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21)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듯 우뚝 솟아있네]
'통천'에서 '안변'까지는 이백 오십리라 했다.
하루해가 또 저물었다.
어둠발이 내리기 시작할 때가 나그네에게는 제일 외로운 시간이다.
김삿갓은 아무 집이나 들어설 양으로 조그만 마을로 들어갔다.
첫눈에 가난한 마을이라 생각되었다.
세상은 참 고르지 않다.
소슬대문에 하인까지 두고 거드름 피우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찌그러져 가는 집에서 겨우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헌데 김삿갓이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으로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 사는 사람이 더 많고
인심을 쓰는데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 사는 사람들이 더 좋았다.
김삿갓은 오막살이 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방안에서는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는 호롱불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인장 계십니까?"
"뉘시오?"
방안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뒤이어 방문이 열리면서 오십세 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목을 빼고 쳐다본다.
"나그네가 어둠을 만나,
미안하게도 하루밤 신세를 지었으면 합니다."
"허허,
우리 집에도 손님이 오실 때가 있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주인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김삿갓은 일례를 보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시는 손님이시오?"
사람 좋게 생긴 주인이 삿갓을 보고 물었다.
"먼 길을 가시는구료.
참 저녁은 아직 자시지 않았을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주인은 방 한쪽 구석에서 실타래를 감고있던 마누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누라는 그림자 처럼 소리없이 밖으로 나갔다.
"두 양주분만 계시오?"
"아들 하나하고 며느리가 있지요.
이곳은 어촌도 아니고 농사지을 땅도 별로 없는 곳이라
살기가 참 곤란한 곳이지요."
"아 네,
그렇군요"
삿갓은 주인장의 이곳 형편을 듣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보았던 빈촌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김삿갓과 마주보고 있는 주인장도 말이 없고 삿갓도 이렇다니 말이 없이,
두 사람은 묵묵히 등잔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부스럭 부스럭 나뭇단을 풀어 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얼마후 밥상이 들어왔다.
간단한 저녁상이었다.
조밥이 한그릇, 된장찌개에 김치 한보시기가 전부였다.
김삿갓은 몇번씩이나 치하를 한후 수저를 들었다.
언젠가처럼 이집에서도 주인 내외와 같이 한방에서 잘수밖에 없었다.
불을 끄고 누웠으나 잠은 금방 오지 않았다.
아랫목 쪽에서는 주인 내외의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손님이 자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여보,
손님이 오셨는데
저녁은 그렇게 대접 했다 손 치고,
아침은 어떡하지요...?"
부인의 말이었다.
"글쎄,
우리같은 집에 손님이 찾아 와준것 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아침에 조밥을 드릴수야 있나,
박초시네 집에 뭐라도 맏기고 쌀 되라도 얻어 올수는 없을까...? "
"뭐가 있어야지요.
두루마기 하나 변변한 것 없는데
그나마 며느리가 입고 가고 없으니 어떡한데요."
"음,
정 선달네 집에 날이 새거든 가봐요.
손님이 왔다고 사정하고 쌀 한되만 꿔봐요."
이들의 이야기를 어두운 방에서 듣고있던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애처로울 정도로 그들의 인정이 따스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른 새벽,
김삿갓은 소피를 보러 가는척 하고 주인 내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밖으로 나왔다.
어젯밤 그들의 이야기를 못 들었다면 모를 일이되,
알고 있으면서 밥을 얻어 먹을수는 없었다.
초겨울,
차가운 새벽 바람을 쏘이며
정처없는 발 걸음을 옮겨놓는 김삿갓, 저절로 싯귀가 읊조려졌다.
반중무육권귀채, 주중핍신화급리
(盤中無肉權歸菜, 廚中乏薪禍及籬)
<밥상에는 고기대신 채소가 뽐을 내고,
부엌에는 땔감이 없으매 화가 울타리에 비친다>
부고식시동기식, 출소부자역이행
(婦姑食時同器食, 出所父子易衣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그릇 밥을 먹고,
출타할 때는 부자가 서로 옷을 바꿔 입는다>
아침도 굶은채 그는 한나절을 꼬박 걸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길가에는 인적이 없었고,
멀리 산아래로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족히 이십여리는 걸어가야 될것 같았기 때문이다.
걸으며 날짜를 꼽아보니 시월 하고도 그믐이었다.
"허,
내일부터 동짓달이로구나...!"
날짜를 꼽아본들 무었하랴 싶지만,
한편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동짓달, 이제 평지에도 눈발이 날릴 것이다.
또한 살을 에이는 바람도 몰아칠 것이다.
김삿갓은 공허한 마음으로 산천을 휘돌아 보았다.
산도 들도 텅텅 비어있었다.
언제 내렸는지 먼 산 봉우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다정다감한 시인의 가슴에는 시심이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물들었다.
엽락척용설만두, 세여천탱 흘연부
(葉落瘠容雪滿頭, 勢如天撑屹然浮)
<잎은 져서 앙상하고 눈은 봉우리에 가득한데,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듯 우뚝 솟아있네>
여령나립아해사, 혹자중간 선학유
(餘嶺羅立兒孩似, 或者中間仙鶴遊)ㅇ
<그 아래 봉우리는 아이 인양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어떤 봉우리에 선 '학'이 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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