 이토록 애통해 하시오 ?"
그러자 노부들은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말한다.
"여보시오.
당신은 누구이길래 <항우를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오 ?"
"항우가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이유를 설명할 테니 잘 들어보시오.
항우는 자기가 제왕이 되기 위해 초회왕을 죽인 놈이오.
게다가 항우는 점령지 백성은 물론이고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무고한 백성들도 수없이 죽여 버렸소.
그 때문에 한왕이 하늘을 대신하여 항우를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아셔야하오.
당신네들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항우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아니겠소 ? "
노나라 노부들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따져 묻는다.
"떠도는 소문처럼 ,
항우가 정말로 의제를 죽였단 말이오 ?"
세객이 다시 대답한다.
"항우가 의제를 시해하고 자기가 회왕을 대신하여 제위(帝位)에 오른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인데,
당신네들은 그런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
노나라 노부들은 그 말을 듣고 저희들끼리 얼굴을 마주보며,
"원, 이럴 수가 !
의제를 시해하고 자기가 제위에 오른 것이라면, 항우야말로 역적이 아닌가 ?"
하고 수군거린다.
세객은 그 기회를 이용해 다시 말을 건넨다.
"그렇소. 항우야말로 천하의 역적이었소.
한왕이 항우를 죽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오.
그러니 당신네 들도 하늘의 뜻에 따라, 한왕을 반갑게 맞아들어야 옳을 것이오."
노나라 노부들은 그제서야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겠소이다.
항우가 그런 역적이었다면, 우리도 조기(弔旗)를 걷어치우고 한왕을 기쁘게 영접하겠소이다."하고
성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기를 모조리 철거하고 유방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유방이 성안으로 들어오자
국고(國庫)에 쌓여 있는 곡식을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로써 천하를 완전히 평정하자, 한신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유방의 앞으로 나와 하례를 올린다.
유방은 하례를 모두 받고 나서 모든 장수들에게 말한다.
"전쟁이 끝났으니, 모든 장수들은 일단 낙양성으로 돌아가기로 합시다.
각자에 대한 논공 행상은 낙양에 돌아가서 하기로 하겠소."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보니, 유방은 한신이라는 존재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지금 상태로 유방 자신이 제수한 대로 한신이 제(齊)나라로 돌아가 버리게 되면,
제나라는 70여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이전의 육국에서 가장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관계로
이런 나라를 한신이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힘을 믿고 좀처럼 자기 말을 들어 줄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생각다 못해 한신을 단독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이미 끝났으니, 이제는 <원수의 직책>은 해임해야 하겠소.
그리고 장군은 항우를 정벌하는데 각별히 공로가 많았으므로 장군을 특별히 초왕(楚王)에 봉하기로 하겠소."
유방의 입장에서는 한신을 제왕으로 눌러 있게 하는 것보다는
초나라로 보내는 것이 훨씬 위험율이 적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제왕의 자리보다 초왕의 자리는 너무도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한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대왕께서는 일찍이 신을 제왕으로 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연유로 초왕으로 바꿔 주시옵니까 ?
바라옵건대, 신을 제왕의 자리에 그냥 눌러있게 해 주시옵소서."
한신이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은 제나라의 풍부한 물산(物産)과 뛰어난 경치, 넓은 봉토 등을 생각하면,
초나라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한신을 타이르듯이 말한다.
"장군은 무엇인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구려.
지난 날 장군을 제왕에 봉한 것은, 제나라 사람들이 우리가 점령한 뒤에
말을 잘 들어먹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장군으로 하여금 제나라를 진압하게 했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오. 만천하가 평정이 되었으니,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마찬가지요. 장군은 본시 회음(淮陰) 태생이 아니오 ?
게다가 초나라를 평정한 공로자도 장군이기 때문에, 장군을 초왕으로 봉해
금의 환향(錦衣還鄕)을 하게 하려는 것이니, 다른 생각은 말고 꼭 초왕으로 부임해 주시오."
한신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그날로 초왕에 부임하였다.
초나라는 한신의 고국이었다.
그 옛날 회하(淮下)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표모에게 찬밥을 얻어먹은 일과,
거리의 깡패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일을 생각하며 거리를 돌아보고 있노라니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축하를 올리는데, 그 중에는 한신에게 찬밥을 주었던 표모도 나와 있었다.
한신은 표모에게 황금 천 냥을 주면서,
"그 옛날 내가 아주머니에게 찬밥을 얻어 먹으며
<내가 만일 성공하거든 오늘의 은혜를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한 일이 있었소.
