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허벅지에 점 하나

오토산 2022. 2. 6. 13:54

사랑방이야기(310)

허벅지에 점 하나

“아저씨,

뭣 땜시로 내게 가죽신을 사주고

요렇게 요릿집에 데려와서 너비아니까지 사주는 거예요?”

 

“너가 예뻐서 그러제, 임마.”

 

성배는 빙긋이 웃으며 여섯 살 세돌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식혜를 먹다 말고 성배가 지나가는 소리로

 

“누나하고 목간한 게 언제냐?”

이상한 걸 물어봐
세돌이가

 

“보름 전쯤 됐구먼요”라고

대답하자 성배가

 

“누나 몸에 말하자면

에∼ 뭐 이상한 거 있어?”

한다.

 

“있긴 있는데,

그건 왜 물어봐요?”

 

“어∼그래.
심심해서 그냥 물어본 거야.
됐어, 됐어.”


이튿날도 성배는 서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세돌이를 데리고 저잣거리로 가 깨엿도 사주고
가죽가방도 사주더니만 호빵집에 데리고 가

 

“누나 몸에 이상한 게 뭐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밀이에요.”
세돌이가 키들키들 웃었다.

 

알려줄 듯하면서 입을 다물자

성배는 날마다 세돌이를 데리고 저잣거리로 나갔다.
얻어먹을 만큼 얻어먹은 세돌이가 말하기로 약속한 날이 왔다.
세돌이가 찹쌀떡을 실컷 먹고 손바닥을 까닥까닥하자

성배가 쫑긋 귀를 세우고 세돌이 입으로 다가갔다.
세돌이가 귓속말로 말했다.

 

“우리 누나는요.
고추가 없어요.
킬킬킬.”

 

성배는 어이가 없어 이를 악물고

알밤을 주려고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어버렸다.


오성배는 천석꾼 부자 오 진사의 셋째아들로 허우대는 멀쩡한데 행실은 개차반이다.
여러 처녀 망쳐놓더니 장가를 가서 아들까지 낳고도 그 버릇은 못 고쳤다.
호시탐탐 세돌이 누나, 열여섯살 세화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온 고을에 널리 소문나

어느 신랑감이 세화를 꿰어찰지가 호사가들의 관심사였다.
세화 어머니가 여섯해 전에 세돌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못해 이승을 하직하자

 

진즉에 과부가 된 세화의 큰 이모가

핏덩이 세돌이를 안고 젖동냥을 다니며 키우고 이날 이때껏 살림도 꾸려왔다.
아직 서른여섯 살밖에 안된 큰 이모가 계속 함께 살 수도 없고

올케가 곳간 열쇠를 차고 있는 친정으로 갈 수도 없다.

 

여섯 해나 세돌이를 키워주고 살림을 살아준 은혜를 갚자면

살림 밑천을 두둑이 줘서 보내야 할 텐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세화 아버지 걱정이 컸다.

가을과 시름이 함께 깊어갈 즈음,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장마철 물레방앗간에서 성배가 세화를 쓰러뜨렸다는 것이다.

 

꽃 피고 새 우는 내년 봄에 혼례식을 올리면

성배의 본처는 쫓겨나고 세화가 안방을 차지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여기저기 쏠려 다녔다.

 

그즈음 세화의 큰 이모는 종적을 감췄고

그렇게 들락날락거리던 중신아비들의 발걸음이 딱 끊겨버렸다.
성배 마누라는 아이를 업고 보따리를 싸들고 눈물을 흩뿌리며 친정으로 가는 길에

세화네 집 앞에서 악담을 퍼부었다.

 

기고만장한 성배는

건달들과 주막에 진을 치고 앉아 세화를 쓰러뜨린 얘기로 게거품을 물었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에 세화는 장옷을 뒤집어쓰고

서릿발 같은 독기를 품고 현청으로 들어가

동헌의 사또에게 소장을 들이밀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동헌 마당은 인산인해였다.
사또의 심문이 시작됐다.

 

“지난 유월스무하루,

물레방앗간에서 오성배에게 정조를 바쳤는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사또의 심문에 고개를 빳빳이 쳐든 세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

 

고을 사람들의 야유가 쏟아지고

성배가 피 묻은 적삼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그날 밤

바닥에 깔았던 소인의 적삼입니다.”

 

“어머∼.”

 

구경꾼들의 탄성이 쏟아지자

의기양양해진 성배는 이방을 불러 귓속말로

 

“세화의 사타구니 바로 왼쪽 허벅지에는

검은 점 하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란 토끼눈이 된 이방이 동헌 마루로 올라가 사또에게 그 말을 전했다.
구경꾼 중에서 뽑은 할머니 셋과 사또의 안방마님이 세화를 데리고

동헌 뒷방으로 갔다.

 

세화는 서슴없이 치마를 올리고 고쟁이를 내렸다.

왼쪽 허벅지에 점 하나!

 

“그 말이 맞네!”
사또 안방마님과 할머니 셋이 이구동성으로 놀라서 소리쳤다.

 

“놀라지 마십시오!”

 

세화가 태연하게 물수건으로

허벅지의 점을 문지르자 점이 없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육년간 우리집 살림을 살아주던 큰 이모님을

저 못된 남자가 돈을 주고 매수하여
제 몸의 특징을 알아봐주도록 부탁한 걸 제가 눈치챘습니다.”

세화는 성배가 어린 동생 세돌이를 꼬드긴 얘기도 했다.

 

“황금에 눈이 먼 큰 이모님이 제가 목간할 때

제 몸을 살필 줄 알고 미리 먹으로 점을 그렸습니다.”

 

“여봐라∼.
저 흉악한 놈을 형틀에 묶어 곤장 스무 대를 안기렷다.”

성배는 곤장 세대에 모든 걸 자백하고

적삼의 피는 닭 피라는 것도 털어놨다.
성배는 옥에 갇혔다.

 

큰 이모는 처음 성배의 꼬드김을 받았을 때 그대로 세화에게 얘기했었다.
세화는 고자질 돈을 올리도록 큰이모와 머리를 맞대고 꾀를 짜낸 것이다.
성배로부터 거금 천 냥을 우려낸 큰 이모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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