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진성이씨 향산고댁 문중이야기 발표회를 다녀와서

오토산 2020. 10. 23. 20:34

진성이씨 향산고댁 문중이야기 발표회를 다녀와서

 

경찰의 날인 10월 21일 13:30분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진성이씨 향산고택의 문중이야기 '求仁得人'발간기념회가 있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문중에서 기탁받은 전통기록유산을을 문중이야기로 발간하여

문중의 내력과 가계및 문중의 정신, 철학, 가훈 등을 소개하여

일반인들도 선현들의 교훈과 자취를 생생하게 느낄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네번째로 이번에는 진성이씨 향산고택에서 2002년부터 2019년까지 기탁한

고서 336종 1,121책, 고문서 3,602점, 서화및 기타 29점 등 4,752점을

연구와 활용을 하여 문중이야기 '求仁得人'을 발간하였다.

 

국학자료팀 최연숙 팀장의 사회로 열린발간기념회는 내빈소개와 국민의례에 이어

 김동룡 부원장님이 향산문중의 소개와 기탁현황을 소개하며 발간인사를 하엿고

이동진 문중대표님의 감사인사와 류숙자 향산선생 현손부님의 감사패를 전달,

발간팀 팀원들 소개에 이어 구경아 박사의 문중이야기 소개로 이어졌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선생은 봉화군 봉성면 동량리에서 태어났고

시조로 부터 18대손 이고, 퇴계선생의 11대손으로써

생부는 이휘준, 생모는 야성송씨 이고 7세에 삼촌 이휘철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조부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은 1813년 문과급제, 홍문관 응교를 지냈고

생부 복재(復齋) 이휘준(李彙濬 1806~1867)은 1856년 문과급제,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으며

향산선생은 1856년 생부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보면서 출사에 대한 각오를 하며

'내가 벼슬하지 못 하면 이 손가락을 펴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하여

왼쪽 엄지를 10년동안 굽혔다가 1866년 과거에 급제한 뒤에 다시 폈다고 한다.

1859년 18세에 봉화 닭실 권승하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1866년 8월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9월 문과시에 장원급제 하여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시간원정언, 홍문관 부수찬, 수찬, 교리,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때 최익현이 올린 반대 소를 옹호하다가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곧 복직되었고

그 뒤 양산군수로나갔는데 1877년 경상감사가 그의 치적을 일등으로 보고하였고

1882년 홍문관수찬이 되어 왕세자의 관례(冠禮)와 초례(醮禮)행사에 참여하였으며

영희전(永禧殿) 헌작례(獻爵禮)의 집례(執禮)로 차임되었고

그 뒤 통정대부에 오르고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사직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백의(白衣)와 백립(白笠)을 착용하고 통곡하였으며

10월에 국상이 선포, 영양관아의 곡반(哭班 국상 때 곡하는 반열)에 나아가 예를 갖추었고

12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선성의진(宣城義陣)을 결성 의병장이 되었으나

고종의 의병해산 명에 따라 자진해산 하고 예안과 영양골짜기를 오가며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지탄하는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10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식을 하였는데 청구(靑邱)에 사는 

종손자 이강흠의 집에 들렸다가 만류로 머물면서 계속 단식을 하다가

24일만인 1910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동생 이만규(李晩煃 1485~1921)는 자신도 단식을 하려하였으나 형의 만류로 하지 못하고

1919년 3월 김창숙과 함께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장서의거'에

조카 이중업과 이름을 올려 1995년 겅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장남 이중업(李中業 1863~1921)은 1985년 부친과 함께 선성의진에 참여하였고

김창숙과, 파리장서 서명운동을 이끌다가 사망,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며느리 김락(金洛 1862~1929)는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고문으로 두 눈을 잃고

살다가 1929년 2월 12일에 세상을 떠나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장손자 이동흠(李棟欽 1881~19670은 1918년 봉화군 법전면의 자산가 이정필에게서

군자금 모금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옥고를치렀고 대한광복회 단원 박상진(朴尙鎭)을

숨겨주기도 하였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이동흠의 동생 이종흠(李棕欽 1900~1976)은 김창숙에게 권총 한 자루를 얻어 그 총으로

1926년 1월 영양 석보면에 사는 외숙부 이현병(李鉉炳)을 찾아가 군자금 2만원을 요구,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격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향산의 증손자 이윤덕(李潤悳)은 하계마을의 유고들을 정리하여 간행하였고

향산순국유허비각을 세우고 일제가 부순 향산의 묘비를 다시 새겨 세웠다.

그의 아들 이부(李㵚), 이동석(李東奭)은 문중자료의 훼손을 염려하여

한국국학진흥원에 자료를 기탁하였고 일가의 묘소와 향산순국유허비 곁에 안장되었다.

 

기탁자료 중에는 향산의 시문을 정리한 "인출편(訒出編"

향산이 순국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청구일기(靑邱日記"

퇴계선생 친필 "천자문(千字文)", 이야순의 '요존록(要存錄)",

 향산이 왕세자 혼인예식에 참여하여 받은 "옥당계병(玉堂契屛" 등

많은 기록들이 있었다고 한다.

 

구경아 박사의 발표가 끝나고

김동룡부원장이 류숙자 현손부에게 문중이야기 '求仁得人'을 

전달하면서 행사를 마쳤다.

 

오늘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한국국학진흥원이 주최하는

문중이야기 '求仁得人' 발표회에 참석을 하여 3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고

 3대 독립운동가를 양성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향산문중 일가의 유래와

업적을 돌아보면서 훌륭한 선인들의 행적에 감사를 드리면서

참석하신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