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안동의 동족부락과 입향시조

오토산 2021. 5. 18. 05:20

안동의 동족부락과 입향시조

정약용(丁若鏞)은 안동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그 곳(안동)의 풍속은 가문마다 각기 한 분의 조상을 모시고 하나의 장원(莊園)을 점유하여

같은 일가끼리 살면서 흩어지지 않으므로 공고하게 유지하여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그 예를 들면, 진성 이씨(眞城 李氏)는 퇴계(退溪:李滉)를 모시고 도산(陶山)을 점유하였고,

풍산 류씨(豊山 柳氏)는 서애(西厓:柳成龍)를 모시고 하회(河回)를 점유하였고,

의성 김씨(義城 金氏)는 학봉(鶴峰:金誠一)을 모시고 천전(川前)을 점유하였고,

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충재(沖齋:權橃)를 모시고 계곡(鷄谷)을 점유하였고,

의성 김씨는 개암(開巖:金宇宏)을 모시고 호평(虎坪)을 점유하였고,

풍산 김씨(豊山 金氏)는 학사(鶴沙:金應祖)를 모시고 오미(五嵋)를 점유하였고,

예안 김씨(禮安 金氏)는 백암(栢巖:金玏)을 모시고 학정(鶴亭)을 점유하였고,

재령 이씨(載寧 李氏)는 존재(存齋:李徽逸)를 모시고 갈산(葛山)을 점유하였고,

한산 이씨(韓山 李氏)는 대산(大山:李象靖)을 모시고 소호(蘇湖)를 점유하였다.245)고 하여

각지의 대표적 양반가문들이 동족부락을 형성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이는 안동지방의 동족부락이 대부분 그들 조상 가운데

조선시대 사림에 명망이 높은 대표적 인물이 정착한 이래 그

후손들이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여 그것을 매개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가지』의 각리조(各里條)에는 그같은 동족부락 형성의 전제가 되는

촌락과 입향조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다소 장황하지만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府東>
지내동(池內洞):좌의정 정탁(鄭琢)과 참판 구봉령(具鳳齡)이 출생.
노산촌(盧山村):이황(李滉)이 독서하던 곳으로 선비들이 사당(祠堂)을 세움.
도곡촌(道谷村):사직 이복원(李復元)이 선영을 위해 재사(齋舍)를 건립.
<府南>
개곡촌(皆谷村):고려 권사복(權思復)이 만년에 우거(寓居).
<府西>
용산촌(龍山村):율생(律生) 이휘(李輝)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감사가 잔치를 베품.
회곡촌(檜谷村):고려 충열공 김방경(金方慶)이 정자를 짓고 우거.

