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퇴계선생 서세 450주년 기념 강의 원고

오토산 2021. 4. 3. 13:16

퇴계선생 서세 450주년 기념 글 1

글 쓴 이 : 농암종택 등 록 일 : 2021-03-08 오후 6:49:08 조 회 수 : 18

퇴계선생 서세 450주년 기념 강의 원고

2020년 11월 28일 안동시민회관


차례


퇴계에게 제자, 선생, 학교, 교육은 무엇인가?


1. 글머리에
2. 퇴계에게 제자는 누구인가?
3. 퇴계에게 선생은 누구인가?
4. 퇴계에게 학교는 무엇인가?
5. 퇴계에게 교육은 무엇인가?
6. 마무리글

1. 글머리에

A.
2020년 9월 24일, 한국국학진흥원 박경환 박사께서 <퇴계선생 서세 450주년 추모행사>의 일환으로 “만사輓詞,
제문祭文에 나타난 동시대인들의 선생에 대한 추모의 마음”에 대해 강의를 요청한다. 나는 적임이 아니라고 사양했다.
시간도 촉박했다. 더구나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1498~1581) 선조의 만사, 제문을 언급하니 더욱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녁에 다시 집으로 자료를 가지고 와서 “김병일 이사장님의 요청이니 승낙해 달라”고 한다. 답변을 유보하고
두고 간 자료를 살펴보니, 과연 벽오의 글은 인상적이었다. 전에 이사장께서 “벽오의 만사, 제문은 감동적입니다”라고
한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주관자의 ‘대독요청’도 있고 해서 만사 전문을 소개한다. 감상 편의를 위해 단락을 지었다.

隣侍 李文樑
人皆求識面 사람들은 면식만을 구하지만
我幸爲知己 나는 다행히 知己가 되었네.
人皆願卜隣 사람들은 이웃에 살기를 원하지만
我幸居仁里 나는 다행히 仁里로 살고 있네.

相隨自妙齡 어릴 때부터 어울렸으니
肝膽兩相視 서로 속마음까지 환히 본다네.
良辰與美景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하고
林園窮樂事 숲속에서 즐거움을 다 하였네

此生不虛過 내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은
餘波之所被 그대를 만났음 때문이네
近來各衰暮 최근에는 서로 늙어
相思懶相値 생각만 할 뿐, 만나기는 정말 어렵네.

人生本草草 인생이란 원래 풀잎 같지만
豈意遽至此 어찌 이리 갑자기 가는가!
奎璧忽淪精 문장별이 홀연히 그 빛을 잃어
南天收淑氣 남쪽 하늘 맑은 기운 사라졌네.

門徒擧國士 제자들은 거의 한 나라의 선비들로
奔波來不已 분주히 찾아옴이 그치지 않네.
自慚九牛毛 스스로 九牛一毛처럼 부끄러워
未堪齒諸子 여러분과 나란히 할 수 없네.

幽明隔一夜 유幽와 명明이 하룻밤에 갈렸으니
孤負平生志 평생 약속을 저버렸음이네.
羊曇無限淚 양담羊曇의 끝없는 눈물을
聊復寫一二 어찌 한 두 줄 글로 나타내랴!

莫謂別多時 이별의 시간이 길다고 하지 말게
吾年七十四 내 나이 이미 74세라네.

벽오의 글은 2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담백함이다. 만사 가운데 “此生不虛過 餘波之所被”와
“莫謂別多時 吾年七十四”의 구절 등은 더욱 그렇다. “이 생에서 그대를 만나 보낸 평생이 헛되지 않았으며”,
“곧 저 생에서 다시 만날 날도 멀지 않았다”고 했다. 친구에 대한 별리의 언어로는 특별한 감동을 준다.

만사, 제문은 추모 글이다. 망인에 대한 나의 소회가 담긴 최후의 글이다. 애도와 찬양이 주조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에 대한 추모 글도 그렇다. 동방유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공자, 맹자,
정자, 주자 등과 도학, 동방, 사문, 태산 등이 한결같이 쓰여 있다. 이른바 ‘도학’, ‘도학자’와 연관되고,
중국 인물에 연원하고 있다. 나머지 구절들도 최고의 추모 문자로 쓰여 있다.

