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74 -
[드디어 도착한 천동마을. "상편"]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아침을 얻어 먹기 미안해서 변서방의 집을 일찍 나섰다.
밤사이 첫 눈이 내려 발을 뗄 때 마다 뽀드득 소리가 연이어 났다.
(오늘은 드디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리워했던 천동 마을에 가게 되었구나 )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 김삿갓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흥분이 일었다.
그러다보니 눈으로 얼어버린 길도 제법 쌀쌀해진 산 속의 추위도 관심밖의 일이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까맣게 잊어 가던 기억속의 희미한 눈에 익은 산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장난꾸러기 친구들과 어울려
50 리가 넘는 곡산 장거리에 몇 차례 다녀 본 길이 아니던가.
이렇게, 눈에 덮힌 험한 산 굽이를 돌아 갈때 마다 옛날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김삿갓이 산길을 정신없이 한참 걷다보니 문득 눈앞에 장승 한 쌍이 우뚝 마주 보였다.
얼굴과 몸뚱이가 시뻘건 천하대장군과 얼굴과 몸뚱이가 새파랗게 색칠된 지하 여장군이었다.
(아 ! 장승이 아직도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구나 ! )
김삿갓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던 장승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하도 기뻐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 배례를 하였다.
"장승님들!
안녕하시오.
옛날 친구였던 밤나무집 둘째가 천동 마을을 다시 찾아 왔소이다."
장승 !
우리네 조상들은 통일 신라때 부터 고려조와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절에 가는 길목이나 촌락 어귀에 사람들의 우상인 장승을 세워 놓았다.
장승은 시대를 통 틀어서 사찰과 마을의 경계를 가르는 이정표 역할을 해왔고,
동구 앞에 세워 놓은 장승은 모든 악귀와 질병의 침입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때로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천하대장군의 코를 베어다
달여 먹기도 하였고 남몰래 찾아와
간절한 소망을 빌기도 하는 우상인 것이다.
장승앞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며
합장 배례를 하고 있노라니 마침 저 만치서 사십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지게위에 봇짐을 하나 얹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승앞에 서 있던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김삿갓은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들고 다가오는 사내에게 목례를 해보이며 물었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이 동구 안이 천동 마을이 틀림없습니까 ? "
그러자 사내는 김삿갓의 얼굴이 눈에 익은지 대답은 안하고 빤히 쳐다만 보았다.
김삿갓도 사내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보아 온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서로의 얼굴을 잠시 말끄러미 마주보기만 하였다.
"여보게!
자네는 조조라고 부르던 친구 아닌가 !
나는 밤나무집 둘째일세, 자네 나를 모르겠나?"
사내는 그제야 생각이 나는지 김삿갓의 두 손을 힘차게 흔들며 큰소리로 외친다.
"맞다 맞다!
자네는 밤나무집 둘째가 틀림없으렸다?
이게 얼마만인가! 그동안 어디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오는가? "
만나는 첫 순간부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그들이었다.
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도 죽마 고우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삿갓은 조조와 함께 마을로 들어오며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소식을 하나 하나 물어 보았다.
그중에는 이미 죽은 친구도 둘 씩이나 있었지만
대부분 천동 마을에 그냥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자네는 지금 아이를 몇이나 두었는가 ? "
"나는 할 일이 없어서 아이만 만들었네
머슴아와 계집아이를 모두 합해 자그마치 일곱이나 두었다네."
"이 친구 어릴때도
계집 아이 꽁무니를 어지간히 쫒아 다니더니 결국은 자식 복이 넉넉하군그래,
아이를 일곱이나 만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는걸, 하하하."
"이 사람아 !
만들고 싶어 만든 것은 아닐세.
여편네 궁둥이를 두드려 주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거야, 하하하 ...
자네는 아이가 몇이나 되는가 ? "
"나 ? ...
나는 오나가나 내 몸 하나뿐인걸 마누라도 없고, 자식도 없는 외톨박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놓고 떠돌아 다니는 덕분에 자네를 만나게 된 것 아니겠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길어질 것 같아
김삿갓은 적당히 거짓말을 꾸며 대었다.
"그래 ? ...
자네는 어렸을 때 글 읽기를 좋아했기에,
지금쯤은 커다란 감투라도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 "
"글쎄, 운이 닿지 않아서인지, 팔자 소관인지 ?
