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97 -
[보살 같은 무하향 주모]
수안에서 구월산이 있는 殷栗(은률)로 가려면 사리원을 거쳐야한다.
사리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김삿갓 산을 하나 넘어 가니 술집이 보인다.
집은 게딱지같이 초라해 보이건만
, 屋號는 요란스럽게도 무하향(無何鄕)이라고 붙어 있었다.
술청의 주모는 육십을 넘겼음직한 젊은 할머니였다.
"주모!
술 한잔 주시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 놓고 술청에 걸터 앉으며 다시 말했다.
"게딱지 같은 집에 무하향이라는 간판은 너무도 격에 어울리지 않소이다.
주모는 무하향이라는 말의 뜻을 알기나하고 간판으로 내 거신 것이오?"
주모는 술을 따라 주면서
"무하향이라는 말이 어서 나온 것인지,
술장수가 그런 건 알아서 뭐 한다오?
그저,
지나가는 손님이 술 한잔 사 마시고 나서,
나무 토막에 그렇게 써주기에 내버리기가 아까워서 걸어 놓았을 뿐이라오."
김삿갓은 술 한 잔을 단숨에 쭈욱 들이키고 나서,
"게딱지 같은 주막에 무하향이라는 간판은
'개 발에 편자'격이니 떼어 버리는 게 낫지않겠소?"하고
무책임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모는 몹시 아니꼬운 듯 술을 따르다 말고
김삿갓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 보기만 한다.
김삿갓은 약간 무안한 생각이 들어 웃어 보이며 묻는다.
"술을 따르다 말고
왜 내 얼굴만 쳐다보시오."
그러자 주모는 다시 술을 따라 주며 혼잣말로 탄식하듯 말한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히다뇨?
무엇이 기가 막히다는 말이오?"
주모는 그제서야 정색을 하면서 김삿갓에게 이렇게 나무라는 것이다.
"손님은 말끝마다 게딱지 같다는 말을 하는데 게딱지가 어쨌단 말이오.
게가 그 말을 들으면 손님을 얼마나 나무랄 것이오?
손님 눈에는 게가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정작 게 한테는 자기 딱지야말로 전우주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그런 것 쯤은 알만한 분이 왜 이렇게도 입이 점잖지 못하시오."
김삿갓은 주모의 질책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주모의 말이 절절이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이 노파가 보통 노파가 아니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게딱지라고 말한 것은 내가 실언을 했소이다.
정식으로 사과할 테니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시오."하고
고개를 수그려 보였다.
그러자 주모는 싱긋 웃어 보이며,
"내가 늙은 것만 믿고,
손님에게 말버릇이 지나치게 불손했던 것 같구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술 한 잔 따라 드리리다."하며
술을 한 잔 따라 주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말이 얼마든지 통 할 수 있는 노파가 아니던가?'하는
생각이 들어,
"주모는 혼자 사시는 모양인데 자녀가 한 명도 없으신가요?"하고
물었다.
"자식이 없기는 왜 없겠어요.
아들 딸이 자그마치 일곱 명이나 있다오."
"옛!
아들딸이 일곱 명이나 있다구요?
그런데 자식들은 어디가고 혼자만 산다는 말이오?"
"더러는 중이 되어 구월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또 제 애비를 찾아 가기도 했고,
계집애는 사내놈과 배가 맞아 도망을 쳐버리기도 했고...
결국 나는, 혼자 살다 죽으려나 봅니다."
주모의 말만 들어서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지만,
주모는 모든 것을 달관한 듯 태연하기만 하였다.
김삿갓은 주모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러는 애비를 찾아 갔다니요?
그렇다면 영감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딴 집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요?"
주모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아니지요.
내가 팔자가 워낙 기박해 열 아홉에 아들 형제를 남겨 받고 청상 과부가 되었다오.
부득이 개가하여 이번에는 남매를 낳았는데 두번째 서방이 또 죽어 버린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는 시집을 안 가기로 결심을 했다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들이 없는 부잣집 영감님이 나를 찾아와서,
돈을 많이 줄 테니 아들을 하나만 낳아 달라는 거예요."
"소실로 데려 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아들만 낳아 달라는 말인가요?"
"물론이죠.
아이가 넷 씩이나 달려 있는 과부를 누가 소실로 데려 가겠어요?
나 또한 죽으면 죽었지, 남의 집 소실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면 돈을 받고
아들을 낳는 기계 노릇만 해달라는 말이군요."
"이를테면 그런 셈이지요.
그렇게 아들을 낳아 두 돐 만에 곱게 돌려 주었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영감님이 찾아와서 아들딸 간에 하나만 낳아 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누구의 부탁은 들어주고 누구의 부탁은 거절하기가 안 되어,
결국은 그런 식으로 남의 아이를 셋이나 낳아 주었다오."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를
주모는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이 담담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물론 자식을 넷이나 키우며 혼자 살아가기가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남의 아이를 셋 씩이나 낳아 주었을 것인가!
이렇듯 남의 아이를 낳아,
두 돐이 될 때까지 정성스럽게 키워서 꼬박꼬박 돌려주었다는 것은
부처님 같은 자비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주모를 대하기에 마치,
생불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숙연해 오기까지 하였다.
"아니,
그러면 세 사람이 모두 자식만 낳아 가지고 가고,
같이 살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오?"
"그런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첩살이는 하고 싶지 않아서 모두 거절해 버렸다오."
주모는 팔자를 고칠 기회가 많았음에도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 온 것을 보면,
본바탕이 음탕한 여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면 두 남편 몸에서 낳은 네 남매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혼자만 살고 계시오?"
"아들 셋 가운데 둘은 스님을 따라 구월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버렸고,
한 아이는 호랑이한테 물려 갔는지 집을 나간 채 영영 종적을 모르겠고,
하나밖에 없는 계집아이는 어떤 놈팽이와 배가 맞아 도망을 갔다오.
지금은 평양에서 기생질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 오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김삿갓은
"기생"이라는 소리에 흥미가 느껴져서
"평양에서 기생 노릇을 한다고요?
나도 평양으로 가는 길인데 한 번 찾아보리다.
그런데 따님의 이름은 뭐라고하지요?" 하고
물어 보았다.
주모는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지,
심드렁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한다.
"집을 나간지 하도 오래 되어,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可實이라고 불렀지만,
기생이 되고 나서는 이름을 뭐라고 바꿨는지는 모르지요."
김삿갓은 쓴웃음을 웃으며
"모녀간의 情理가 그럴 수가 있겠어요?
지금도 가끔 보고 싶기는 하겠지요?"
"솔직이 말해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품안을 떠나 버리면 자식도 남과 다를 것이 없는걸요.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별을 하면 걱정도 생기고 번뇌도 일어난다면서요?"
주모의 말을 경청하던 김삿갓은 마음 속에 담긴 말을 주모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생활 신념이 그렇게 뚜렸한 것을 보니,
보통 분이 아니오.
자, 그런 뜻에서 기분 좋게 한 잔 마십시다."
김삿갓은 주모에게도 술을 한 잔 따라 주고,
술잔을 주모의 눈 높이로 치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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