벽오의 글은 그렇지 않다. 거창한 단어가 없다. 과장도 없다. 그저 말하듯 한다. 최고의 표현이
“별빛이 홀연히 그 광채를 잃어, 남쪽하늘 맑은 기운 사라졌네(奎璧忽淪精 南天收淑氣)” 정도이다.
제문의 한 구절도 “봄에는 경담 구비에서 놀고, 가을에는 분강 달빛을 감상했다(春遊鏡潭之曲 秋泛汾江之月)”이다.

유명 작곡가 말이, “노래는 가사가 옆에서 말하듯 해야 뜬다”라고 하는데, 벽오의 만사가 그렇다. 추모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아주 이색적인 글이라 할 수 있다. 친구라서 그런가? 다른 하나는 자신을 ‘인시隣侍’라고 한 점이다.
그저 ‘이웃에서 귀인을 모시는 사람’이다. 아주 드문 표현이다. 친구라서 그런가?

참고로, 요절한 천재 가수 신해철이 작사, 작곡한 명곡,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의 가사가 말하듯 한다.
가사 일부가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회는 없노라고, 그대여”이다. 신해철은 46세에 죽었다.

보석 같은 영혼의 작사, 작곡가 이영훈의 명곡 ‘광화문 연가’가 그렇다. 가사 일부가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이다. 이영훈은 49세에 죽었다.

❚벽오 이문량이 쓴 퇴계 만사 『벽오집』 ⓒ한국국학진흥원

B.
글은 내면세계를 보는 거울이다. 벽오의 만사가 그렇다면, 퇴계가 벽오를 보는 시선은 어떤가?
글 한 편, 시 한 수를 소개한다. 글은 이렇다. 가을 산책 약속 편지이다.

이 글은 퇴계의 시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고 생각된다. 숨겨둔 애인처럼, 나만 몰래 보는 글인데
공개한다. 이 가을날, 훌쩍 갈 수 있는 곳 - 능운대, 갈선대, - 퇴계는 그 곳 산천을 홀로 걷기 좋아하는, 곧 ‘홀로 걷는
즐거움’의 철학을 지닌 분이었다. 그 내면을 지금 벽오에게 보여주고 있다. 단 한 분이 아니었을까? 글은 이러하다.


“답이대성答李大成,
며칠 전, 틈을 내어 홀로 길을 나서 산수를 두루 구경했더니 무르익은 가을 풍경과
들국화의 맑은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당나귀가 지쳐 절룩거리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능운대凌雲臺의 선명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한나절을 걸었습니다. 주변 여러 벗들을 불렀다면
마음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 돌아갈 길이 낭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늙고 병든 사람이 어찌 감당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대나무만 구경하고 주인을 묻지 않은 격’이 되었으니,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
렇게 되었다고 알려주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갈선대葛仙臺의 산책은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20일 이후는 조금 늦은 감이 있다 하더라도 말씀하신 것처럼 함께 할 것입니다. 다만 들리는 소문에
머지않아 안동 관청에서 관원 두 명이 온다 하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 감흥感興이 일어남을 견디지 못하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滉.”

원문 答李大成
日者, 抽身孤往, 玩水尋山, 秋興滿目, 野菊明香, 令人意適忘倦, 不知蹇驢之踸踔也. 凌雲臺淸絶縹緲, 異境可愛, 半日夷猶,
招其旁近諸人, 則必不能任意脫去, 歸途狼狽, 老病何堪? 茲致看竹不問主人, 如有恠者, 以是告之, 幸甚. 葛仙之遊, 寤寐佇思,
念後雖遲, 當依示. 但又聞安東兩官近欲來訪, 不知定在何日, 恐或連作掣肘也. 若不禁興發, 則或又作孤往, 亦未可知耳. 滉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능운대”와 “감흥이 일어나면 혼자도 갈 수 있는 갈선대” 이 능선의 가을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퇴계의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퇴계의 고독을 반추했다. 그리고 ‘홀로 걷는 즐거움’도
음미해 보았다. 선비들은 이를 ‘유상遊賞’이라 했고 산행은 ‘유산遊山’이라 했다. 그 속에는 보步, 사思, 주酒, 가歌,
시詩, 창唱 등의 요소가 있다. 좀 격이 높은 단어로 ‘풍류風流’가 있다. 풍류는 ‘바람처럼 흐르고 예술처럼 산다’인데,
그런 인생이 어디 쉬운 일인가. 풍류 보다는 유상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퇴계, 벽오 두 분이 갈선대를 걸어가는 모습처럼 멋진 가을날 멋진 친구와 그런 유상의 즐거움을 만끽해봄이 어떨까.
자연만큼 좋은 교재는 없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 아니라 요산樂山이 인자仁者를 만든다. 유상과 유산은
‘관대이좌冠帶而坐’와 다른 또 하나의 멋진 ‘경敬’ 수련방법이다.
시는 이렇다. 퇴계가 청량산을 가면서, 천사川沙에서 동행하기로 한 벽오를 기다리며 쓴 시다.
“청량산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의 구절이 나온 시이기도 하다. 그림처럼 담백하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퇴계는 생애 청량산을 6번 갔다. 그때마다 단출했다. 1564년은 달랐다. 16명을 초청했고, 13명이 참가했다.
혼자 사색하기를 좋아하며 집단적 모임을 주도한 일이 없는 퇴계에게 이 해 산행은 ‘퇴계식의 일상’으로 볼 때
매우 이례적이다. ‘유산遊山’의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 계획적인 산행으로, 전 생애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또한 마지막 청량산 산행이기도 했다. 천사의 갈선대는 그 기점이었다. 이때 일행 가운데 유일한 친구가 벽오였다.

