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또 다시 꿈틀거리는 김삿갓의 방랑벽

오토산 2022. 2. 2. 07:28

김삿갓 84 -
[또 다시 꿈틀거리는 김삿갓의 방랑벽]

​김삿갓과 수안댁의 결혼식은

뒷산에 있는 산신당 앞에서 냉수를 한 그릇 떠놓고,

대동계장 제제의 집전으로 20여 친구들의 축복속에 올렸다.

불교에서는 부부 관계를 三生緣分이라 고 한다.

부부란 아무렇게나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前世, 今世,  來世에 걸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어야만 맺어진다는 소리다.

​김삿갓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안댁과 자기는 삼세의 인연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삼생의 인연이 있고 없고는 별개 문제로,

많은 친구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니 수안댁과 부부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김삿갓은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에

영월에 있는 본마누라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매우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마누라는 언제 돌아 올지도 모르는 나를 지금도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텐데,

나는 마누라를 버려두고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양심의 가책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수안댁이 기막히게 좋았던 것도 아니었고,

취중에 색정을 못이겨 어찌하다 한 번 건드렸을 뿐인데,

이것이 친구들에게 들통이나 어쩔 수 없이 식을 올리게 된 게 아닌가.

​경과야 어찌 되었든,

여러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안댁과 결혼식을 올렸으니

두 사람은 어엿한 부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결혼식을 올린 그날로 수안댁은

술장사를 그만두고 두 사람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수안댁은 까닭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무척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부가 된 것이

자네는 그렇게도 좋은가?"

​"제가 좋아하는 삿갓 어른과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으니 기쁠 수 밖에요."

​"허기는 20여 년을 독수공방으로 지내다가

알량하나마 서방이 생겼으니 기쁘기는 하겠지."

​"알량하기는 왜 알량해요.

제게는 삿갓 어른처럼 훌륭한 분이 없는걸요."

​"내가 훌륭한 사내로 보인다구? 하하하~
​이제부터는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내가

자네 집에 얹혀 지내게 되어 미안하기 그지없네."

​"그런 생각은 잊어 버리세요.

당신은 당당한 우리 집 주인이시고 저는 당신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마누라인걸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더욱 고맙구먼"

수안댁은 결혼한 그날부터 남편 공대가 너무나도 지극했다.

김삿갓 역시도 오랫동안 방랑 생활을 계속 해오다가

새 살림을 시작하고 밤마다 살을 섞어 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수안댁에게 정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어느날, 

하는 일도 없이 공짜밥을 먹고 있기가 민망하던 김삿갓은

"내가 언제까지나 놀고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니,

봄이 오거든 농사라도 지어 볼 참이라네."하고

말했더니 수안댁이 펄쩍뛴다.

​"선비는 농사를 짓는 법이 아니에요.
농사는 나 혼자 지을테니 당신은 책이나 읽고 바둑이나 두세요."

​"선비는 농사를 짓는 법이 아니라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옛날 어른들이 모두 그러시잖아요.
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을 농사꾼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수안댁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남편에게 농사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말까지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보니까 우리 할아버께서도 선비였기 때문에,

농사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마다 사랑방에서 글만 읽고 계시더라고요."

​"선비라고 농사를 짓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누?

그런 고루한 생각 때문에 우리네 백성들이 언제까지나 가난에 허덕이게 되는 거야."

​"누가 뭐라든 간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당신이 농사짓는 것은 못 보아요.

그리고 생활의 걱정은 마세요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온 것도 많이 있으니까요."

​수안댁의 고집은 이만저만 센 것이 아니었다.

마누라가 그처럼 고집을 부리니, 김삿갓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밤이면 모임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잡답을 즐기거나 술을 마셨고,
낮이면 남의 집 사랑방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삿갓이 나름 요긴하게 쓰이는 일은

마을에서 사람이 죽거나 제삿집이 있을 때면,

祭文을 지어 주고 輓章(만장)이나 써주는 일 뿐이었다.

​이러니 천하의 방랑벽이 있는 김삿갓으로서는 하루를 보내는 게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차츰 시간이 갈 수록 허망한 생각이 들던 김삿갓.

 

(명산대천을 행운유수처럼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던 내가,

계집 하나 때문에 이처럼 얽매어 지내야 하는가?)

​그러나 이제와서 한 번 맺어진 인연을

과감하게 박차고 뛰쳐 나간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의 생활 속에서 마음이 산란하던 김삿갓,

40평생 유리걸식을 해오다가 늦게 차린 살림으로

팔자는 매우 편해졌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다!

나는 한평생을 거지처럼 떠돌아 다니며  살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난 몸이 아니던가!

나에게 정착된 생활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마침내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갈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