그러자 아주머니는 노발 대발하면서 <입에 풀칠도 못하고 거지처럼 떠돌아다니는 주제에
무슨 신세를 갚겠다고 큰소리를 치느냐> 하며 나를 몹시 꾸짖으셨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나에게서 이렇게 상금을 받게 되니 심정이 어떠하시오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표모는 얼굴을 붉히며, 상금으로 받아 든 황금 천 냥을 움켜쥐더니,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대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한신은 그 옛날 자신을 괴롭혔던 깡패들을 일일이 불러 중위(中尉)의 벼슬을 내려 주니,
그들은 얼굴을 붉히며,
"저희들이 무슨 면목으로 이런 벼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저마다 벼슬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그들을 달래며 말한다,
"내가 오늘날 이런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그대들의 덕택이었네,
내가 당시에 그대들에게 참을성을 배우지 못했다면 내가 어떻게 성공을 했겠는가 ?
아무 걱정 말고 나의 성의를 순순히 받아 주게."
한신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옛날의 깡패들은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한신의 말에 쫒았다.
해가 바뀌고 나니 대한 6년 정월.
초왕 한신과 조왕(趙王) 장이를 비롯한 모든 왕후(王侯)들이 낙양으로 신년 하례를 와서 한왕에게 아뢴다.
"이제는 천하 통일의 태평성대가 되었으니
대왕께서는 속히 제위(帝位)에 오르도록 하시옵소서."
유방이 대답한다.
"내가 알기로는 현자(賢者)가 아닌 사람은 제위에 오를 수가 없다고 들었소.
나는 본시 미재 박덕(微才薄德)한 사람인데, 나같은 사람이 어찌 제위에 오를 수 있으리오."
유방은 겸허한 대답으로 제위에 오르기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유방의 겸허한 대답을 들은 중신들은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품한다.
"대왕께서는 정의의 군사를 일으키시어,
앞에서는 폭진(暴秦)을 멸망시켰고, 이번에는 초적(楚賊)까지 정벌하셨습니다.
이처럼 천하를 통일하신 후, 모든 공신들을 왕후로 봉해 주셨는데,
이제 대왕께서 제위에 오르지 않으시면, 누가 천하를 공평 무사하게 다스려 나갈 것이옵니까 ?
천하의 질서와 규율을 위해서라도, 대왕께서는 마땅히 제위에 오르셔야 하옵니다."
그래도 유방은 여러차례 사양하다가,
"내가 제위에 오르는 것이 국태 민안(國太民安)을 위하여 이로운 일이라면,
경들의 말씀대로 제위에 오르기로 하겠소."하고 마침내 제위에 오를 것을 수락하였다.
*글 중간에 붙여.
이 글은 중국 진시황 이전의 6국 때인, 영웅 활거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그 제목을 열국지(熱國誌)로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유방과 항우가 본격적인 각축을 벌이는 시기부터, 초한지(楚漢誌)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이제는 항우도 죽고 유방에 의해 천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천하 통일 이후의 다양한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른
유방의 안정을 추구하는 노력과 함께, 그것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이 다양하게 그려집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한고조 열전(漢高祖 列傳)"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
그해 2월, 길일을 택하여 유방이 낙양성에서 제위에 올랐는데,
그는 즉위식(卽位式)이 거행되는 대례석상(大禮席上)에서 만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은 본시 패현(沛縣)의 일개 서민(庶民)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주왕(周王)이래로 뚜렸한 대통(大統)을 이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황(秦皇)은 대통을 무시하고 육국을 병탄(倂呑)하여 세상을 몹시 어지럽게 해왔었다.
이에 짐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진을 멸하고 초를 정벌함으로써 천하를 새롭게 평정해 놓았다.
그리하여 군신들이 짐에게 제위에 오르기를 권하기에 짐은 만백성을 위해 황제가 되기를 수락함과 동시에,
형처(荊妻) 여씨(呂氏)를 황후(皇后)라 칭하고, 장자(長子) 유영(劉盈)을 황태자(皇太子)로 봉하는 바이다.
이제부터는 진초 시대(秦楚時代)와 같은 학정은 일체 없을 것이니,
만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해 주기를 바란다.
즉위식이 끝난 후에 남궁(南宮)에서 축하연을 성대하게 벌였는데,
황제 유방은 그 자리에서 만조 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내렸다.
"짐은 만좌의 백관들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소.
경들은 무슨 일이나 불평이 있거든 마음속에 숨겨 두지 말고 언제든지 짐에게 말해 주시오.
짐은 본시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에 지나지 않았건만, 이제 천하를 얻게 된 것은 오로지 경들의 덕택이었소.
초패왕 항우는 역발산 기개세의 만고의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천하를 잃고 말았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경들의 솔직한 의견을 들어보고 싶소이다."
대장 고기와 왕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폐하께서 기탄없는 평을 듣고자 하오시면,
저희들이 한 말씀 여쭙고 싶사옵니다."