여간, 내게는 등용문(登龍門)이 열리지 않는구먼."
김삿갓은 이것조차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윽고 30년 만에 천동 마을로 들어서는 김삿갓은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 옛날 고작해야 열 채가 될까 말까 하던 집은,
지금은 얼핏 보아도 20채가 넘어 보였다.
"그동안 집이 많이 늘었네그려."
"그래 ...
자네가 살때 보다는 많이 늘었지?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디 묵을 작정인가? "
김삿갓의 잠자리를 걱정하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어렸을 때 자라던 고향 산천이 그리워 천동 마을을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천동 마을에 일가붙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각별히 기댈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대답을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글쎄 ...
나는 어차피 떠돌이 신세니까,
잠이야 아무데서나 자면 어떤가 ."
조조는 김삿갓의 말을 듣고나서 대뜸 이렇게 말을 한다.
"그래?
그러면 밥은 우리 집에서 먹기로 하고 잠은 모임방에서 자면 되겠네."
"모임방이라니? ...
이 마을에는 그런 것도 있는가? "
"그래!
동네 사람들이 저녁마다 모여서 미투리도 삼고,
새끼도 꼬는 공동사랑방이 하나 있지, 거기에 가면 옛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게야."
"그거 참 잘됐네그려.
나는 옛날 친구들을 만나 보고 싶어 왔거든! "
"자네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나.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에는 마을 사람들을 모임방에 오도록
우리 집 아이를 시켜 사발 통문을 돌려 놓겠네."
조조의 우정이 눈물겹도록 지극 하였다.
이윽고 조조네 집에 당도해 보니 그의 집은 옛날과 다름없이 초라하였다.
"자네 집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일쎄,
이제는 아이들이 많아서 집도 늘려야 하겠구먼."
"허긴 그래, 아이가 하나 씩 생길 때마다
늘려야지 늘려야지 하면서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먼."
"여보 마누라 !
이리 와서 인사드려요.
이 친구가 옛날에 나에게
"조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던 "밤나무집 둘째"라는 친구야."
조조가 자기 마누라를 불러 내 김삿갓에게 인사를 시킨다.
"애기 아버지한테서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애기 아버지에게 조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가,
시아버님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셨다구요 ? 호호호 ."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불현듯 조조의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참, 자네 어르신께 인사를 올려야지,
어르신 어디 계신가 ?"
그러자 조조는 얼굴빛이 별안간 숙연해지며,
"아버지는 이미,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자네가 찾아 온 것은 30년 만이 아닌가."
"뭐야?
어르신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구?"
"그래,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왔구먼 ...."
김삿갓은 일순,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김삿갓이 저녁밥을 먹은 뒤, 조조와 함께 모임방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이미 2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급히 모이라"는 사발 통문을 받고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김삿갓을 모임방 가운데 내세워 놓고 말한다.
"여보게들!
자네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나?
이 사람은 지금부터 삼십 년 전에 우리들의 불알 친구였던 밤나무집 둘째라네! " 하고
소개하자,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알겠네. 내가 땡굴인데, 내 얼굴을 알아보겠나 ?"
"그럼,그럼 !
저기 앉아 있는 친구는 대갈 장군과 옥쇄기가 아닌가? "
김삿갓이, 생긴 모습이 남달라
한 눈에 띄는 대갈장군과 옥쇄기를 가르키자,
좌중에는 "와하" 웃음꽃이 피었다.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소개하며 김삿갓과 제각기 손을 움켜 잡으며
알아보는 통에 김삿갓은 눈물겨운 감격을 느끼면서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개중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나는 초면이기는 하오만, 노형의 말씀을 많이 들었소.
또래 친구들에게 조조니, 참새니 하는 엉뚱한 별명을 지어 주었다가
어른들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 "하고
말하는 바람에, 좌중에는 일시에 폭소가 터지기도 하였다.
김삿갓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이렇게 자기를 기억하고 열열히 환영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하여 자리에 앉으며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오늘처럼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 보기는 처음일쎄,
우리들 모두가 죽지 않고 다시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 인지 모르겠네.
우리네 인간살이에서 우정보다 더 소중한 것이 뭐가 있겠나.
