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고향가는길, 오애청산도수래

오토산 2022. 1. 31. 07:46

김삿갓 73 -

[고향가는길, 오애청산도수래(吾愛靑山 倒水來)]

신계에서 곡산까지는 높고

가파른 산길로 백여리를 가야 한다.
김삿갓이 어린 시절을 보낸 천동 마을은 곡산 읍내에서도

다시 산속으로 60여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첩첩 산중,

감둔산 (甘屯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곡산으로 가는 길 조차 산이 높고 길이 험해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천동 마을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지루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김삿갓은 눈 앞에 펼쳐지는 산천을 정답게 바라보며

걸어가다가 문득 구양수의 시를 떠 올렸다.

산빛은 멀고 가까움에 다름이 없어
하루 종일 산만 보며 걸어 가노라
보이는 봉우리 모양은 제각기 다르고
그 이름조차 나그네는 알 길 없어라.

고향이 가까워져가자 김삿갓은 험한 산길을 걸어가면서

30여 년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철부지 시절,

해 지는줄 모르고 즐겁게 뛰놀며

장난을 치던 불알 친구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

천방 지축으로 까불대던, 까불이는 지금은 철이 들었겠지..

머리통이 유난히 컷던 대갈장군은 아직도 천동 마을에 그대로 살고 있을까 ?
또,합죽이, 막동이와 땡굴이, 땅꼬마는 지금은 애 아버지가 되어 있겠지..

 

옥수수 처럼 얼굴이 길쭉해서 불렸던 옥쇄기는

지금 보게 되더라도 금방 알아 볼 것 같고,

조조와 참새, 제제는? 계집애들 꽁무니를 아직도 쫒아 다니고 있을까 ? ..

예쁘장 했던 곱단이는 애 엄마가 되어 있겠지,

얼굴이 넙적해서 세숫대야로 불리던 계집애는 애는 몇이나 낳고 살고 있는지 ?
말을 할때 마다 고개를 살랑살랑 젓던, 부채는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겠지 ..)

본명은 잊어버렸지만 아명(兒名)만으로 도

그들의 얼굴과 뛰놀던 모습이 눈 앞에 떠올라서 김삿갓은

흐뭇하기 그지없는 고향가는 길이었다.

산길은 가도가도 끝이없이 이어졌다.
곡산이 심심 산골임을 모르는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찾아와 보니 너무도 깊은 산골이었다.
김삿갓은 깊은 산속을 마냥 걸어가며, 문득 영월에 계실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철없는 자식들을 죽음에서 구해 내려고

첩첩 산중으로 둘려싸인 곡산으로 도망을 오셨던 것이 아니었던가.

 

(철없는 우리 형제를 곡산까지 데리고 오시느라고,

어머니는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그 일을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 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를 회상해 본들 무슨 소용이랴.)

김삿갓은 오늘날 어머니 슬하를 떠나, 방랑길을 떠도는 것 조차도,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업보이고 숙명이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산속으로 깊이 들어 갈수록 주위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간간히 새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적막감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한없이 걸어가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이제는 잠자리를 구해야 할 판이건만, 도데체 인가는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를 더 가다 보니, 저 멀리 나무 그늘에 말 한 마리가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말이 있다는 것은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이기에, 김삿갓은 안심하고 다가갔다.
김삿갓이 가까이 다가가자 누워 있던 말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몸을 부르르 떨면서 먼지를 털어 낸다.

찬찬히 살펴 보니 어지간히 늙어빠진 말이었다.

그래도 산중에서 사람들과 가까이 생활하는 말을 보니 정다운 마음이 앞섰다.
그리하여 가까이 다가가 말의 콧등을 두두려 주니,

말은 사람의 정을 알아 보았는지, 발굽질을 하며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김삿갓은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말의 등허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늙은 말 (老馬) 이라는 옛 시가 한 수 기억 났다.

늙은 말이 소나무 그늘에 누워 있네
천 리를 달리던 옛 꿈을 꾸고 있는가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 바람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석양이 저물고 있네.

老馬枕松根 (노마침송근)
夢行千里路 (몽행천리로)
秋風落葉聲 (추풍낙엽성)
驚起斜陽暮 (경기사양모)

이렇게 말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삿갓,

산 머리에 초승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도 말 주인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김삿갓 시 한수
깊은 산중에서 갑갑했던 김삿갓은 시 한수를 읊어댓다.

오두막집 저녁 연기는 사라지고
해는 저물어 새는 깃으로 돌아가네
나무꾼은 하늘에 걸린 초승달을 바라보고
어디쯤에서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겠지.

바로 그때,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나무꾼이 나무를 짊어지고 말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나무꾼에게 말을 걸었다.

"늦게까지 수고가 많으시오."
나무꾼은 김삿갓을 보자, 적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산중에 웬 사람이오 ? "

"나는 지나가던 과객이오.

천동 마을에 가다가 길이 저물었는데, 어디서 하룻밤쯤 자고 갈 데가 없을까요 ? "

"천동 마을?

+천동 마을이라면 옛날, 나의 외갓집이 있었는데,

그런 깊은 산골에는 뭣하러 가시오? "
나무꾼은 김삿갓에게 천동 마을과 자신의 연관을 말하면서 경계심을 감춘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천동 마을에서 자랐지요.

