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53)
초선(하)
" 초선이 !
말을 안 하기로 내가 그대의 마음을 모르리오 ?
너무 슬퍼 말고 나를 기다리오."
"첩이 무슨 면목으로
장군 같은 영웅을 모실 수 있사오리까."
"나는 그대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으니
염려 말고 조금만 기다리오."
"정말 그러시다면 저를 하루속히 구해 주소서."
"내가 이승에서 그대를 구해주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영웅이라 불리리오.
그러나 오늘은 늙은 도둑의 의심을
샀다가는 안 되겠으니 다시 돌아가 봐야겠소.
내가 불원간 그대를 구해낼 것이니 당분간 기다려 주시오."
"그건 안 되옵니다.
장군께서 태사를 그렇게나 무서워하신다면
무슨 방도로 첩을 구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
차리리 연못에 뛰어들게 그냥 놓아 두시옵소서."
초선은 여포의 손을 뿌리치고 또다시 연못으로 뛰어 들려하였다.
"염려말고 조금만 참고 있으라니까...
내 반드시 그대를 구해 준다니까 ..."
여포는 그러면서 다시 돌아가려고 하자,
초선은 원한이 가득찬 시선으로 여포를 바라보며 이렇게 원망하는 것이었다.
"첩은 장군을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으로 믿었더니,
늙은 도둑을 이처럼 무서워 하시는 줄은 정녕코 몰랐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대로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여포는 적이 민망하고 무안하여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동탁이 정자로 성큼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
그는 여포가 별안간 없어진 데 의심을 품고 초선을 찾아온 것이었다.
동탁은 여포가 초선이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눈에서 불이 일어날 것같이 소리를 질렀다.
"이 죽일 놈아 !
네 놈은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느냐 !"
동탁은 고함을 지르며,
정자 난간에 세워 놓은 화극을 들어 여포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포는 나는 듯이 정자를 벗어났다.
동탁은 여포의 뒤를 쫒아가며 화극을 냅다 던져버렸다.
그러자 여포는 날아오는 화극을 손으로 쳐버리고,
쏜살같이 후원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동탁이 다시 화극을 집어들고 여포의 뒤를 쫒으려는데,
이유가 후원으로 들어서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태사 !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
"여포란 놈이 내 애희를 희롱하니,
그놈을 죽여 없애 버려야 하겠다 !"
"태사님 ! 진정하시옵소서.
그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이옵니다.
여포의 목을 자르는 것은 태사님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옵니다."
"불의의 짓을 하는 놈을
그냥 두고 보란 말이냐 ?"
"안 됩니다.
태사께서는 지금 당신 한 분의 감정으로 분노하시고 계시지만,
저는 지금 태사의 장래를 위해 간언(諫言)을 올리는 것이옵니다.
옛날에 이런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
이유는 흥분한 동탁의 노기를 가라앉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 옛날 초(楚)나라 시절 장왕(莊王)은 어느날
국가의 공로가 많은 무장(武將)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연회를 크게 베푼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연회의 흥취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에
별안간 바람이 불면서 등불이 모두 꺼져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
장왕은 빨리 불을 켜라고 말했으나
무장들은 불이 없는 것이 오리려 흥취가 있다고 떠들어대었다.
그 자리에는 장왕이 총애하는 궁녀 하나가
무장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따르느라고 특별히 나와 있었는데,
어느 장수 하나가 불이 꺼진 어두운 틈을 타서 장난삼아
그 궁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크게 놀란 궁녀는 소리를 지르며
그 장수의 갓(笠)끈을 낚아채 가지고 장왕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해 바쳤다.
그리고 장왕의 무릎위에 엎드려 울면서 말하였다.
"지금 저에게 욕을 보인 사람은 바로 이 갓끈의 주인공이옵니다.
그러니 어서 불을 밝히시고 그 사람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갓끈이 없는 사람이 범인이옵니다."
