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98 -
[주막, 무하향에서 만난 낯선 사내 백종원]
김삿갓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문득 문이 벌컥 열리며 4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사내가 들어 오더니,
대청 마루에 털썩 걸터 앉으며 푸념조의 말을 한다.
"아주머니! 나 술 한잔 주소.
제~길헐! 계집년들 등쌀에 사람이 살 수 있어야 말이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주모가 얼른 술을 따라 주며 묻는다.
"계집년들이 뭐가 어쨌다고
혼자 화를 내시오?"
김삿갓은 그 기회에 사나이의 용모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나이는 사십이 되었을까 넘었을까,
몸이 우람하고 상투가 큼지막한데다가
이마에는 일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아울러 사내의 눈꼬리가 찢어져 올라 간 것으로 보아,
결코 순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사나이는 술 한잔을 쭈욱 들이키고
술잔을 술상위에 탁 내려 놓으며,
"계집년 얘기는 말도 마시오.
그 년들 때문에 이제는 내가 신물이 날 지경이라오."
그리고 나서 김삿갓의 얼굴을 잠시나마
멀거니 바라보더니 별안간 깜짝 놀라 보이며,
"아니 이거,
자네는 천마산에 사는 이 서방 아닌가?
여보게 이거 얼마만인가?" 하고
외치며,
김삿갓에게 다가와서 대뜸 손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형이 사람을 잘못 보셨소이다.
나는 이 서방이 아니고 김 서방이오."
그러나 상대방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예끼 이 친구야
옛날 친분을 생각해서도 자네가 나를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白鐘元일쎄, 자네가 성까지 바꿔 가면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생면 부지의 사나이가 얼토당토 않은 고집을 부리자
김삿갓은 매우 난처한 심정이었다.
김삿갓은 백종원이라는 사내에게 빙그레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마 이 서방이라는 친구가 나하고 어지간히 닮은 모양이구료.
그러나 나는 이 서방이 아니고 틀림 없는 김서방 입니다.
얼굴이 비슷해서 착각을 일으킨 모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다른 데가 있을 것이오.
내 얼굴을 자세히 보시오."
그러면서 김삿갓은 얼굴을 일부러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백종원이라는 사내는 김삿갓의 얼굴을 면구스러울 정도로
요모조모 살펴 보더니, 문득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내가 노형에게 큰 실수를 했소이다.
내 친구는 왼쪽 뺨에 커다란 점이 있는데,
노형의 뺨에는 검은 점이 없군요.
내가 실수를 했으니 용서하시오.
그러나 저러나 노형은 어쩌면 내 친구와 얼굴이 그렇게도 닮으셨소.
그래서 그런지, 노형은 처음 만나는 사람 같지가 않구려.
그런 뜻에서 한 잔 합시다."
어쩐지 행실이 수상하다 싶었지만,
김삿갓은 백종원이 내민 술잔을 물리 칠 생각은 없었다.
"좋소이다.
나는 비록 이 서방은 아니지만 친구가 별게 있겠소.
함께 어울리면 친구지..."
"옳으신 말씀이오.
김서방이나 이서방이나 모두가 사람이기는 매일반일 것이오.
하하하."
백종원은 호탕하게 웃고는
문득 주모를 쳐다보며 수작을 부린다.
"주모는 성을 뭐라고 하오?
설마 성이 주가는 아니겠지?"
주모는 백종원에게 가볍게 나무라는 어조로,
"여보세요,
성을 갈면 개자식이라는 말도 모르시오?
누구를 개자식으로 만들려고 그런 농담을 하시우."
"주가가 아니란 말이구려.
그러면 진짜 성은 뭐라고 하오?"
"내 성은 千氏라오.
본관은 潁陽(영양) 이구요."
그 말을 듣자,
김삿갓이 중간에 끼어들며 말한다.
"천씨..라면,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올린 思庵 千萬里의 후손인가 보구려?"
주모는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어머나!
손님은 우리 가문의 내력을 잘도 아시네요."
그러나 백종원은 뭐가 못마땅한지
입을 씰룩 거리면서 대뜸 시비조로 나온다.
"주모는 왜 그렇게도 건방지지?"
"성이 뭐냐 묻길래 사실대로 대답했을 뿐인데
뭐가 건방지다는 거예요?"
"왜 건방지다는 것인지 몰라서 묻나?
내 성이 백가인데,
주모의 성은 내 성보다 더 열 갑절이나 높은 천가라고 하니,
그런 건방진 성이 어디 있어?
오늘 부터는 "千"자의 대가리를 툭 쳐버리고
"十哥" 라고 해요.
그래야만 격에 어울릴 거야.
내 말 알아듣겠지!"
이렇게 백종원이라는 사내가 주모의 성을 가지고 생트집을 잡는 바람에
김삿갓은 배를 움켜잡고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백종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이라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피동적으로 타고나는 것인데,
남의 성을 가지고 나무라면 어떡하오?
천가면 어떻고 백가면 어떻소?
사람은 다 마찬가지인 걸...
나는 그보다도 노형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이다."
백종원은 술을 한잔 들이키고 나서 반문한다.
"뭐가 궁금하다는 말씀이오?"
"노형은 아까 이 집에 들어설 때에
계집년들 등쌀에 신물이 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소?
어떤 연유로 그런 말로 화를 냈는지, 그 이야기 좀 들어 봅시다."
그러자 백종원은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 얘기 말인가요?
그 얘기 라면 창피스러워서 말도 하고 싶지 않소이다."
"말을 할 수 없다니까 더욱 듣고 싶구려.
오가다 만난 우리 사이에 창피스러울 것이 뭐 있겠소.
이왕이면 기탄 없이 들려 주시구려."
그러자 백종원은 문득 생각이 달라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기는 사내들이란 너 나 없이 모두가 똑같은 동물이니까,
노형도 내 이야기를 들어 두면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니 잘 들어 보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백종원은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를 한집에 데리고 살기 때문에,
두 여인들 간에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기 일쑤였다.
오늘도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가 서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이년 저년 하며 대판, 싸우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두 마누라가 서로 싸우는 꼴을 본 백종원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편을 나무라고 다른편을 두둔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백종원은 생각다 못해 작은 마누라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건넌 방으로 끌고 가며 이렇게 호통쳤다.
"이년아 !
너 같은 계집년은 숫제 죽여 버려야겠다."
작은마누라를 야단치며 끌고가야만 대의 명분이 설 것 같아서 였다.
그러나 정작 작은마누라를 건넌방으로 끌고 건너왔을 때,
젊은 계집이 탐스러운 젓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을 보자
백종원은 별안간 욕정이 솟구쳐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런 탓에 작은마누라를 모두 벗겨 놓고 낫거리를 정신없이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방문이 홱 열리더니 큰마누라가 비호같이 덤벼들어
백종원의 등덜미를 움켜잡고 끌어 당기며 다음과 같이 호통을 치더라는 것이다.
"이 잡놈아!
저년을 이런 식으로 죽여 주려거든, 왜,
나를 먼저 죽여 주지 않고, 저년 부터 죽여 주느냐!"
(이, 오라를 칠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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