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보살 같은 무하향 주모

오토산 2022. 2. 6. 06:38

김삿갓 97 -
[보살 같은 무하향 주모]

​수안에서 구월산이 있는 殷栗(은률)로 가려면 사리원을 거쳐야한다.

사리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김삿갓 산을 하나 넘어 가니 술집이 보인다.

 

집은 게딱지같이 초라해 보이건만

, 屋號는 요란스럽게도 무하향(無何鄕)이라고 붙어 있었다.
​술청의 주모는 육십을 넘겼음직한 젊은 할머니였다.

 

"주모!

술 한잔 주시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 놓고 술청에 걸터 앉으며 다시 말했다.

​"게딱지 같은 집에 무하향이라는 간판은 너무도 격에 어울리지 않소이다.

주모는 무하향이라는 말의 뜻을 알기나하고 간판으로 내 거신 것이오?"
​주모는 술을 따라 주면서

 

"무하향이라는 말이 어서 나온 것인지,

술장수가 그런 건 알아서 뭐 한다오?

​그저,

지나가는 손님이 술 한잔 사 마시고 나서,

나무 토막에 그렇게 써주기에 내버리기가 아까워서 걸어 놓았을 뿐이라오."
​김삿갓은 술 한 잔을 단숨에 쭈욱 들이키고 나서,

 

"게딱지 같은 주막에 무하향이라는 간판은

'개 발에 편자'격이니 떼어 버리는 게 낫지않겠소?"하고

무책임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모는 몹시 아니꼬운 듯 술을 따르다 말고

김삿갓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 보기만 한다.
​김삿갓은 약간 무안한 생각이 들어 웃어 보이며 묻는다.

 

"술을 따르다 말고

왜 내 얼굴만 쳐다보시오."
​그러자 주모는 다시 술을 따라 주며 혼잣말로 탄식하듯 말한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히다뇨?

무엇이 기가 막히다는 말이오?"
​주모는 그제서야 정색을 하면서 김삿갓에게 이렇게 나무라는 것이다.

"손님은 말끝마다 게딱지 같다는 말을 하는데 게딱지가 어쨌단 말이오.

​게가 그 말을 들으면 손님을 얼마나 나무랄 것이오?
​손님 눈에는 게가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정작 게 한테는 자기 딱지야말로 전우주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그런 것 쯤은 알만한 분이 왜 이렇게도 입이 점잖지 못하시오."

​김삿갓은 주모의 질책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주모의 말이 절절이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이 노파가 보통 노파가 아니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게딱지라고 말한 것은 내가 실언을 했소이다.

정식으로 사과할 테니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시오."하고

고개를 수그려 보였다.
​그러자 주모는 싱긋 웃어 보이며,

 

"내가  늙은 것만 믿고,

손님에게 말버릇이 지나치게 불손했던 것 같구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술 한 잔 따라 드리리다."하며
술을 한 잔 따라 주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말이 얼마든지 통 할 수 있는 노파가 아니던가?'하는

생각이 들어,

 

"주모는 혼자 사시는 모양인데 자녀가 한 명도 없으신가요?"하고

물었다.

​"자식이 없기는 왜 없겠어요.

아들 딸이  자그마치 일곱 명이나 있다오."

​"옛!

아들딸이 일곱 명이나 있다구요?
그런데 자식들은 어디가고 혼자만 산다는 말이오?"

​"더러는 중이 되어 구월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또 제 애비를 찾아 가기도 했고,
계집애는 사내놈과 배가 맞아 도망을 쳐버리기도 했고...
결국 나는, 혼자 살다 죽으려나 봅니다."

​주모의 말만 들어서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지만,

주모는 모든 것을 달관한 듯 태연하기만 하였다.
​김삿갓은 주모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러는 애비를 찾아 갔다니요?
그렇다면 영감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딴 집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요?"
주모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아니지요. 

내가 팔자가 워낙 기박해 열 아홉에 아들 형제를 남겨 받고 청상 과부가 되었다오.

​부득이 개가하여 이번에는 남매를 낳았는데 두번째 서방이 또 죽어 버린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는 시집을 안 가기로 결심을 했다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들이 없는 부잣집 영감님이 나를 찾아와서,

돈을 많이 줄 테니 아들을 하나만 낳아 달라는 거예요."

​"소실로 데려 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아들만 낳아 달라는 말인가요?"

​"물론이죠.

아이가 넷 씩이나 달려 있는 과부를 누가 소실로 데려 가겠어요?
나 또한 죽으면 죽었지, 남의 집 소실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면 돈을 받고

아들을 낳는 기계 노릇만 해달라는 말이군요."

​"이를테면 그런 셈이지요.

그렇게 아들을 낳아 두 돐 만에 곱게 돌려 주었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영감님이 찾아와서 아들딸 간에 하나만 낳아 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누구의 부탁은 들어주고 누구의 부탁은 거절하기가 안 되어,

결국은 그런 식으로 남의 아이를 셋이나 낳아 주었다오."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를

주모는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이 담담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물론 자식을 넷이나 키우며 혼자 살아가기가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남의 아이를 셋 씩이나 낳아 주었을 것인가!

​이렇듯 남의 아이를 낳아,

두 돐이 될 때까지 정성스럽게 키워서 꼬박꼬박 돌려주었다는 것은

부처님 같은 자비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주모를 대하기에 마치,

생불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숙연해 오기까지 하였다.

​"아니,

그러면 세 사람이 모두 자식만 낳아 가지고 가고, 

같이 살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오?"

​"그런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첩살이는 하고 싶지 않아서 모두 거절해 버렸다오."

​주모는 팔자를 고칠 기회가 많았음에도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 온 것을 보면,

본바탕이 음탕한 여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면 두 남편 몸에서 낳은 네 남매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혼자만 살고 계시오?"

​"아들 셋 가운데 둘은 스님을 따라 구월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버렸고,
한 아이는 호랑이한테 물려 갔는지 집을 나간 채 영영 종적을 모르겠고,

하나밖에 없는 계집아이는 어떤 놈팽이와 배가 맞아 도망을 갔다오.
​지금은 평양에서 기생질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 오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김삿갓은

"기생"이라는 소리에 흥미가 느껴져서

 

"평양에서 기생 노릇을 한다고요?

​나도 평양으로 가는 길인데 한 번 찾아보리다.
그런데 따님의 이름은 뭐라고하지요?" 하고

물어 보았다.

​주모는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지,

심드렁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한다.

​"집을 나간지 하도 오래 되어,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可實이라고 불렀지만,
기생이 되고 나서는 이름을 뭐라고 바꿨는지는 모르지요."
김삿갓은 쓴웃음을 웃으며

 

"모녀간의 情理가 그럴 수가 있겠어요?
지금도 가끔 보고 싶기는 하겠지요?"

​"솔직이 말해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품안을 떠나 버리면 자식도 남과 다를 것이 없는걸요.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별을 하면 걱정도 생기고 번뇌도 일어난다면서요?"
​주모의 말을 경청하던 김삿갓은 마음 속에 담긴 말을 주모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생활 신념이 그렇게 뚜렸한 것을 보니,

보통 분이 아니오.
자, 그런 뜻에서 기분 좋게 한 잔 마십시다."

​김삿갓은 주모에게도 술을 한 잔 따라 주고,

술잔을 주모의 눈 높이로 치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