문극공 정오(鄭䫨)와 대사간 정포(鄭誧)가 외가를 따라 정착.
수동촌(水東村):군수 김집(金緝)이 정착.
하단지촌(下丹地村):지평 권임(權任)과 현감 조맹문(趙孟文)이 정착.
소야촌(所夜村):하원(河源)과 판서 권인(權靷)이 정착.
금지촌(金地村):사복정 배상지(裵尙志)와 김성일(金誠一)이 우거. 이종준(李宗準)•권예(權輗)가 출생
가야곡촌(佳野谷村):절충 강희철(康希哲)이 살면서 정자를 건립.
저전촌(苧田村):정사신(鄭士信)이 정착.
이송천촌(二松川村):사직 남치공(南致恭)과 생원 김학손(金鶴孫)이 정착.
거진촌(巨津村):진사 신내옥(辛乃沃)이 정착.
<府北>
서가현촌(西可峴村):전리판서 남휘주(南輝珠)와 직강 이봉춘(李逢春)이 정착.
천동촌(泉洞村):판회령부사 남우량(南佑良)이 별장을 건립. 생원 권대기(權大器)가 정착
주촌(周村):군기시부정 이운후(李云侯)와 후손 현감 이정회(李庭檜)가 이어서 정착.
마곡촌(麻谷村):김팔원(金八元)이 정착.
마암촌(馬巖村):첨정 정두(鄭枓)가 정착. 아들 사성(士誠)•사신(士信) 형제가 관직에 진출.
대동(大洞):생원 손흥례(孫興禮)가 정착.
도기촌(道岐村):좌랑 정약(鄭若)과 생원 권사빈(權士彬)이 정착. 권사빈의 장자 의(檥)가 이어 살았고 차자 벌(橃)이 출생
도답촌(刀畓村):진사 이재(李宰)와 도사 정전(鄭佺)이 정착.
<臨河>
천전촌(川前村):증판서 김진(金璡)이 정착.
박곡촌(朴谷村):염흥방(廉興邦)이 별장 건립.
인덕촌(仁德村):효자 김정일(金精一)의 정문(旌門)이 있음.
도목촌(桃木村):증참판 배천석(裵天錫)이 정착. 아들 삼익(三益)이 임연대(臨淵臺)를 지음
아촌(莪村):벽동군수 권시좌(權時佐)가 정착.
기사촌(棄仕村):고려 사간 권정(權定)이 우거. 직장 우홍균(禹洪鈞)과 현감 박구(朴球)가 정착
<豊山>
상리(上里):정승 권진(權軫)이 우거. 효자 김시좌(金時佐)와 선비 권순(權詢)이 정착
하리(下里):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가 우거. 찰방 조안도(趙安道)와 진사 이숙인(李淑仁)의 가문이 정착.
하회촌(河回村):전서 배상공(裵尙恭)과 전서 류종혜(柳從惠)가 정착. 종혜의 6세손 중영(仲郢)과 아들 운룡(雲龍)•성룡(成龍)이 정착.
신성포촌(申城浦村):직학 홍지경(洪之慶)이 정착.
사지촌(笥池村):효자 김세상(金世商)이 정착.
지곡촌(枝谷村):참의 권백(權栢)이 정착.
원당촌(圓塘村):진사 권경현(權景絢)이 정착.
연지동촌(蓮池洞村):생원 안경로(安景老)가 정착.
도왕동촌(道旺洞村):관찰사 김연(金緣)이 정착.
구담촌(九潭村):상주목사 권집경(權執經)이 정착.
만운촌(晩雲村):선비 송여원(宋汝源)이 만오(晩悟)라 개칭.
신촌(新村):상호군 남융달(南隆達)이 정착.
서미동촌(西美洞村):류성룡(柳成龍)이 우거하며 이화동(梨花洞)으로 개칭.
오미동(五美洞):부제학 김양진(金楊震)이 정착
<甘泉>
산동촌(山洞村):생원 권건남(權乾男)이 정착.
상석남촌(上石南村):김팔원(金八元)이 출생.
홍현촌(虹峴村):생원 권극상(權克常)이 정착.
천전촌(泉田村):선비 남윤선(南胤先)이 정착.
진작촌(眞勺村):현감 권심언(權審言)이 우거.
<柰城>
광평촌(廣坪村):진사 남기수(南麒壽)가 정착.
유곡촌(酉谷村):충정공 권벌(權橃)이 정착.
탑평촌(塔坪村):대사간 정유일(鄭惟一)이 정착.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가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특정 촌락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 인물들 대부분은

전통적인 안동지방의 토성이긴 하나 주로 조선시대 인물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촌락에서 태어나거나 정착•우거 등을 통해 관련을 갖는다고 해서

곧바로 동족부락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동족부락의 형성이란 입향조(入鄕祖)가 처음 입거(入居)한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이 대대로 같은 장소에 계속 살게 됨으로써 동족의 세거지로 정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동족부락의 형성은 그보다 훨씬 뒤의 시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같은 의미의 동족부락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이후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입향조로부터 시작해서 자손들이 같은 촌락에 살면서 동족부락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야만 했다.

