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안동 도산면 예끼마을
호계서원과 한국국학진흥원 아래 안동호 호숫가에 자리 잡은 예끼마을. 안동댐 수몰 지역인
옛 예안면 소재지 주민들이 이주한 곳으로 최근 '예술에 끼가 있는 마을'로 단장하며
조용히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안동 도산면은 조선시대의 걸출한 유학자 퇴계 이황의 고향이다.
도산서원은 안동이 감히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자부하는 가장 든든한 뒷받침이다.
퇴계에서 비롯한 유교적 대의명분은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배경이었다.
대표적 저항 시인인 이육사의 고향 역시 도산면이다.
곳곳에 퇴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의 영향력이 넓고 두텁지만, 모두가 선비이고 양반일 수는 없다.
일반인의 삶은 퇴계에 가려 오히려 관심에서 멀어진 것도 사실이다.
안동 시내에서 봉화 청량산 방면으로 20km 넘게 떨어진 곳, 도산면 초입에 예끼마을이 있다.
얼마 전만해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농촌마을이 최근 조용히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예안 사람’의 자부심, 그리고 잊혀진 이름 ‘선성현’
‘예끼’는 아주 심하게 나무라거나 화가 났을 때 쓰는 말이다.
으레 ‘이놈’ ‘고얀 놈’이 접미사처럼 따라 붙고, 감정을 한껏 억눌러도 ‘이 사람아’ ‘이 양반아’ 등
시비조의 어투가 뒤따른다.
주로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양반고을에 이렇게 상스러운 지명이라니,
혹시 유학 오경의 하나인 예기(禮記)를 강하게 발음한 건가.
마을 초입의 조형물에 쓰인 해석은 좀 의외다.
‘예술에 끼가 있는 마을’로 풀이한다. 마을에 4개의 갤러리가 들어섰고,
골목 담장마다 향수 짙은 벽화와 트릭아트 작품이 그려져 있다.
예끼마을 입구의 조형물.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지역에 조금은 가볍고 발랄한 분위기를 입혔다.
트릭아트 작품이 예끼마을 골목과 담장으로 이어져 있다.
이곳이 예끼마을로 불린 건 2018년 안동시에서 ‘이야기가 있는 마을 조성사업’을 마무리하고부터다.
그전까지는 마땅한 자연 부락 명칭이 없이 그냥 서부리로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1976년 안동댐이 건설된 후 수몰지역 주민이 이주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주민 대부분은 물에 잠긴 예안면 소재지 서부리와 동부리에서 이주했다.
현재 마을 바로 아래다.
그래서 행정구역상 도산면에 살지만 주민들은 스스로 ‘예안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예안교회’ ‘예안이발관’ ‘농협 예안지점’ 등 예안이라는 명칭을 단 간판이 유난히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현 예안면 소재지는 이곳에서 찻길로 30㎞나 떨어져 있다.
직선으로 그리 멀지 않지만,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안’ 못지않게 자주 보이는 간판이 예안의 옛 지명인 ‘선성현’이다.
마을 중턱에 아담한 한옥 건물이 몇 채 보인다.
솟을대문에 ‘선성현아문(宣城縣衙門)’이라 적혀 있다.
선성현 관아의 대문이라는 뜻이다.
마당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근민당(近民堂), 정면에 장부당(掌簿堂)이 자리 잡았다.
수몰 전까지 예안면 사무소로 쓰던 건물과 부속 건물을 옮겨 왔다.
현재 근민당은 갤러리로, 장부당은 한옥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카페 내부는 목재 기둥과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오래된 건물 특유의 편안함과 따스함이 묻어 난다.
원두를 맷돌에 갈아서 내려 마시는 맷돌 커피는 이미 지역에 제법 알려진 명물이 됐다.
마당 한쪽에 의용소방대 망대로 사용하던 철탑도 옮겨 세웠다.
참 알뜰히도 챙겨왔다 싶은데, 알고 보니 이 건물과 평산 신씨 종택인 ‘송곡고택’ 정도가 전부다.
선성현 관아와 짝을 이뤄야 할 객사와 낙동강에서 잡은 빙어를 저장하던 석빙고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댐 하류 안동민속촌으로 옮겼다.
민속촌에서도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어서 점차 잊혀진 유물이 되고 있다.