궁녀는 자신의 절개가 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영명한 장왕은 노여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어둠 속에서 무장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나의 총희(寵姬)가 나에게 부질없는 부탁을 하고 있으나,
오늘밤 연회는 여러 무장들을 위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오.
지금 한 장난은 취중에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처럼 유쾌한 장난을 해 준 것이
오히려 나는 기쁘다는 말이오.
그러니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기 보다는
지금 연회의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러 무장들은 지금부터 다 같이 갓끈을 끊어 버리고
오늘밤을 마음껏 즐기도록 합시다."
장왕의 이같은 지혜로운 처사 덕분에
범인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해 뒤에,
장왕은 진(秦)나라의 대군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멀리서 장수 하나가 급히 달려오더니,
장왕을 호위해 가며,
전신에 상처를 입으면서 적과 결사적으로 싸워서
장왕을 구출한 뒤에 땅에 쓰러져 버렸다.
그는 장웅(蔣雄)이라는 장수였다.
"나는 장군의 덕택으로 극적으로 죽음을 면하였소.
그런데 어떤 까닭으로 이처럼 목숨을 걸고 멀리서 달려와 주었소 ?"
그러자 장웅은 죽음을 눈앞에 맞으면서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전날 대왕께서 베풀어 주신 연회에서
대왕의 총희에게 입을 맞추었던 사람이옵니다.
그날 밤 대왕께서 지혜로운 총명으로 저를 용서해 주셨으니
제가 성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
장웅은 그렇게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후에 세상에서는
그 일을 절영지희(絶纓之會)라고 부르옵니다.
바라옵건데 태사께서도 여포 장군에게 장왕과 같은 관용을 베푸시옵소서."하고
말하였다.
동탁은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닫는 바 있었던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잘 알았네.
그러면 나도 여포를 용서하고, 다시 노하지 않겠네."
동탁은 그 길로 내실로 들어와 초선을 불렀다.
"너는 어찌하여 여포와 사통을 하였느냐 ?"
초선은 울면서 대답한다.
"여포 장군으로 말하면 태사님의 양자이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줄 아옵고 여 장군을 무심히 대했사옵는데
여 장군이 오늘은 화극을 들고와
저를 억지로 봉의정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
설마 태사님의 양자인 여 장군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음 ...
이미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나는 너를 여포에게 돌려줄까 하는데 네 생각을 어떠냐 ?"
그러자 초선은 동탁의 무릎위에 쓰러지며 목을 놓아 운다.
"첩이 이미 귀인를 섬기게 되었는데
이제 종놈의 첩이 되라 하오시니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런 욕은 못 보겠습니다."
초선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벽에 걸려 있는 보검(寶劒)을 떼내어
목을 찔러 죽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동탁은 크게 놀라,
초선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초선은 방바닥에 그대로 엎어지며 통곡한다.
"첩이 이제사 모든 사정을 죄다 알았습니다.
이유라는 자가 여포의 부탁을 받고
태사님께 그런 진언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유와 여포는 태사님이 안 계실 때에는
언제나 소근소근 밀담을 나누었으니까요.
그러실 것입니다.
태사님은 저같은 계집보다는 역시 이유와 여포가 소중하실 것이니까요.
첩은 이런 농간에 한 가운데로 저를 몰아 넣은 이유와
여포란 놈을 생으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겠사옵니다."
"음 .... 염려 마라 !
그런 말은 농담에 불과하였고,
내가 너를 설마 버릴 수야 있겠느냐."
"아무리 태사님이 그런 생각을 품고 계시더라도
제가 여기 이대로 있다가는 여포의 손에 목숨을 뺏기고 말 것이 분명하옵니다."
"염려 마라 !
내가 내일은 너를 데리고 미오성 으로 가기로 하겠다.
그리로 거처를 옮겨가서 내 뜻대로 되면
너를 황제의 귀비(貴妃)로 만들어 줄 것이고,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에게 한평생 부귀와 영화를 누리도록 해 주겠다."
초선은 그제서야 눈물을 거두고 동탁의 품에 안겨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었다.
54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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