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비구니 혜원과 거지 막동이의 가족 만들기

오토산 2022. 1. 25. 15:12

사랑방이야기(297)

비구니 혜원과 거지 막동이의 가족 만들기


조그만 비구니 사찰 <울림사>에도 초파일에는 사람들이 제법 찾아왔다.
다섯 비구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막내인 열다섯살 사미니 혜원은 종종걸음으로 해우소에 다녀오다가 거지 아이에게 시선이 꽂혔다.
절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일주문 기둥에 등을 기대고 산을 향해 쪼그려 앉아 있는 거지는 혜원을 보자 고개를 돌렸다.
산들바람에 깜박 잠이 들었다가 얼마 만에 깨어났나,

거지 아이 앞에 삼베 보자기가 펼쳐져 있고, 떡과 약밥·유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주문에 몸을 숨기고 정신없이 먹었다.

초파일이 지나고 한장 터울이 지난 어느 날 밤,

비구니 혜원이 초롱을 들고 해우소를 가는데 모깃소리만 하게 “스니임” 하고 누가 불러 깜짝 놀라 돌아봤더니 그 거지 아이였다.
뭣인가 내밀어 받아들자 그 거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혜원이 요사채 자기 방에 가서 베 보자기를 풀었더니 깨엿 세개가 들어 있었다.
가슴이 콱 막히고 눈물이 났다.

몇달이 흘렀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거지 아이가 개울에서 또래들과 발가벗고 멱을 감고 있다가,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미니를 보고 벗은 몸을 숨겼다.
아랫도리만 걸치고 다리로 올라가자 혜원은 무쭐한 음식 보따리를 거지 아이에게 건네줬다.
거지 아이와 사미니는 뚝방에 나란히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게 됐다.
거지 아이 막동이는 유복자로 태어나 젖을 떼자마자 어머니가 어디론가 사라져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일곱살 때 할머니가 죽자 다리 밑으로 가 거지가 됐다.
사미니 혜원도 강보에 쌓인 핏덩어리로 울림사 일주문 앞에 버려져 주지스님이 주워다 이날 이때까지 기른 것이다.
사미니는 열다섯, 막동이는 두살 아래 열세살이었다.
사미니는 남동생을 얻은 것 같았고, 막동이는 누나를 만난 것 같았다.

남매 같은 두사람은 가끔씩 만났다.
막동이는 틈만 나면 대장간에 달려갔다.
풀무질만 하다가 열다섯이 되자 목울대도 튀어나오고 팔 근육도 붙어 벌겋게 단 쇠를 망치로 두들겼다.
막동이는 다리 밑에서 나와 대장간으로 거처를 옮기고 얼마 만의 새경도 받게 됐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이 되자 막동이는 열여섯, 사미니 혜원은 열여덟살이 됐다.
어느 날 밤, 주지스님이 사미니를 불러 앉혀놓고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혜원아, 강보에 싸인 너를 내 품에서 키워 이제 처녀가 됐구나.
우리 절에 부모가 자식들 손을 잡고 올 때, 네가 넋을 잃고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졌다.
너는 여기서 불심을 닦을 게 아니라 가족 품에 파묻혀야 하느니라!”
그러자 혜원은 눈물이 글썽한 얼굴을 들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소승은 여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게 무슨 가족이….?”
주지스님 왈,
“가족은 만들면 되는 법이야.”

사월초파일이 지나고 울림사에서는 눈물바다를 이룬 혼례식이 치러졌다.
신부는 사미니 <혜원>이고, 신랑은 <막동이>였다.
눈물을 뿌리며 울림사를 떠나는 신랑·신부 에게 주지스님은 전대를 채워줬다.
대장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림을 차렸다.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고 꽃 같은 딸을 낳았다.
어느 날 저녁, 보글보글 된장을 끓여 밥상을 차려놓고 대장간일을 마치고 집으로 온 막동이 등목을 하고

딸은 혜원이 젖을 물리고 아들은 아빠 무릎에 앉아 밥을 먹다가 혜원이 눈물을 흘렸다.
“이게 정녕 꿈은 아니지요!”
막동이도 목이 메었다.

장날,

대장간에서 만든 물건들을 갖고 주인 따라 장에 갔다 온 막동이가 말했다.
“웬 허름한 노인이 ‘나를 사가시오. 단돈 열냥’ 이런 팻말을 등에 붙이고 온종일 장터가에 앉아 있지 뭐요.
옆에 목발이 놓여 있는 걸 보니 절름발이인가 봐요.”
다음 장날에도 그 절름발이 노인은 그 자리에 거적때기를 깔고 앉아 있었다.
막동이가 열냥을 노인에게 쥐여주고 부축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혜원이 버선발로 나와 노인의 두 손을 잡고
“저희는 부모를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버님>이라 불러보는 게 소원입니다.
아버님이 돼 주십시오.”
노인이 눈물을 떨구며, “나는 늙었고 절름발이요” 라고 하자,

내외는 “저희가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그저 아버님 만 돼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내외와 그 노인은 한집에서 살게 됐다.
아들딸들도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품에 안겼다.

석달이 지난 어느 날,

노인이 “아범아, 오늘은 나하고 어디 가야겠다”며 목발을 집어던지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눈이 왕방울만 해진 막동이가 따라나서며 물었다.
“아버님, 어, 어, 어디 가시게요?”
오십리길을 단숨에 걸어 대처 대궐 같은 기와집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인들이 나왔다.
노인이 “내 아들이다!” 하자, 하인들이 막동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노인은 "만석꾼 부자"였다.
한평생 자식이 없어, 아버지·할아버지 소리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막동이네 식구들이 이 집으로 이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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