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열전 (漢高祖 列傳) 《종이매의 운명 》

한고조 열전 (漢高祖 列傳) (127) 종이매의 운명

유방이 계포를 설득한 것은 사후 수습으로는 커다란 성공이었다.
그러나 종이매의 문제만은 시간이 흘러가도 해결의 실마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방은 그로 인해 걱정을 하다가, 어느 날은 중신들에게 이런 엄명을 내렸다.

"초장 종이매는 지모에 있어서는 범증에 손색없는 모사요,

용맹에 있어서는 항우에 못지 않은 장수요.

그런 그가 지금은 어디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 지도 모르니,

경들은 종이매의 소재를 하루속히 탐색해 내도록 하시오.

그자를 체포해야만 내가 마음을 놓을 수가 있겠소."

황명에 따라 나라에서는 전국 방방 곡곡에 계포와 마찬가지로, 종이매를 찾는 방문을 써 붙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낡은 옷에 벙거지를 쓴 늙은이 하나가 성 안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다음과 같은 말을 외쳐대고 있었다.

 

"종이매라는 자가 혼자의 힘으로 무슨 큰일을 도모할 수가 있을 것인가 ?

나에게 한제를 만나게 해 다오. 그러면 내가 중대한 진언을 할 것이다."
중신들이 그런 소문을 듣고 거리로 달려나와 문제의 노인을 만났다.

 

"도대체 노인장은 누구시길래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함부로 하고 다니시오 ?"
문제의 노인이 대답한다.

"나는 제나라 사람인데, 성은<누>요, 이름은 경(敬)이라고 하오.

나에게 한제를 만나게 해 주면,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좋은 충고를 올리겠는데,

누구도 한제를 내게 소개하는 사람이 없구려. 나로서는 정말 애석한 일이오."

 

"노인장은 행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데,

그런 몰골로 어떻게 황제 폐하를 만나겠다는 것이오 ?"
누경은 그 말을 듣고 앙천 대소를 한다.

 

"하하하,

이 옷은 내가 언제나 입고 다니는 옷이오.

이 옷이 뭐가 부족해서 제왕을 못 만다는 것이오 ?
제왕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두려워 할 것은 없지 않소 ?"

행색에 비해 떠들어 대는 폼이 결코 범상치 않아 보이므로,

중신들은 의논끝에 어느 날 ,누경 노인을 유방에게 소개하였다.
유방이 누경에게 물었다.

 

"노인께서 나에게 중대사를 충고하고 싶다고 말했다는데,

무슨 애기를 하려는 것이오 ?"
누경 노인이 대답한다.

 

"그 옛날 항우는 범증의 충고를 듣지 아니하고 도읍을 관중에서 팽성으로 옮겨 갔다가 나라가 망했습니다.

오늘날 폐하는 낙양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계시오나, 낙양성은 팽성과 마찬가지로 도읍지가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자손 만대에 이르기까지 한나라의 번영을 도모하시려거든,

도읍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하시옵소

서."

누경 노인은 항우가 망한 이유까지 들먹이면서

도읍을 낙양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라고 역설하는 것이 아닌가 ?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누경 노인이 느닺없이 천도 문제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유방은 적이 놀랐다.

 

"낙양성은 중원(中原)의 한복판이오.

그런 낙양이 어째서 도읍지로서 적당하지 않다는 말씀이오 ?"

그러자 누경은,
"허어 ....

폐하께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 !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나더니 정색을 하며 다시 말한다.

"폐하는 일개 평민으로서 풍패(豊沛)에서 궐기하여 진나라를 평정하고

항우를 토벌하여 이제 천하를 장악하게 되셨습니다.

지금은 세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폐하에게 맛서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폐하가 돌아가신 뒤에 세력이 조금이라도 약화 되면,

수많은 적수(敵手)들이 나타나 나라를 시끄럽게 할 것이니,

도읍이 중원 한복판인 낙양에 있어가지고서야 그들의 반란을 어떻게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이옵니까 ?

그러하니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서는 천혜의 지형과 수성(守城)이 용이한 곳으로 도읍을 옮기셔야 하옵니다."

 

누경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면 도읍을 어디로 옮기는 것이 좋겠소 ?"

 

"도읍을 함양(咸陽)으로 옮기면 가장 좋겠습니다.