이러한 점에서 재산상속의 관행상 동성동본이 같은 부락에 대대로 거주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고려말 이래 조선전기에는 동족부락이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아들•딸, 또는 친손(親孫)•외손(外孫)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산의 상속은 자녀균분(子女均分)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는 친가(親家)를 중심으로 하여 외가(外家)와 사위가 같은 부락에 거주하거나

양자(養子)가 일반화하지 않아 남자가 장가를 가서 처가살이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따라서 사위가 부모의 터전을 이어받는다거나 외손봉사(外孫奉祀)의 경우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풍산 류씨의 동족부락으로 알려진 하회(河回)마을도

처음부터 동족부락으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녀균분 상속제라는 관행으로 인해 여러 성씨가 함께 거주하는 이성잡거촌(異姓雜居村)의 면모를 띠고 있었다.

안동시내 전경(1916년 이전)

사진 왼쪽에 우뚝 솟은 기와 건물이 태사묘 인데

그 앞에 조흥은행 건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1916년

이전의 것으로 추측된다.

 

 

 

▼안동시내 전경(1916~1920년)

가운데 보이는 사각뿔 지붕을 한 건물이 현재의 조흥은행(신한은행) 안동지점이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넓은 평지는 현 당북동 .태화동 일대로

아직 집들이 들어서지 않은 듯 하다.

 

 

 

▼안동 본정동

일제강점기 안동의 최대 번화가로

조흥은행(신한은행)에서 목성교 방향으로 본 사진이다.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려있고, 오른쪽으로 남탕 .여탕을 가리키는 목욕탕이 보인다.

 

 

 

▼일본군 수비대본부

일제강점기 안동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수비대본부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은행 안동지점(1916년 이후)

현재 조흥은행(신한은행) 안동지점 앞의 모습이다.

벽돌 건물인 은행 앞에 21번 번호판을 붙인 자동차가 서 있다.

뒤로 목성 산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안동의 거리 풍경

일본풍의 목조건물이 길 따라 들어서있다.

거리 폭의 규모로 봐서는 현재의 화랑로 어딘가로 추정된다.

길은 넓은데 비해 다니는 차는 보이지 않고 다만 짐꾼이 힘겹게 수레를 끌고 있다.

 

 

 

▼영남산 기슭에서 본 시내

가운데 나무가 우뚝 솟아 있는 곳이 구 군청 자리로서,

신축중인 군청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안동향교 전경

일제강점기 안동향교의 모습이다.

안동향교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훼손되었고.

현재 그 자리에는 안동시청이 들어서 있다.

 

 

 

▼예안 부포마을 (1935년)

예안 부포 이중진(李中進)의 회갑일(1935.2.9[음])을 맞아

잔치집에 하객들이 가득 모여 있고

앞길에는 일본식 가마가 곧 출발하려 한다.

 

 

 

▼ 풍산들(1939년6월14일)

풍천면 가곡에서 도열병 방제작업을 하고 있다.

뒤로는 화산과 풍산들이 보인다.

 

 

 

▼남후면 고상 흠리 전경

남후면 고상 흠리 마을 전경사진이다.

가파른 민둥산 아래 빽빽이 들어서 있는

초가 집들이 당시 이 마을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안동사범학교 신축모습(1948년)

뒤에 보이는 민둥산이 영남 산이고,

왼쪽에 보이는 기와 건물이 안동 향교이다.

지금 이곳에 안동시청이 들어서 있다.

 

 

 

▼임청각 전경 1

오른쪽에 임청각 앞을 막 지난 기차 뒷 꽁무니가 보이고,

그 옆에 신세동 7층 전탑이 보인다.

 

 

 

▼임청각 전경 2
임청각 뒤에 보이는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고,

전신주만이 앙상하게 서 있다.

왼쪽 앞에 개목나루가 보인다.

 

 

 

▼암산굴과 미천
일제가 안동-대구 간 국도를 건설 하면서 뚫은 암산 굴을

막지나온 자동차와 미루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부종대 부근 전경
현 영창피아노 주위이며, 예전에 시장이 있던 곳이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는지 겹겹이 둥글게 모여 뭔가에 열중하고

사진 왼쪽의 철골은 화재가 발생할 경우 종을 치는 불종 이 달렸는데,

불종대가 부종대로 변한 것 같다.

 

 

 

 

출처: 재경안동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와룡/이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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