❚갈선대에서 본 단사 남벽


C.
참고로,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쓰겠다.
두 분 사이는 좀 밀접하다. 그야말로 仁里이다. 벽오 이문량 중심으로 보면 도산서당 건축을 감독했으며
143편 퇴계 편지가 남아 있다. 퇴계보다 3살 많고 11년 더 살았지만, 두 분은 서로를 소중히 하는 정다운 친구로
전 생애를 함께했다. 형 신야 이징李澄과도 물고기를 보낼 만큼 친밀했다. 신야가 보낸 시 제목이 ‘사이대성송강선
謝李大成送江鮮’이다. 신야는 벽오와 동갑인데, 85세로 벽오보다 1년 더 살아 ‘애일당구로회’의 정식 회원이 되었다.

❚신야가 보낸 시 ‘謝李大成送江鮮’ 『벽오집』 ⓒ한국국학진흥원

아버지 농암 이현보李賢輔는 숙부 송재 이우李堣와 동방급제 했다. 6촌 인척으로 농암이 2살 많았지만 안동부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환로를 함께했다. 농암에게 퇴계는 자상한 어른의 관계를 넘어서는 각별한 것이었고, 퇴계에게
농암은 인척과 친구의 부친을 넘어서는 뜨거운 인간관계였다. 34살의 나이를 넘어 서로를 존경했으니, 그야말로
망년지우忘年之友를 하였다 하겠다. 농암은 온계 이해李瀣에게도 똑같은 애정이 있었다. 자식 같은 애정이 없었다면
이제 막 부임한 권부의 첫 발, 도승지, 의정부사인을 그만두고 집에 가라 할 수 없다.

조부 이흠李欽은 퇴계 조부 노송정 이계양李繼陽(처 영양김씨)과는 내외종간이다. 이편에서 보면 고종사촌이고,
저편에서 보면 외사촌이다. 아들 청암 이원승李元承은 동서로 퇴계 편지 18편에 남아 있다. 안동 가일,
화산 권주權柱는 처조부이다. ‘계문안자溪門顔子’라 일컬어지는 파산 류중엄柳仲淹은 이원승의 사위이다.
2018년 경상북도청 신축 당시, 처삼촌 권굉權硡(1495~1565) 묘소에서 두 분 만사가 나왔다. 453년 만이다.
입암 류중영柳仲郢, 학봉 김성일金誠一 등의 만사 14점이 함께 출토되었다. 퇴계 친필로 주목받았고 만사를 매장할 때
같이 묻는 예법도 아울러 알게 했다. ‘만사 묻음’은 1791년 농암묘소 이장 당시 35점의 당대 관료들의 만사가 나온 바 있다.

사위는 금계 황준량黃俊良과 창균 김기보金箕報이다. 금계는 제자 가운데 유일한 학문적 동지 같은 존재였다.
창균은 안동김씨대종택 양소당養素堂의 주인으로 조부 삼당 김영金瑛과 더불어 오늘의 소산素山이 있게 했다.
사위 두 분은 분천 처가에 와 살았고 이때 퇴계를 만났다. 손자 이사순李士純은 퇴계 처이질妻姨姪이다.