함양은 지형 자체가 옥야 천리(沃野千里)인데다가,

삼면이 무관(武關), 산관 (散關), 함곡관(函谷關)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적들의 침공을 불허하는 난공 불락의 요새(要塞)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유방은 그 말에도 수긍이 되는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생각도 없지 않아서,
"진시황은 함양을 도읍으로 삼았지만, 삼대를 못가서 망해 버리지 않았소 ?"하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누경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외적 때문이 아니고, 내치(內治)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세 황제 호해(胡亥)는 술과 계집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내정(內政)을 간신 조고(趙高)에게 맡겨 버렸으니,

그러고서야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을 것이옵니까 ?

그러나 폐하가 걱정하셔야 할 일은 내치가 아니라 외침입니다.

외침을 미연에 막으려면  황제께서 기거하시는 도읍은 반드시 함양이어야 합니다."

 

"좋은 충고를 들려 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중신들과 신중히 논의해 보겠소이다."

 

그리고 유방은 고맙다는 뜻에서 누경 노인에게

특별히 <유씨(劉氏)>라는 사성(賜姓)까지 내려 주었다.
누경 노인이 돌아가자, 유방은 곧 중신회의를 열어 천도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자 중신들은 모두들 천도를 반대하고 나오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낙양은 중원의 한복판인데다가,

동쪽에는 성고관이 있고, 서쪽에는 살승관이 있어서 난공 불락의 요새 입니다."

중신들은 거의 전부가 낙양 출신인 까닭에, 함양 같은 변방으로는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유방은 천도 문제로 일대 혼미에 빠져 버렸다.

처음부터 누경 노인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그의 말을 듣게된 이상,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천도를 해야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생각다 못해 하루는 장량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장량이 대답한다.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서는 누경 노인의 말

씀대로 함양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낙양에 비해, 함양은 진나라 시절의 궁궐이 그대로 있어,

새로 궁궐을 축조할 필요도 없이 손만 보아서 쓸 수도 있으려니와

외침에 방어할 수 있는 준비가 낙양보다는 훨씬 유리하옵니다."

 

유방은 장량의 말에 용기를 얻어 마침내 도읍을 함양으로 옮기고

지명(地名)을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으로 바꾸고야 말았다.

*주 
여기서 장안과 함양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의 역사의 변천사는 비교적 알고 있으나 중국의 도시의 변천사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조사를 하여 본 결과, 함양(센양)과 장안(시안)은

거리상으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근접한 기원전 고대 중국의 도시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지역 표기중에 함양과 장안이 뒤섞여 쓰여지더라도

사실을 기초로한 픽션의 전개로 보아주시면 되겠습니다.
                   ...

이로서 천도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종이매에 관한 문제였다.
어느 날 유방은 계포를 불러 종이매의 행방을 넌즈시 물어 보았다.

 

"종이매는 귀공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귀공은 종이매의 행방을 모르시오 ?"
계포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이렇게 대답한다.

 

"초나라가 몰락할 때, 종이매 장군과 저는 함께 도망을 치다가 헤어졌사온데,

그는 한신 장군과 친분이 두터운 관계로 그에게 가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한신 장군한테 숨어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한제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뭐요 ?

종이매가 한신 장군한테 숨어있을 것이라고요 ?"

 

계포의 말을 듣고 유방이 놀란 것은 그러잖아도 자신이 경계하고 있는 한신이

종이매와 결탁하여 엉뚱한 일을 도모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걱정을 하다못해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한신 장군이 만약 오늘날까지 종이매를 숨겨 두고 있다면 그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

종이매를 신속히 붙잡아서 처치해 버리고 싶은데,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
진평이 심사 숙고하다가 대답한다.

 

"이런 문제는 너무 서둘러서 해결하려 해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시일을 너무 오래 끌어도 좋지 않사옵니다.

섣불리 서두르면 종이매가 어디론가 도망을 가 버릴 것이고,

시일을 오래 끌다가는 호랑이 새끼를 키워 주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가 되기 때문이옵니다."

 

"그 점에는 나도 동감이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기발한 대책을 강구해 보아 주시오."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우선 폐하의 심복 지인을 한신에게 보내어 종이매가 그곳에 있는지 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 종이매가 그곳에 숨어 있다면, 한신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면,

한신 자신은 자기 손으로 종이매를 죽여 버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하면서

진평은 종이매를 제거할 수 있는 밀담을 유방에게 들려주었다.

 

유방은 진평의 밀담을 듣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대부의 계략은 참으로 기막힌 묘안이오.

그러면 한신에게는 누구를 보내 알아보는 것이 좋겠소 ?"

 

"구변이 능하기로는 수하(隨何)를 따를 사람이 없사옵니다.

수하를 보내는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유방은 곧 수하를 불러 진평의 계략을 자세히 알려 주고 나서,
"그대는 침주에 있는 의제의 능(陵)을 보수하러 왔노라고 하면서,

한신을 찾아가 보도록 하시오.