나는 자네들과의 기쁜 재회 함께 나누고 싶어 술이라도 한잔 사기로 하겠네! "
그러면서 개풍 군수 강호동이 몰래 넣어 주었던 전별금(錢別金)중
그동안 쓰고 남은 스무 냥을 송두리째 내놓았다.
그러자 제제가 성큼 앞으로 나앉으며, 김삿갓을 호되게 꾸짖는다.
"야, 임마!
너 정신이 돌았냐?
내일 부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너는 고향을 찾아온 손님이고 우리들은 주인 아니냐!
그러니 손님이 술을 산다면, 주인인 우리 꼴이 뭐가 된단 말이냐.
너를 환영하는 술은 우리가 살테니, 그 돈이랑 썩 집어 넣어라! "
그 바람에 모두들 "옳소!" "옳소! " 하며 박수를 보낸다.
천동 마을에는 대동계(大洞契)가 있어서 경조사를 맞았을 때
서로 도와주는 제도가 있었고 그 계장은 제제였다.
제제는 김삿갓이 내놓은 술값을 억지로 집어 넣어주고
나서 계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삼십 년 동안이나 헤어져 지내던 죽마 고우가 돌아와서,
환영주가 한 잔 없을 수가 없는데, 오늘 밤 술값은 곗돈으로 쓰면 어떨까 ?"
그러자 계원들은 모두가 쌍수를 들어 찬성한다.
"물론 그래야지. 그건 계장이 알아서 하게,
그리고 술만 많이 먹게 해주게."
"막걸리 두 말쯤 사오면 되겠지? "
"아따,
이 사람아! 두 말이고 서 말이고 어서 가져오도록 시키기나 하게."
"그래, 그래..
그러면 재무(財務)막동이가 막걸리 서 말하고, 북어 두쾌만 사오너라.
그리고 합죽이네 김치가 매우 맛이 좋으니,
합죽아! 오늘은 자네집 김치 좀 꺼내다 맛 좀 보여줘라."
재무 막동이는 술을 사오려고 합죽이는 김치를 가지러,
문밖으러 나서려다 둘이서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어이구! 눈이 오시네!
어느새 제법 많이 쌓였는걸 ... "
그러자 모두들 문 앞으로 우루르 몰려와 밖을 내다 보았다.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펄펄 내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은세계로 바뀌고 있었다.
"야아!
눈 한번 탐스럽게 온다. 명년 농사는 풍년이 들겠구나 ! "
"옛날 친구가 눈까지 몰고 와서
오늘 밤 술 맛은 기막히겠다."
이윽고 막걸리 서 말이 도착되었고
김삿갓을 맞는 환영연이 성대하게 시작되었다.
제제가 대동계 계장으로 첫 잔을 김삿갓에게 따라주며 말한다.
"여기 친구들은 모두가 호주가(好酒家)들이라네,
자네 술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 "
"그래?
나는 지고는 못 가도 마시고는 가는 사람이니 오늘 밤은 맘대로 따라주게 ! "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 갈채를 보낸다.
"그렇다면 오는 밤 멋지게 어울려 보세.
술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 "
이렇게 술자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술자리가 어울려 오자,
옛 친구들은 앞을 타투어 김삿갓에게 술잔을 권하였다.
이렇게 취흥이 도도해져오자 땅꼬마가 큰 소리로 외친다.
"술이 있는데 가락이 없을 수 있는가 ?
까불아 너, "나무 타령" 한 곡조 뽑거라 ! "
"그래, 그래 !
그거 좋은 생각이다.
까불아 ! 퍼떡 일어나서 나무 타령 하거라."
모두가 박수를 치며 까불이에게 시선이 모아지자,
까불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머리에는 일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바지춤을 일부러 비틀어 당겨 입더니, 허리를 반 꼬부려 병신 시늉을 하면서
나무 타령을 부는다.
품배 품배 품배야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천 냥 주고 배운 소리
한두 푼에 팔린다
얼시구 좋다 엄나무
한다리 절뚝 전나무
이 산 저 산 소나무
오다가다 오동나무
가다오다 가닥나무
님의 손목 쥐염나무
칼로 푹 찔러 피나무
달 가운데 계수나무
방귀 뀌었다 뽕나무
십 리 절반 오리나무
열아홉에 스무나무
돈이 많아 은행나무
돈없으면 박달나무
방긋 웃는 복사나무
배를 타라네 배나무
휘휘칭칭 버드나무
물고 늘어지는 물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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