예끼마을의 선성현아문.
예안현의 옛 지명인 선성현 관아 건물로,
예안면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수몰 위기에 처한 건물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옛 예안면 사무소 부속 건물이던 선성현 장부당 건물은 현재 한옥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대신 마을 동편에 숙박시설인 선성현 한옥체험관과 문화단지를 조성해 놓았다.
넓은 부지에 세운 한옥 건물이 크고 번듯하지만,
옛 고을의 정취를 느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
호수가 잔잔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관아가 자리 잡았고, 한쪽 귀퉁이에 쌍벽루라는 정자도 복원했다.
퇴계 이황과 농암 이현보를 비롯한 6인의 시가 걸려 있는데,
장응선의 시 한 구절이 예끼마을의 오늘을 예견한 듯하다.
“쓸쓸한 옛 고을은 조용히 강가에 서 있는데, 정자 규모 새로운 것 오히려 놀랍다네.
일부러 이 경관을 나그네에게 남겨서, 비로소 정자가 주인을 만났음을 알리라
.” 선조 38년(1605) 대홍수로 떠내려간 누각을 복원한 후 읊은 시로 보인다.
쌍벽루에서 조금 더 가면 산성공원이다.
후삼국 시대에 쌓은 선성산성이 둘러진 낮은 봉우리로,
강 풍경을 내려다보며 산책하기 좋도록 꾸며 놓았다.
예끼마을 동편 산성공원. 후삼국시대에 축조한 선성산성을 공원으로 꾸몄다.
예끼마을 선성현 문화단지에 새로 세운 쌍벽루. 퇴계와 농암을 비롯한 6인의 시가 걸려 있다.
물에 잠긴 옛 예안면 소재지 위에 설치된 선성수상길. 호수를 가로질러 1km 가량 이어진다.
예끼마을 앞 안동호 호수를 가로지르는 선성수상길. 관광객은 대부분 이 산책로 때문에 예끼마을을 찾는다.
예끼마을 앞 호수 위의 선성수상길. 수위에 따라 가라앉고 뜨는 부교 형식으로 가설된 수상 산책로다.
한옥체험관에서 호수로 내려가면 ‘선성수상길’로 이어진다.
외지 여행객이 예끼마을을 찾는 가장 큰 이유도 이 길을 걷기 위해서다.
부교처럼 물위에 뜬 목재 덱 산책로가 약 1㎞ 휘어지며 호수 건너편 호반자연휴양림까지 연결된다.
물 아래는 예안면 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산책로 중간 수몰된 예안국민학교 자리에 당시 사진과 풍금 등이 놓여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낚시꾼들이나 종종 찾던 예끼마을이 관광지로 단장하면서 분위기
좋은 카페와 식당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들어 섰다.
그러나 길거리 양편에 무질서하게 차량이 주차돼 있어 호젓하게 마을을 둘러보기에는 다소 어수선하다.
새 시설을 짓는 것만큼이나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골짜기마다 서당ㆍ서원ㆍ향교…도산면은 교육의 요람
도산면에는 도산서원 외에도 다양한 공ㆍ사립 교육기관이 있었다.
예끼마을 선성현 문화단지에서 모퉁이를 하나 돌면 예안향교가 나온다.
세종 2년(1420) 건립한 공립 교육기관으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600년 된 은행나무 뒤로 정문 격인 양호루가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고,
뒤편으로 강학 공간인 명륜당과 숙소인 동ㆍ서재,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부속 건물이 남아 있다.
예끼마을의 예안향교. 선성 문화단지 뒤편에 위치해 산성공원과 마주보고 있다.
예끼마을 뒷산에 위치한 호계서원. 물을 피해 3차례 옮긴 이력이 있어,
아예 물난리 걱정이 없는 산꼭대기에 자리 잡았다.
호계서원 누대에 오르면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과 안동호 풍광이 평화스럽게 펼쳐진다.
예끼마을 뒤편에 위치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꼭대기 부근에 호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의 널찍한 누대에 오르면 예끼마을과 그 앞으로 안동호의 잔잔한 물결이 평화롭게 내려다보인다.
호계서원은 조선 선조 6년(1573)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유서 깊은 서원인데
10여채의 한옥은 모두 새 건물이다.