만약 종이매가 그곳에 숨어 있거든, 한신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시오.

그러면 한신은 꼼짝 없이 종이매를 죽여 버리게 될 것이오."하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수하가 초왕(楚王) 한신을 찾아가니,

한신은 깜짝 놀라며 묻는다.

 

"대부가 별안간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왕림을 하셨소이까 ?"
수하가 대답한다.

 

"침주에 있는 의제의 능을 보수하러 가는 길에 문안을 여쭈려고 들렀습니다."

"잘 오셨소이다.

오랜만에 우리 술이나 한잔씩 나눕시다."
수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문득 한신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지금 세상에는 대왕(한신)에 대한 괴상한 풍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대왕은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
한신은 그 말에 깜짝 놀란다.

 

"내게 괴상한 풍문이 떠돌다니요 ?

어떤 풍문인지 어서 말씀 해 주시오."
수하가 대답한다.

 

"지난날 어떤 사람이 주공을 찾아와서 <초왕 한신은 지금 종이매를 숨겨 두고 있다>고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공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자, 그 사람을 크게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그게 무슨 소린가 ! 한신 장군은 나의 심복일 뿐만 아니라, 그를 초왕으로 보내 준 사람도 바로 나다.

그런데 한신이 어찌 나의 원수인 종이매를 숨겨 두고 있겠는가 ?

당신이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중상 모략을 하려거든 앞으로 내 앞에는 다시는 나타나지도 마라 ! > 하고

그 사람을 당장 쫒아냈습니다.

말하자면 주공께서는 대왕을 절대로 믿고 계시는 셈이지요.

 

그러나 중신들은 아직도 대왕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귀순해 온 계포 장군도 종이매가 초왕한테 숨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주공께서도 이제는 반신 반의 (反信反疑)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저는 그러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려고 일부러 들렀습니다.

그러니까 대왕께서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미리 손을 써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무려니 한신도 이때만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그리하여 수하에게 솔직하게 고백한다.

 

"종이매가 나에게 숨어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상의 오해를 풀 수 있겠소 ?"
수하는 한신의 말을 듣고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다가 탄식하듯 말한다.

 

"그러면 종이매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그렇다면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되겠는걸요."

한신은 그 말을 듣자 더욱 불안해 하면서,
"이미 저질러 놓은 잘못은 어쩔 수가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주상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좀 가르쳐 주시오."
수하는 눈을 감고, 앉은 자리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로

팔짱을 끼고 몸을 좌우로 <끄떡끄떡>거리더니,
문득 눈을 뜨며 말한다.

"주상의 의심을 깨끗이 풀어 드릴 수 있는 방법이 꼭 하나 있기는 합니다."

 

"옛 ! 그런 방법이 있다구요 ?

그것이 어떤 방법인지 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그때서야 수하는 앞서 유방이 은밀히 일러준 대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대왕이 종이매를 죽여 가지고 그의 수급을 주상에게 바치도록 하소서.

그러면 주상께서는 대왕에 대한 모든 의심을 깨끗이 풀어버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신이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

 

"종이매와 나는 옛날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요.

나를 믿고 찾아온 친구를 어떻게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겠소 ?"
이 말을 듣고 수하는 냉철하게 말한다.

 

"친구와의 의리를 생각해 국법을 어겼다가는

후일에 커다란 화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잘 알겠소이다.

그러면 종이매를 내 손으로 죽여 그의 머리를 주상에게 바치도록 하겠소이다."

수하가 객사로 물러가자,

한신은 종이매를 죽이려고 후원 별당(別堂)으로 가보았다.
때마침 종이매는 혼자서 뜰을 거닐며 달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한신은 친구를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종이매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그러자 종이매가 한신에게 묻는다.
"그래서 대왕은 나를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

 

한신이 대답한다.
"당신의 목을 잘라 함양에 보내면 나는 화를 면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

한신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중단하자 종이매가 말한다.
"대왕(한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고 처신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이곳에 계속해 살아 있으면, 한제는 우리들이 반항할 것이 두려워 함부로 습격해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죽여 수급을 한제에게 바치고 나면, 그때에는 대왕 자신도 반역죄로 한제의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나를 죽임으로써 대왕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신중히 고려해 보셔야 합니다."
듣고 보니 과연 옳은 말이었다. 그리하여 한신은 종이매를 죽이기를 단념하고 말았다.

 

한편, 수하는 숙소에서 며칠 동안 기다려 보다가,

이렇다할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알아 채고,

아무 말도 없이 그곳을 떠나 도성인 장안으로 향하였다.
                         ...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