동생 호암 이희량李希樑은 퇴계와 교분이 적지 않고 동생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은 퇴계와 동방급제 했다.
벽오 못지않은 우정이 있어 61편 퇴계 편지가 남아있다. 두 분 우정을 지켜본 금계가 “하연이 퇴계가 7월 16일,
장난삼아 지은 시에 삼가 화답 한다(謹和賀淵戱退溪七月旣望之作)”라는 제목의 시를 짓기도 했다. 금계에게
벽오는 장인이고, 하연은 처삼촌이고, 퇴계는 스승이었다. 퇴계에게 농암은 생애 존경한 한 분이었고,
벽오와 하연은 일생의 친구였고, 금계는 유일한 학문의 동반자였다.

1534년, 농암이 퇴계의 문과 시험을 격려하는 시, - ‘이 진사 경호가 서울로 시험을 치러감에 부치다
(寄李上舍景浩赴試在京)’-를 써주었다. 합격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내 아들의 합격은 요행이지만
경호의 합격은 시대의 여망이다. 오늘날 이 사람을 넘어설 사람은 없으니, 국가의 행운이며 우리 모두의
경사이다(家兒之獲參 只是僥倖 而景浩之出身 實恊時望 無踰此人 實聖朝之幸 吾黨之慶)”했다.
농암은 가장 먼저 퇴계를 알아본 사람이기도 했다.

동생 환암 이계량李季樑도 퇴계와 인연이 적지 않고, 동생 행암 이윤량李閏樑도 제자이며,
동생 매암 이숙량李叔樑은 ‘선성삼필宣城三筆’, ‘계문삼처사溪門三處士’이며,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을
짓고 퇴계를 모셨다. 동생 이연량李衍樑은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퇴계 최후를 진맥했다.

산남 김부인金富仁은 매제妹弟로, 탁청정 김유金綏의 아들이다. 종제 양곡당 이국량李國樑은 퇴계 종손서(조카 李寅 壻)
이다. 조카 이영승李令承은 송재 이우의 손서이고, 조카 이선승李善承, 이극승李克承, 이광승李光承이 모두 제자이다.
종질 이명홍李命弘, 이복홍李福弘도 제자이며, 그 동생 간재 이덕홍李德弘은 설명이 필요 없는 계문고제溪門高弟이다.
종손자 이사원李士愿도 제자이다. 도산서원 광명실 기념 현판에 쓰여 있는 이운李芸은 종손자인데 퇴계 신화를 남긴
인물 가운데 가장 분명한 기록을 남긴 분이다. 이희량, 이중량, 이계량, 이운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산급문제현록』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14명, 진성이씨, 안동권씨 다음 많다.


❚퇴계와 청암 이원승의 처삼촌 권굉의 무덤에서 출토된 퇴계 친필 만사 ⓒ한국국학진흥원

❚간재 이덕홍이 퇴계의 명으로 만든 혼천의

한국국학진흥원에 퇴계 조모 영양김씨의 분재기分財記가 있는데, 이흠의 동생 이균李鈞이 집필하고 서명했다.
영양김씨는 1430년 10월 4일 출생하여, 1522년 9월 5일 돌아가셨고, 이균은 1442년 출생하여 1540년 돌아가셨다.
각각 93세, 99세를 사셨다. 분재는 1510년 4월 했으니, 80대 영양김씨가 70대 외사촌에게 분재를 주관하도록 한 듯하다.
이 분재기는 노송정종택에서 기탁했다.
또 다른 개인 소장 분재기에는 이계양, 이흠의 이름의 함께 있는데, 그 글은, ‘財主祖母贈嘉善大夫眞城君進士
李繼陽**’과 ‘訂保幼學**四寸娉 麟躋縣監 李欽’이라 쓰여 있다. 이흠의 친필 글씨로 집필 보증했다.
이흠 내외도 98세, 85세로 장수했고, 이계양도 65세로 당시로는 장수였다. 이흠 아버지, 이효손李孝孫 내외도
84세, 77세였고, 조부 이파李坡 76세, 증조부 도산 입향조 이헌李軒 84세였다. 이파 외손서가 이계양이다.
농암 내외도 89세, 65세였고 퇴계, 신야, 벽오, 호암, 하연, 환암, 행암, 매암도 각각 70세, 85세, 84세, 65세,
79세, 83세, 74세, 74세를 살았다.
퇴계가 한서암寒棲庵, 암서헌巖棲軒(도산서당)을 지을 때 “천사川沙 어른 집을 참고했다”는 그 어른은 농암 동생,
이현우李賢佑로 91세였다. 천사는 퇴계가 영지와사靈芝蝸舍를 떠나 이사 간 최초 지역이다. 농암 기록에,
“何若芝山訟舊居 川沙猶可卜新墟”와 “聞景浩移卜川沙 有中藏萬卷之絶 賡其韻以續舊戱”이 있다.
그 동생 이현준李賢俊은 76세였다.