그래서 지금 천동 마을을 찾아 가다가 날이 저물었군요."

"그래요 ?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고향이 그리운 것이지요."

"외가는 아직 천동 마을에 계신가요 ? "

"웬걸요.

외조부님 돌아가신후 외가 식구들은 모두,

해주(海州)로 살림을 옮겨버려서 지금은 아무도 없다오."

"그러시군요."

"그나 저나 반갑소이다.

나의 옛날 외가집 마을이 고향이라니..
그리고 이 산골에는 인가라고는 우리 집 밖에 없어요.

날도 많이 저물어서 길을 갈 수도 없을 것이니 우리 집으로 내려 갑시다."

인심이 순박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무꾼은 무거운 지게를 짊어진채로 말은

맨몸으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 하는데,
김삿갓이 옆에서 보기에는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짐을 말에게 실을 일이지,

무슨 고생을 못 해 직접 짊어지고 내려가시오 ?" 하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를 변 서방이라고 말을 한 나무꾼은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 집 말은 너무 늙어서 나는 부려먹을 수가 없다오."
김삿갓은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 하였다.

"아니, 부려먹을 수가 없도록 늙어 버린 말이라면

아예 팔아 버리거나 없앨 일이지, 무엇 때문에 고생스럽게 키운단 말이오 ? "

"그건 노형 생각이지,

나는 그럴 수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단 말이오? "

"말이 동물이기는 하지만,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의리라는 것이 있어요.

저 말로 이를 것 같으면 할아버지때 부터

함께 살아오고 있는 우리 집 식구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많아 밭도 갈지 못하고 짐도 나르지 못하게 되었지만

우리 집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 말에게 은혜를 너무도 많이 져왔다오."

"말에게 은혜를 졌다구요 ? "

"물론이지요.

이 말이 어린시절 부터 젊었던때 까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아주 잘 도와 주어서

오늘날까지, 우리 집이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줬지요.
이렇게 저 말로 하여금 조상때 부터 오랫동안 은혜를 입어 왔으니,

이제는 그 은혜를 나라도 갚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 "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도록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아울러 말 못하는 미물인 동물과 인간의 교감과 신뢰가

어떻게 대를 이어 전해질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한참만에 산을 내려오니, 변서방네 집은 절간처럼 조용하였다.
변서방은 나무짐을 내려놓고, 말을 외양간에 들여매며 말한다.

"공교롭게도 마누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고 없어서,

오늘 밤은 나 혼자예요.

말에게 먹이를 주고 저녁을 지어 올 테니,

방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구려."

변서방은 김삿갓을 방으로 안내하고 등잔불을 켜주었다.
살림 살이라고 방 한복판에 화로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는데

그나마도 마누라가 없는 탓인지, 화로는 불이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한참만에 변서방은 삶은 감자 한 소쿠리와,

네 다리 소반 위에 죽그릇을 놓아 가지고 들어왔다.

"많이 시장하셨지요 ? "

"괜찮습니다.

말에게도 먹이를 주셨나요 ? "

"그럼요,

말도 우집 식구인데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나만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변서방이 들고 온 소반 위에는

 죽이 한 그릇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

 

 "아니, 사람은 둘인데,

죽은 왜 한 그릇만 가져 오셨소 ? "

 

 변서방은 계면스런 웃음을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한다.

 

"나는 평소에도 감자만 먹고 살아요.

그러나 손님에게는 감자만 대접하기가 미안스러워 ,

오늘은 쌀독 밑바닥을 긁어 가지고 죽을 한 그릇 쑤워 왔지요.

그런데 쌀이 몇 알밖에 없어서 ,

죽이란것 조차도 맹물에 조갯돌 삶은것 처럼 되어 버렸군요.

그러니 죽을 자시고 나서 감자를 더 잡수세요."

 

 김삿갓은 주인 양반의 성의가 너무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오가다 만난 사람에게 이처럼 따듯한 정성을 베풀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 것인가.

 

아닌게 아니라 죽그릇을 들여다 보니,

죽이란 것이 정말로 맹물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인 양반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럼 ,

 미안하게도 죽을 혼자만 먹겠소이다."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죽그릇을 아무리 휘저어 보아도 ,

 쌀알이라고는 몇 알갱이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을 자시고 나거든

감자를 더 드세요." 

 변서방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인다.

 

 "고맙습니다.

죽을 다 먹고 나거든 감자를 더 먹지요."

 

김삿갓이 죽을 몇 숟갈 떠먹다 보니 ,

죽은 맑은 물과 같아서,

죽그릇 속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이었다.

 

 ("허어,

정성은 고맙지만 기가 막히는군" ...)

김삿갓은 변서방이 쑤워 온 죽을 한숟갈 한숟갈 떠 먹으면서 ..

다음과 같은 운치 있는 즉흥시를 한 수 읊었다.

 

 사각송반 죽일기 (四脚松盤 粥一器)  <네다리 소반에는 죽 한그릇 뿐인데>

 천광운영 공배회 (天光雲影 共徘徊)      <하늘과 구름이 같이 비치는구나>

주인막도 무안색 (主人莫道 無顔色)<주인은 무안해서 어쩔줄 몰라 하는데>

오애청산 도수래 (吾愛靑山 倒水來)<염려 마시오 나는 본래 물에 비친 산을

사랑 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