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쌀자루

오토산 2022. 1. 25. 15:34

 사랑방이야기(306)

 쌀자루

칠전팔기를 믿었는데 류 초시는 과거에 또 낙방했다.
부인 절곡댁은 우물가에서 세수하며 눈물을 감췄다.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데 시아버지 제삿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들 욱이가 고개 너머 저잣거리 포목점에 가서 기웃거리다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여자에게 기어드는 목소리로 “오늘은 바느질거리 없어요?”라고 묻자
“요즘은 잔칫집이 없구나” 하는 주인 여자의 말에 꾸벅 절을 하고선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양식 독이 바닥난 날, 절곡댁은 아기를 업고 욱이 손을 잡고 삼십리 길을 왔건만,
친정집 사립문 앞에서 한숨을 몇 번이나 쉬고서야 마당에 들어섰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나 친정이지, 올케가 곳간 열쇠를 차고 있는 오라버니 집은 그냥 먼 친척 집이나 다름없었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망설임 끝에 입을 떼 쌀 다섯되를 얻었다.
그 쌀을 자루에 담아 집으로 향했다.


올 때 그렇게 힘들었던 발걸음이 집으로 돌아갈 때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여섯 살 욱이는 쌀밥 먹을 생각보다 어미 얼굴이 확 펴진 게 좋아서 신이 났다.
“엄마, 내가 들고 갈게요.”
쉬어 가느라 길섶에 놓았던 쌀자루를 욱이가 두 손으로 잡고 등에 얹어 뒤뚱뒤뚱 걸었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욱이의 뒷모습을 보고 절곡댁이 가슴을 졸였다.
젖을 거두고 욱이를 따라잡으려 잰걸음을 걸었지만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한 식경을 헐레벌떡 걸었는데도 욱이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이웃 고을로 가는 삼거리에서 욱이가 나타나 “엄마 여기서 기다려!” 공기가 찢어질 듯 고함치고는
빈 몸으로 달려 산허리를 돌아 사라졌다.


얼마나 기다렸나, 어둠살이 내릴 때야 돌아온 욱이는 눈물 콧물 범벅이 돼 제 어미 치마에 파묻혔다.
목이 잠겨 칵칵거리며 한 얘기인즉슨, 쌀자루를 메고 힘겹게 고개를 오르던 욱이에게 웬 아저씨가
친절하게도 쌀자루를 들어주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단다.
기다리라 말하고 욱이가 길가에서 소피를 보는데 그 아저씨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만치 앞서가던 그 사람이 삼거리에서 다른 길로 접어들며 걸음이 빨라지더니 산허리를 돌자 종적을 감춘 것이다.
절곡댁은 분함과 설움에 북받쳐 흐느끼는 욱이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천만다행이다.
쌀이야 또 구하면 되지만 우리 욱이 잃어버리지 않고 이렇게 어미 품에 안겼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욱이는 어미 치마에 파고들며 더 크게 울었다.
열두 해가 흐르는 사이 수많은 일이 명멸했다.
욱이는 과거에 인생을 걸지 않기로 어미와 굳게 약속했다.
화가 밑에서 사군자를 치며 혼신의 열정을 바쳐 어엿한 화가가 됐다.
절곡댁의 바느질 솜씨가 소문나 주문이 끊이지 않자 집안 형편이 많이 펴졌다.
열두 해가 지났건만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은 욱이 가슴속에 응어리진 쌀자루였다.
오른쪽 귀밑의 점 하나!
그놈!


이웃 고을 장날마다 장터를 헤매기 어언 열두 해, 마침내 그놈을 찾았다.
자수 가게에서 나오는 그놈은 열두 해 풍상에 얼굴은 늙었지만, 귀밑의 점은 그대로 박혀 있었다.
열여덟 살 욱이는 당장 그놈의 멱살을 잡고 장바닥에 패대기쳐 품속의 칼로 목을 따고 싶지만 계속 큰 숨을 쉬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날이 저물었다.
그놈을 미행하며 고개 너머 그놈의 집을 알았다.
뒤꼍으로 스며들어 봉창 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봤다.
그놈의 딸인 듯한 처녀가 자수를 놓다가 그놈이 사온 오색 실타래를 받아들고 함박웃음을 짓고, 어미는 저녁상을 차려 왔다.


욱이는 그림 그리는 일도 접고 이웃 고을로 가 그놈의 집 주위를 배회하는 게 일이 됐다.
어느 날, 그놈과 마누라가 잔칫집에 가는지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욱이가 스며들었다.
자수를 놓다가 놀라서 벽을 등진 그놈의 딸 목에 칼을 들이댔다.
욱이는 열두 해 전 쌀자루 얘기를 자세하게 하며 바드득바드득 이를 갈고 칼로 방바닥을 찍었다.
그녀는 울었다.
“니 아비를 가장 괴롭히는 건 이것이야.”
욱이는 칼로 그녀의 옷고름을 싹둑 잘라냈다.


한해가 지난 어느 날 동이 틀 무렵,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욱이 어미가 밖으로 나가
사립문 앞에서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두어 달 된 아기를 안자 따듯한 무언가가 절곡댁 가슴에 전해졌다.
아기가 생글생글 웃었다.
처음 본 얼굴이 아니었다.
동네방네 젖동냥을 다니노라면 욱이를 빼닮았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욱이를 앉혀놓고 다그쳤다.
“철썩!”
절곡댁이 욱이 따귀를 갈기며 “쌀자루를 빼앗아 간 그 사람보다 네놈이 더 나쁜 놈이야!” 하고 고함을 치고선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욱이도 꿇어앉아 울었다.


백로가 지난 상큼한 가을날, 절곡댁 마당에 차양을 치고 혼례식이 치러졌다.
신부 아버지는 오지 않았지만 일가친척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신부는 예쁘고 착했다.
절곡댁 집안에서 이제껏 세상에 없던 특별한 옷을 선보였다.
절곡댁이 빼어난 솜씨로 비단옷을 짓자 화가인 욱이는 치마에서 뻗어 나간 화사한 매화가 저고리까지 오르도록 그림을 그리고,
새 며느리는 자수를 놓았다.
소문이 퍼져 혼사를 앞둔 사대부 집안에서 들어온 주문이 여섯 달치나 밀렸다.

 

'시링빙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쩐의 흐름  (0) 2022.02.06
아버지  (0) 2022.01.25
황간 댁 사연  (0) 2022.01.25
비구니 혜원과 거지 막동이의 가족 만들기  (0) 2022.01.25
왕과 심마니  (0)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