"오오, 어서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경들의 솔직한 평을 듣는 것은, 후일 짐을 위해서는 유익한 말씀이 될 것이오."
고기와 왕릉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매우 황공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는 성품이 항우보다도 도도하셔서,
사람을 깔보는 경향이 농후하시옵니다.
그러심에도 불구하고 싸움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는 그때 그때 중상(重賞)을 내려 주심으로써
공을 더욱 빛나게 하여 주셨으므로 그 점이 바로 폐하께서 천하를 얻게 되신 원인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한편, 항우는 인심(人心)이 좋아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는 옷을 벗어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밥을 주면서도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논공 행상을 베풀어 줄 줄을 몰랐으니,
항우의 인(仁)이란 것은 결국 아녀자의 인(婦女子之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근본 원인은 바로 그 점에 있지 않았는가 싶사옵니다."
유방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한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그려.
내가 천하를 얻은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세 분의 덕택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하네.
장중에 앉아서 천리 밖의 승리를 내다볼 수있는 점에 있어서는 장량 선생을 따를 수가 없고,
백성을 잘 다스리고 군량을 풍족하게 공급해 준 점에서는 소하 승상을 능가할 수가 없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승리를 쟁취함에 있어서는 한신 장군을 따를 수가 없으니,
이상과 같은 세 인걸(人傑)께서 나를 도와 주셨으므로 내가 천하를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일세.
항우에게도 범증이라는 뛰어난 모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항우는 그 사람조차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으니,
그러고서야 어찌 천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한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탄복하였다.
"과연 폐하의 말씀은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항우처럼 사람을 믿지 못해서야 어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가 있을 것이옵니까 ?"
유방은 웃으면서 한신에게 묻는다.
"짐은 한신 장군은 백만 대군을 능히 거느릴 수가 있다고 보는데,
장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한신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신의 경우는 백만대군 뿐이 아니옵고
다다 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음 ! 다다 익선이라 ?
그러면 나의 경우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
"매우 죄송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 능히 거느리실 수 있는 군사의 한도는 10만인 줄로 아뢰옵니다."
너무도 무엄한 한신의 대답에 좌중은 아연 긴장하었다.
한신 자신이 능히 거느릴 수 있는 군사는 백만도 모자란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
제왕인 유방은 10만 군사밖에 거느릴 능력이 없다고 공언했으니
그야말로 제왕을 모독한 언사가 아니고 무엇인란 말인가 ?
제왕에 대한 불경(不敬)은 참형에 해당하는 죄악임을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아니나다를까, 유방의 얼굴에는 불쾌한 빛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좌중은 아연 긴장하여 모두가 유방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한신 장군이 별안간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이 기쁜 날에 왜 이런 실언을 했을까 ?)
유방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일순간 눈을 감은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까지 띄면서, 한신에게 조용히 물었다.
"한신 장군은 군사를 얼마든지 거느릴 수가 있어도,
나는 겨우 10만밖에 거느릴 능력이 없다면, 어찌하여 장군은 나의 신하가 되었소 ?"
한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신은 <병사들의 장수(兵之將)>가 될 소질은 충분하오나 <장수들의 장수 (將之將)>의 재목은 되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폐하께옵서는 <병지장>은 못 되셔도 <장지장>이 되실 수있는 재질이 충분하오시니,
신이 어찌 폐하의 신하가 되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 "
한제는 그 대답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하하하,
장군은 싸움만 잘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제 알고 보니 구변(口辯)도 대단하시구려.
자신은 <병지장>으로 자처하면서 나를 <장지장>으로 치켜 올린 것은 명담중의 명담이시오."
이 바람에 극도의 긴장으로 치닫던 분위기가 별안간 화기 애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방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기는 하였지만,
마음 속으로는 한신에 대한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한신이야말로 언제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 무서운 존재로구나.
앞으로는 한신에게 대해서만은 배반을 못하도록 각별히 견제 해 나가야 하겠다....)
그때부터 유방은 한신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날 논공 행상이 있게 되자 한신이 유방에게 아뢴다.
"일찍이 광무 대전에서 전사한 신기(辛奇) 장군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공로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도 논공 행상을 내리심이 좋겠습니다."
유방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한다.
"물론 그래야 할 것이오.
그러면 신기 장군의 경우는 연고지에 사당을 세우고 사시로 제사를 지내게 함과 동시에,
<건충후(建忠侯)>의 칭호를 추증(追贈)하고 자손들에게도 관록을 내리도록 하겠소."
그밖에도 유방은 장량의 의견을 들어 모든 장수에게 골고루 논공 행상을 베푸니,
천하 통일에 힘쓴 장수들은 물론이려니와 백성들 조차 유방을 성제(聖帝)로 우러러 받들게 되었다.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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