안동 땅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난해에야 이곳에 안착했기 때문이다.
서원은 월곡면(현 예안면) 도곡동에 여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다.
1605년 대홍수로 소실되는 수난을 당했고, 본래 자리에서 북측으로 100보 떨어진 곳에 중건했다.
광해군 12년(1620)에는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추가 봉안했고,
숙종 2년(1676) ‘호계서원’이라 사액받는 영광도 누렸다.
그러나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7년 뒤 강당만 새로 지어 명맥을 유지해오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임하면으로 이전하게 된다.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91년 임하댐이 준공되면서 다시 한번 위기를 맞는다.
물에 잠기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여수로의 물보라와 습기로 건물이 훼손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예상치 못한 물난리를 3차례나 겪은 터라 안동 유림이 최종적으로 물색한 장소가 바로 이곳,
다시는 수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예끼마을 산꼭대기다.
도산서원과 가깝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도산면 동부리 호숫가의 월천서당. 퇴계 아래서 학문에 매진한 원천 조목이 세운 서당이다.
월천서당 앞 나룻터에 도선이 대기하고 있다.
댐 건설로 길이 끊긴 도산면과 예안면을 잇는 교통수단이다.
호계서원에서 약 5㎞ 떨어진 호숫가에 또 다른 사설 교육기관인 월천서당이 있다.
월천 조목(1524∼1606)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조목은 퇴계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명종 7년(1552)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이황 아래서 학문 연구에만 주력한 인물이다.
중종 때 세운 건물은 마루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온돌방이 배치된 소박한 규모인데,
귀퉁이에 걸린 ‘월천서당(月川書堂)’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월천서당은 현재 주변 정비 공사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다.
서당으로 가는 길목에는 올해 완공을 목표로 한국문화테마파크 공사가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호젓한 강 풍광을 헤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서당 앞 나루터에는 도선 한 척이 이따금씩 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댐 건설로 길이 끊긴 도산면과 예안면을 잇는 배편이다.
월천서당에서 약 7㎞ 거리에 도산서원이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 사립 교육기관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다.
주차장에서 서원에 이르는 솔숲 길도 운치 있고,
그 길에서 내려다보는 강 풍경과 강 한가운데의 시사단도 은은하다.
시사단(試士壇)은 정조 때 이황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특별 과거시험(도산별과)을 치른 곳이다.
도산서원 앞 강변에 위치한 시사단. 도산별과가 치러진 곳으로 댐 수위가 높아 현재는 주변이 물에 잠겨 있다.
도산서원 앞 시사단. 댐 수위가 높아 현재 주변이 물에 잠겨 있다.
휘어진 버드나무 가지 뒤로 보이는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여러 채의 전각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어 문을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보여 준다.
도산서원은 여러 채의 전각이 층을 이루며 미로처럼 연결돼 있어 작지만 다양한 풍경을 담고 있다.
도산서원 앞마당에서 특별 과거시험을 치렀던 시사단이 보인다.
도산서원엔 주 강의실인 전교당과 유생들의 숙소인 동ㆍ서재 외에
퇴계의 거처인 도산서당, 사당인 상덕사, 제자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 서고인 광명실,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관리인의 살림집인 고직사 등
여러 건물이 층을 이루며 오밀조밀하게 몰려 있다.
문과 담을 통과할 때마다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조선시대로 먼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
이육사의 고향인 도산면 원천리 마을 어귀에 자리한 이육사문학관.
그의 생가는 댐이 완공되기 전 안동 시내로 옮겼다.
이육사문학관 앞에 '절정' 시비와 그의 동상이 앉아 있다.
이육사문학관 가는 길, 퇴계종택 인근의 계상서당.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 지은 작은 서당이다.
도산서원에서 언덕 하나를 넘으면 퇴계종택과 묘소가 있고,
그 길로 곧장 가면 민족 시인 이육사의 고향인 원천리다.
마을 어귀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엄격한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민족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한 그의 일대기와 문학적 성취를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입구에 ‘절정’ 시비가 있고 그 앞에 그의 동상이 앉아 있다.
시인의 시선을 따라 가면 마을 앞 드넓은 들판과 낙동강이 펼쳐지고,
그 물길을 우람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청량산에서 이어지는 왕모산 자락이다.
안동=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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