이계양 동서, 김홍金洪은 이조판서 김담金淡의 동생인데, 두 분 모두 농암 어머니, 안동권씨 외삼촌이다.
이런 장수에 혈연, 학연이 얽혀 있었으니 보다 많은 왕래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더구나 아들, 손자들인
송재와 농암, 퇴계와 하연이 함께 공부하고, 함께 서울로 올라가, 함께 급제하는 모습을 한국의 오지奧地 안동
도산에서 지켜본 100세 노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지금 아늑해졌지만 500년 전 인가 드문 산촌에서 같은 날
양대 문과급제는 상상이 잘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순간, 양가는 문득 ‘家門’이 되었다.

1454년, 노송정이 온혜에 왔을 때 ‘주민 한 집이 있었다’고 했고 분천은 그때 이미 70년이 넘었으니
이 보다는 조금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이헌李軒은 1380년 무렵 들어왔다. 농암 고조부가 된다.
노송정의 도산 입향은 “봉화 훈도가 되어 이곳을 지나다가 어떤 스님을 만나 의논하고 복거卜居했다”고 했다.
그런데 상상력을 조금 넓혀보면, 영양김씨 입장에서는 외조부 이파, 외사촌 이흠 두 분 현감을 지냈고, 대대로
형제들이 관직을 지냈으니 이들 부부에게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분재를 주관한 이균 역시 종7품 직장直長이어서
수결手決에 ‘直長 李’로 되어 있다. 우리말 가사 ‘선반가宣飯歌’를 지은 총명하고 인자한 농암 어머니가 일직이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인 김담, 김홍의 집, 이른바 ‘삼판서댁’에서 성장하여 두 분은 더욱 정서적으로 가까울 수도 있었다.
외종조부 예문관직제학 이오李塢는 ‘삼판서’의 한 분인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손서孫壻이다. 황유정의 외손자가
김담, 김홍이니 노송정 부부가 모를 리 없었다.
『퇴계연보』에 1549년 2월 한식날, “농암 효절공의 증조 의흥공(의흥현감) 휘諱 파는 선생 조모의 외조이다.
그 날 묘소 입석고유에 성대하게 제수를 준비하여 참석 하여 빗 글을 썼고, 농암이 사례 시를 썼다”고 한 기록이 보인다.
퇴계와 벽오는 이런 시대에 양가 중심인물이었다. 퇴계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이지만 벽오 역시 도산 향내 경로잔치인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농암에 이어 해마다 주관했다. 어느 해는 두 번 개최하기도 했다. 신야와 퇴계가 여기
참석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인 영양김씨 분재기(『가선고적』제2) ⓒ한국국학진흥원

이후 600여년의 세월이 흘러 그야말로 이웃이 되어 수다한 사연들이 쌓여 역사가 되었다. 한국국학진흥원에는
농암종택에서 기탁한 5천여 점 자료 가운데 퇴계가 쓰신 유일한 우리말 ‘농암 어부가’와 ‘퇴계 도산12곡’의 목판이
있다. 왜 두 작품을 함께 써놓았을까. 왜 그 목판이 농암종택에 있을까? 이 글씨는 오랫동안 농암종택에 있었고,
『농암집』 판각 당시 함께 한 것으로 추정된다.
1791년 농암묘소 이장 당시, 도산서원에서 대형 상여를 안동으로 특별 발주하여 부조했다. 농암묘소 이장은
정대용鄭大容 경상감사 지시로 7개 군 300명 장정이 동원된 거도적 토목공사였다.
농암종택에서 500여년 이어온 경로잔치 애일당구로회는 후손들이 대대로 참여했고, 조선후기에는 집단적으로
참여해 거의 주도하다시피 했다. 퇴계 10대 종손 고계 이휘녕李彙寧이 참석하여 쓴 글 일부는 이러하다.
『분양구로회汾陽九老會』에 있는 글이다.


