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

오토산 2022. 2. 2. 07:27

김삿갓 83 -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

​휘몰아치는 폭풍이 지나고 나자,

수안댁은 새삼스럽게 불안감에 떨며 호소하듯 속삭인다.

​"나 같은 계집 때문에 삿갓 어른께서 불행해져서는 절대 안 돼요,

오늘 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할테니, 어서 내 집에서 나가 주세요."

김삿갓은 공포에 떨고 있는 수안댁이 측은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넌즈시 달래주는데,

​"자네와 가까이 하는 사내는

모두 죽게 된다니까 겁이 나서 그러는 모양이구먼.
그러나 그런 무당의 허튼수작에 휘둘리지 말고 걱정 말아요.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테니."

​"아니에요.

할머니 무당의 말씀은 허튼 소리가 아니에요.

그 무당의 예언은 한 번도 빗나간 일이 없는 걸요."

​한번 믿기 시작하면 미신처럼 무서운 것이 없어서,

수안댁의 강박관념은 여간해서 떨쳐 버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삿갓은

어떤 방도든지 수안댁을 공포에서 구출해 내고 싶은 의무감조차 느껴졌다.

그래서 불안에 떠는 수안댁을 꼭 껴안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사람의 운명이 귀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릴세.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이

무슨 죄라고 재앙이 생기겠냐는 말이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김삿갓은 수안댁의 벗은 몸을 천천히 애무했다.

그러자 처음과 달리 수안댁은 김삿갓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이 쉽게 떨쳐지지 않는지, 한 마디 뇌까린다.

"삿갓 어른께서 아무 재앙도 없으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허어!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구!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몇 달 동안 나하고 같이 살아 보면 될 게 아냐?"

​김삿갓은 수안댁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안댁의 몸을 재차 덮어 눌렀다.

두 번째 정열도 첫 번째 못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듯,

두 사람의 섞임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편의 장중한 오케스트라 처럼 황홀하게 화합했다.

​두 번의 정사로 남녀는 녹초가 되었다.
그들은 벗은 몸을 서로 끌어 안고 달콤한 새벽 잠에 빠져 들었다.

​"꼬끼오~ !"

 

어느새 창 밖이 밝아왔다.
잠자리에서 깬 두 사람은 서로를 가는 실 눈으로 마주 보았다.

김삿갓을 보고 있는 수안댁의 눈에는 까닭모를 불안감이 묻어 있었다.
김삿갓은 여인의 벗은 엉덩이를 만지며 속삭였다.

​"쓸데 없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그만 일어나서 밥을 지어와요.

간밤에 신방을 치렀으니 이젠 신랑이 초례상을 받아야 할 것 아니겠나?

후훗 .."

​김삿갓의 익살에 수안댁도 마음이 놓이는지

일어나 옷을 추려 입으면서 수줍은 듯 미소를 짓는다.

​"조반을 지어 올테니

그동안 한잠 푹 주무시고 계세요."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밥을 짓는 것이

그렇게나 행복한 모양이었다.

​얼마 뒤,

두 사람이 겸상으로 조반을 다정하게 먹고 있는데

문득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왔다.

문을 열고 내다 보니 찾아 온 사람은 조조였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방안으로 들어 오다가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대뜸 농담을 퍼붓는다.

​"어럽쑈!

어제 저녁만 해도 두 사람 모두 결혼을 안 하겠다고 우겨대더니,

어느새 신방까지 치르고 초례상까지 받았네 그려.

과부와 홀아비가 만나더니만,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은 모양이네?"
​김삿갓은 무안해서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허,

과부와 홀아비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네.

없던 마누라가 하룻밤 사이에 생겨 난 것은 오로지 자네들 덕택일세.

너무도 고맙구만 그래."

​"잘했네 잘했어.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또 이래야만 자네가 우리 마을에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 게 아닌가?"
이렇게 말을 한 조조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밥상을 들여다 보더니,

"아니,

수안댁은 하룻밤 사이에 정이 얼마나 깊어졌길래,

새서방에게 영계백숙까지 대접하고 있는가?"하고

수안댁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수안댁은 얼굴을 붉히며,

 

"반찬이 하도 없길래 병아리 한 마리 잡은걸요."
김삿갓도 잠자코 있기가 면구스러워,

 

"이 사람아!

영계백숙 한 마리 얻어먹으려고

간밤에 내가 수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러는가?"
​조조는 그 소리를 듣고 배를 움켜잡고 웃으며,

 

"하하하,

간밤에 자네의 수고가 많았으리라 짐작되네.

그나저나 허리는 괜찮은가?"

​"예끼, 이 사람아!"

"하하하하...!"

조조는 이같은 걸쭉한 농담을 한바탕 퍼붓고 나서,

곧 정색을 하며 수안댁에게 묻는다.

​"오늘부터 술장사는 그만두어야 할게 아닌가?"

"글쎄요.

아직 그 문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걸요."

​"생각을 안 해보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여보게 삿갓!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

그 문제는 본인의 의사에 맡기는 것이 합당할 것 같네."

​"그래?

이 친구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는걸."
그러면서 부랴부랴 밖으로 달려나가며 김삿갓에게 당부한다.

 

"나 어디 잠깐 다녀올테니,

두 사람은 꼼짝말고 기다리고 있게!"
​김삿갓은 조조가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해서,

"저 친구가 별안간 어디를 다녀온다고 야단이지?" 하고

수안댁에게 물었다.
​그러자 수안댁도 고개를 갸웃하며,

 

"글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하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뒤였다.

조조가 대동계장 제제를 앞세우고 20여명의 상조계원과 함께 나타났다.
김삿갓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로 깜짝 놀랐다.

"아니,

자네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왔는가?"
​그러자 제제가 일동을 대표하여 근엄한 어조로 선언하듯 말한다.

"우리들은 자네에게 결혼식을올려주려고 몰려왔네.

자네가 수절하는 수안댁을 함부로 건드려 놓고 훌쩍 도망이라도 가버리는 날이면,

그야말로 우리 마을의 불상사가 아닌가?

 

더구나 자네의 애매한 태도로 보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여러 계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네와 수안댁을 정식으로 부부로 맺어 줄 생각이네.

자네는 설마하니 이제와서 혼인을 못하겠다고는 하지 않겠지?"

​평소에는 스스럼없이 지내던 친구였지만,

이때만은 제제의 태도가 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장 제제의 말이 끝나자 다른 친구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네는 복도 많으이.

돈 한푼 안 들이고 혼인식도 올리고 말야!"

​"그러게나 말이야,

저 친구 좋아하는 얼굴 좀 보라지!" 하고

제각기 놀려대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김삿갓도 이제 와서는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옆에 서 있는 수안댁조차 까닭 모를 불안에 떨면서도 무척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만사개유정(萬事皆有定)이라,

이것도 피치 못할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순간 이런 생각이든 김삿갓은 마음을 고쳐먹고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의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네.

고맙네. 자네들의 호의를 받아들임세."
​그러자 친구들은 쌍수를 들어 환호한다.

"우리 마을에 아까운 과부 하나 없어지게 되었구나."

​"수안댁은 복도 많으이,

저 친구가 수안댁 남편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누."하고

제각기 한마디씩 놀려대었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