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협박

오토산 2022. 2. 6. 13:36

사랑방이야기(279)

협박



막실댁은 이날 이때껏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반듯한 과부다.
시집온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신랑이 급사해 청상과부가 됐지만,
한눈파는 법 없이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셔 고을 사또로부터 열녀상과 효부상을 받아 가문을 빛냈다.
시부모도 이승을 하직해, 이제 홀몸으로 시댁의 큰 기와집과 백여 마지기 문전옥답,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지켜가고 있다.
서른세살 막실댁에게 매파가 여기저기서 혼처를 물고 오지만 막실댁은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유씨 집성촌이다 보니 앞집 뒷집 모두가 일가친척들이라 막실댁은 언행을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다.

유씨 집성촌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타성들 중 덕순네는 자매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다.
덕순네는 친정이 막실댁 친정 이웃동네인 데다,
죽은 막실댁 신랑 유 초시와 덕순네 남편은 불알친구에 글친구로 아주 가까웠었다.
무엇보다 두살 아래 덕순네는 붙임성이 좋아 ‘형님, 형님’ 하며 막실댁을 잘 따랐다.
“형님, 호박죽 좀 들어보세요.”
찰밥이다 묵이다 별식만 했다 하면 덕순네는 싸들고 막실댁에게 달려왔다.
막실댁이 독한 고뿔로 드러누웠을 땐 끼니마다 죽을 쒀주고 배를 꿀물로 삶아 올렸다.
시시때때로 놀러와 동네 우물가에서 주워들은 온갖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막실댁도 설을 앞둔 대목 장터에서 덕순네 아이들 털조끼를 사주고 보리굴비도 보내줬다.

어느날 방물장수가 막실댁을 찾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방물장수가 방물 고리짝을 내려놓으며
“마님이 지난달에 부탁한 두통약을 구해왔습니다.”
“마침 잘됐네.
아니어도 머리가 좀 아픈 참인데.”
유지에 싼 약 한알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두통약을 먹은 막실댁이 어질어질해져 “내가 왜 이러지?” 스르르 쪽마루에 누워버렸다.
“마님, 이 약이 원래 잠이 옵니다요.”
덩치 큰 방물장수가 막실댁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쫄랑쫄랑 덕순네가 설기떡을 들고와 안방문을 덜컥 열었다가 떡 쟁반을 떨어뜨리며 기절할 듯 돌아섰다.

그날 밤, 신랑 박 진사와 한바탕 일을 치른 덕순네가 베갯머리 송사로 박 진사에게
대낮에 막실댁과 방물장수 털보가 벌거벗고 운우(雲雨)를 나눈 걸 얘기했다.
박 진사는 크게 놀라며
“부인,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시오.”
“내가 어디 가서 얘기하겠어요.
그 망칙한 일을….”보름쯤 지났을 때 덕순네가 막실댁을 찾아왔다.“형님, 돈 서른냥만 빌려주세요.”
“그러게.
자네 같은 부잣집도 서른냥이 없을 때가 있네그랴.”
그달 그믐이 돼도 돈을 갚지 않더니 하루는 덕순네가 막실댁을 찾아와 돈 갚을 생각은 않고 한다는 말이
“형님 나이가 이제 서른세살, 한창 밝힐 나이니 그럴 수 있죠 뭐.”
생긋이 웃더니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네 장삼이사야 간부를 불러들였다가 들통이 나도 집에서 쫓겨나기밖에 더하겠어요.
하지만 형님은 다릅니다.
사또로부터 열녀상·효부상도 받아 가문을 빛냈으니….”
하며 막실댁을 빤히 쳐다보더니
“형님, 제 입이 무겁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덕순네는 말을 마치자 발딱 일어나 치맛자락을 날리며 나가버렸다.
막실댁은 짐작이 갔다.
그날 비몽사몽간에 방물장수에게 겁탈을 당할 때 덕순네가 왔고, 발설하지 않겠다며 협박을 하는 것이다.포목점에서 사동이 찾아와 “덕순네가 마님께 비단값을 받으라 합디다요” 해도 두말없이 비단값을 줬다.
푸줏간에서도 금은방에서도 한약방에서도 찾아왔다.
한번은 덕순네가 찾아와 보증을 서달래서 도장을 찍어줬다가 천냥을 물어줬다.봄이 왔다.
동헌 대문 앞 굵은 산수유나무에 핀 노란꽃이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한 여인이 밧줄을 걸어 목을 매려는 걸 마침 행차하던 사또가 발견했다.
유씨 가문에서 열녀상과 효부상을 받은 막실댁이라는 걸 알고 사또는 정중히 대했다.막실댁은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놨다.
두통약을 먹고 정신이 혼미해져 방물장수로부터 겁탈을 당한 일부터 친자매 이상이던 덕순네로부터 협박을 당한 일까지.덕순네 내외가 잡혀왔다.
“이때까지 막실댁을 협박하여 뜯어낸 돈이 얼마인고?”
사또가 묻자 덕순네가 벌벌 떨며
“삼천이백냥쯤 됩니다.”
사또가 막실댁을 보고
“그만큼 뜯긴 게 맞는가?”
그러자 막실댁이 눈물을 흘리며
“삼천이 아니라 삼만육천이백사십냥입니다.
여기 모두 적어 놨습니다.”
깜짝 놀란 건 덕순네다.
“아닙니다, 사또나으리.”
덕순네 내외가 손을 가로저으며 울부짖자 사또가
“여봐라, 저 연놈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덕순네 내외는 곤장 스무대씩을 맞고 이실직고(?)를 했다.
막실댁은 집과 전답을 벌써 팔아치웠고, 덕순네 재산을 몽땅 털어 멀리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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