“아아! 농암 효절공께서 낙동강 상류 분강에 애일당을 지음은 진정 뜻이 있음이다. 전에 글을 보니
구로회, 속구로회, 속로회, 백발회 등의 이름으로 모임이 이어졌는데, 대개 70세 이상 노인 12~13인이
항상 모였다. 돌아보건대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산수는 의구한데 애일당은 퇴락했다. 그런데 지금
효절공의 후손인 부호군께서 연세가 90세라, 모두 말하기를 ‘이 모임을 잇지 않을 수 없다’ 한다.
안동의 옛 풍속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은 까닭으로 수십 인의 ‘촌 노인(布衣老叟)’들과 산에서
나와 탁영담으로 올라가서 작은 배를 타고 흘러 내려가다가 농암 아래에서 배를 묶어두고 술을 한잔씩 돌리고
어부가 3장을 노래했다. 높은 갓과 백발들의 그림자가 산수에 비치고 음식 또한 마른고기, 젓갈, 국수, 밥, 불과
다섯 그릇도 안 되니 그야말로 진솔회라 할 수 있다. 주인도 없고 나그네도 없다. 스스로 술을 먹고 안주를 먹었다.
날이 저물어 해는 떨어지고 달이 마루에 떠오르나 이미 취하고 또 취하여 모두들 돌아감을 잊었더라!”


이충호李忠鎬 13대 종손과 수졸당, 양산댁, 계남댁, 새영감댁 등 하계 여러 어른들이 주관한 『농암영당건립계첩
聾巖影堂建立契帖』이 있는데, 여기에는 퇴계 전 자손이 1량씩 부조한 기록이 있다. 글씨는 포항공대 故 김호길金浩吉
박사의 고모부 우석 이탁李鐸이 썼다. 내 조상도 아닌 남의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 전 자손이 성의를 냈다. 일제시대
퇴계 후손들의 ‘농암지키기 일환’이라 느껴진다. 종손은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 농암 불천위 제사에 참석하셨다.
애일당 아래 자연석에 ‘聾巖 先生 亭臺 舊庄’이라는 암각 글씨가 있다. “농암, 선생, 정자, 옛 터”라는 뜻이다.
그 글씨는 한 말의 하계 학자, 진사進士 이강호李康鎬의 글씨이다. 한 글자 크기가 75cm가 되는데, 해서楷書
글씨로 이런 큰 암각서는 다른 곳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역시 ‘농암지키기 일환’이라 생각된다.

농암종택에서는 퇴계종택 정자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복원 부조에 애일당, 분강영정각汾江影幀閣을 합해
200량을 부조한 바 있다. 기록에는 거의 모든 집을 ‘宅’이라 했는데, 농암종택은 ‘宗宅’이라 표기했다. 양가는
그렇게 통재通財하면서 수백 년 내려왔다. 일 년에 한 번 부조했다면 오백 번이고, 두 번 했다면 천 번은 했으리라.

도산서원 광명실에 이운 기념 현판과 더불어 하연 이중량의 내사본內賜本 『통전通典』 200권 75책이 완질로 보존되어
있다. 내사기內賜記에 “嘉靖 三十九年 九月 日 內賜 禮曹參議 李仲樑 杜氏通典 一件 命除謝恩 副承旨 李(手決)”이 있다.
우리나라에 단 2질만 남아 있다. 다른 한 질은 벽사 이우성 박사가 가지고 있다가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이를 조사한 이정섭 전 문화재위원 말씀으로는 “완질로 보존된 것은 일본 ‘경도대학본’과
더불어 ‘광명실본’이 유일하다”고 한다.
또 다른 하연의 내사본, 『문헌통고文獻通考』 348권 136책(4권 결본)도 보존되어 있다. 『통전』과 비슷한 내용의
내사기가 있고, 책 끝에 ‘永陽李公幹供覽’이란 퇴계 친필이 남아 있다. ‘이중량에게 빌려 보았다’는 뜻이다.
빌려보시고 그대로 보존된 듯하다. 돌아가시기 전 “빌려온 책은 모두 본가에 돌려주라” 하셨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우정은 지금까지 그렇게 남아있다.
2012년은 <애일당 건립 500주년 기념>으로, 한국국학진흥원과 예안향교가 주관이 되어 ‘애일당구로회’가 농암종택
마당에서 재현 되었는데 길사 참석을 거의 삼가신 이근필李根必 종손께서 이채로운 부조와 함께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셨다. 강각의 현판 글씨 ‘江閣’과 ‘沙川齋舍’, ‘燕谷齋舍’ 현판 글씨도 정성스럽게 써주셨다. 나는 그 부조 상자를
아직까지 뜯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 그런 사이, 필자 증조모가 하계 새영감댁(李中斗 家)과 정언댁(李晩松 家)에서 오시어
외손이 되었다. 이미 역사가 되었고, 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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