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96 -
[남아하처 불상봉 男兒何處 不相逢
남자가 사노라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
김삿갓은 감자를 먹어 가며 ,
주인에게 이런 말도 물어 보았다.
"이 깊은 산중에서 날마다 숯만 구우며 살아가려면,
때로는 외로움도 느끼시겠구려."
지환은 당치 않은 소리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한다.
"산에는 산짐승 친구들도 많은데다,
숯을 굽기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워내는 숯이 많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비록 힘이 드는 일이기는 해도 여간 기쁘지 않은걸요."
김삿갓은 숯을 굽는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즐겁게 해 나가는 지환의 생활상을 듣자,
자기 일에 아무런 사명감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의무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지환은 스스로 만든 천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자리 움막은 천정이 너무 낮아 김삿갓 은 무심코 일어서다가
천정에 이마를 쪼아 붙였다.
"아얏 ! ..."
(하늘은 한없이 높은데,
이 집 천정은 왜 이다지도 얕은고 ! )
김삿갓은 이마를 쓸며 자신도 모르게 익살을 부렸다.
불편한 것은 천정만이 아니었다.
콧구멍만한 좁은 방에서 세 사람이 함께 자려니까,
아무리 가로 세로 누워도 다리를 펴기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방이 워낙 비좁아 불편하시겠지만 하룻밤 참고 지냅시다.
지내 놓고 나면 이런 일도 좋은 추억이 되실 것이오."
주인은 워낙 낙천가인지라,
모든 일을 좋게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상문은 김삿갓에게 미안스러운지,
"선생을 편히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
말을 한다.
"아무리 불편하기로
토굴보다야 낫지 않겠소이까?"
김삿갓은 짐짓 익살을 부려 보였다.
주인과 양상문은 눕기가 무섭게 코를 요란스럽게 곤다.
그러나 김삿갓은 오금을 못편 채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몽사몽간에 잠이 살짝 들었다가 깼었는데 다시는 잠이 오지 않아,
잠 들기를 단념하고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뒷산에 올라오니 조그만 정자가 하나 있었다.
정자에 올라 앉아 산아래
어둠속의 수풀과 이를 환히 비추는 달구경을 하는데
뱃 속 창자가 주린 소리를 낸다.
김삿갓 ,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즉흥시 한 수를 읊었다.
천고만리 불거두 天高萬里 不擧頭
하늘은 높아 만리 이건만 머리를 들 수 없고
지택천리 불선족 地澤千里 不宣足
땅은 천 리로 넓건만 다리를 펼 수 없네.
오경등루 비완월 五更登樓 非翫月
오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구경 때문은 아니오
삼조피곡 불구선 三朝避穀 不求仙
사흘을 굶은 것은 신선이 되려 함도 아니다.
다음날 아침,
오지환은 마당에 숯불을 피워 놓고 토끼 불고기를 구워준다.
김삿갓이 토끼 고기를 먹어 보기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토끼 고기는 노린내가 난다는 말을 들었는데
불에 구워 먹어 그런지 쇠고기와 다름이 없구려."
양상문은 고기를 맛있게 먹어가며,
"저 역시 토끼 고기는 처음 먹어 보는데 맛이 괜찮습니다.
여보게, 지환이!
이런 때에는 술이 있어야 할 것 인데,
어디서 술 좀 구해 올 수 없을까?"
"원, 형님두!
이런 심심산중에서 술을 어디서 구해 옵니까?"
오지환은 양상문에게 넌즈시 구박을 주다가,
별안간 무엇이 생각난 듯, 무릅을 탁 친다.
"아 참!
술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납니다.
나는 워낙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에는 관심이 없는데
그러나 한 5년 전 쯤인가?
산머루 한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둔 게 있어요.
지금쯤은 술이 되었을 것 같으니 갖다 먹기로 합시다."
"이 사람아!
그런게 있으면 진작 가져 올 일이지 왜 잠자코 있었는가?"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까맣게 잊고 있었지요."
김삿갓은
5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어 두었다는 머루술 이라는 말을 듣자,
대뜸 입에 군침이 돌았다.
아닌게 아니라 오지환이 가져 온 머루주의 맛은 기가막히게 향기로웠다.
양상문도 술을 마셔 보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김삿갓에게 물어 본다.
"선생!
나는 이렇게 좋은 술을 마셔 보기는 50 평생 오늘이 처음입니다.
선생 입에는 어떻습니까?"
"내 입이라고 노형의 입과 다를 것이 있겠소?
이 술을 마시니,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 오는 것만 같구려."
오지환은 그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한다.
"5년 전에 장난삼아 땅속에 묻어 두었던 머루가
오늘날 두 분을 그렇게도 즐겁게 해 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본디 좋은 술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오.
그러기에 옛날 부터, 마음을 너그럽게 해 주는데는 술이 제일이요.
(寬心應是酒 : 관심응시주 :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데는 시보다 더 좋은 게 없다
(遺興莫過詩 : 유흥막과시)고
했다오."
"그것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흘이든 나흘이든 이 술이 바닥이 날 때까지
우리 집에 그냥 머물러 계십시오.
술 안주는 노루 고기든 꿩 고기든 입맛대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흥이 절로 돋는 소리다.
"선생!
이 좋은 술을 그냥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양상문 조차 보채는 바람에 김삿갓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좋도록 합시다그려.
나는 워낙 오라는 데가 없는 몸이니 뭐가 급해서 떠나겠소이까?"
김삿갓과 양상문은 오지환네 움막에서 사흘 밤을 더 묵다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술이 아직도 더 남아 있으니까.
아예 바닥을 내고 떠나도록 하시죠."
오지환은 헤어지기가 아쉬워 호소하듯 만류한다.
그러자 양상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사람아!
밑술을 조금 남겨 두어야 우리가 또 오게 될 게 아닌가."
김삿갓도 웃으며 말했다.
"술이 아무리 좋기로 형공兄公의 우정만이야 하겠소이까,
하룻 밤 자고 떠나려던 노릇이 나흘이나 묵은 것은
형공의 정성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었소."
그것은 사실이었다.
술이 좋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였고,
사흘 동안이나 묵은 것은 지환이라는 산사람山人의 우정을
고맙게 받아 들이지 않고, 뿌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지환도 무언가 느껴지는 점이 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굳이 떠나신다면 억지로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오는 가을부터는 해마다 머루주를 잔뜩 담아 놓고,
두 분이 다시 찾아와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운 우정이었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다.
세 사람이 삼거리에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자,
양상문은 김삿갓의 옷소매를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헤어지면,
선생을 어느 세월에나 또 만나 뵙게 되겠습니까?"
김삿갓은 가슴이 뭉클해 오는 감동이 밀려 왔지만,
말만은 예사롭지 않게 답했다.
"남아하처 불상봉男兒何處 不相逢이라는 옛말이 있지 않소?
오래 사노라면 어디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설사 못 만나는 한이 있어도,
노형이 베풀어 주신 엽전 한 닢만은
죽는 날까지 신주처럼 품에 지니고 살아가겠소이다."
"......."
양상문은 대답을 못하고,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눈물만 흘린다.
그리고 돌아서서,
멀리 사라지는 김삿갓 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때 까지
오지환과 함께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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