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이야기(298)
공주의 남편
왕이 가장 총애하던 왕비가 출산하다가 죽고 아기는 살았다.
왕은 사랑하던 왕비의 죽음만으로도 애통한데 어미 없는 공주를 보노라면 가슴이 미어져
수라상의 수저도 들지 않은 채 술만 마셨다.
유모는 어린 공주를 안고 항상 왕의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라면서 죽은 제 어미를 빼다 박은 공주를 왕은 더더욱 감싸 안았다.
세월이 흘러 공주 나이 열여섯이 됐다.
왕의 명을 받은 도승지가 신랑감을 찾아 사람을 풀었다.
궁궐을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은 왕과 사돈을 맺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일품·정이품 벼슬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데 왕과 사돈이 된다면 권력이 너무 커져 국법으로 막았다.
도승지가 팔도강산에서 올라온 신랑감 목록을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
경상도 관찰사의 둘째아들이 입궁했다.
신랑 신부는 부모들이 정해준 대로 혼례를 올려 첫날밤이 돼서야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지만,
공주는 성혼 전에 문틈으로 신랑감을 볼 수 있었다.
공주의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육척 장신에 어깨는 떡 벌어지고 백옥 같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공주는 더는 신랑감을 보지 않겠다고 했다.
왕도 사윗감이 흡족했다.
궁궐에서 성대한 혼례식을 올리고 궁 밖으로 세간을 났다.
왕은 공주가 떠나는 게 못내 서운해 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담한 기와집을 마련해주고 시시때때로 공주를 불러들였다.
왕은 공주가 보고 싶을 때 공주만 불러들이지 공주의 신랑인 부마(駙馬)는 부르지 않았다.
부마는 국법으로 벼슬길을 막아놓았다.
경상도 관찰사의 희멀건 둘째아들은 공부할 필요가 없어졌음에 땅을 치고 아쉬워하는 부류가 아니라서
‘하기 싫던 공부 얼씨구나 잘됐다’ 했고 책 위에는 먼지만 쌓였다.
부마는 총각 때부터 한량 끼가 있어 경상도 화류계를 휩쓸었던 전력이 있었다.
공주는 새 신부답게 얌전해 부마의 기를 죽이지 않았다.
판서의 아들이, 영의정의 아들이 부마를 찾아와 친교를 맺었다.
찾아오는 고관대작의 아들들은 두 부류였다.
정자에 모이든가 사랑방에 모여 시를 짓고 고담준론을 나누는 부류와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려 기생집으로 가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는 부류다.
좀이 쑤시던 부마는 당연히 따분한 모임을 피하고 떠들썩한 부류와 어울렸다.
술과 여자는 묶여서 다니는 법.
부마가 경상도 화류계를 주름잡던 영웅담을 떠벌리자 행수기생은 부마에게 귀띔했다.
술자리를 파하고 부마는 행수기생 손에 이끌려 금침을 깔아놓은 뒷방으로 갔다.
눈을 감고 반듯하게 누워 목석같은 왕의 딸과 방사를 치르는 게 보슬비가 맨땅에 먼지 안 날 만큼 살짝 뿌리고 지나갔다면
명월관 뒷방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와 장대비를 퍼붓고 천둥번개가 번쩍이고 지진이 천지를 흔드는 형국이다.
사흘이 멀다 하고 부마가 행수기생에 반해서 명월관을 드나들어도 공주는 눈치 채지 못했다.
어느 날 왕이 공주가 보고 싶다고 가마를 보내며 웬일인지 말 한필도 보내 부마도 함께 오라 전했다.
왕은 지난번에 본 지 보름도 안 된 공주를 십년 만에 만난 듯이 반기며 자신의 옆에 앉게 하고 반갑게 맞은 부마는
주안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게 했다.
왕의 술잔이 비면 옆에 앉은 공주가 술을 따랐다.
“유 서방, 오늘 밤은 짐이 그저 자네 장인일세.
자~ 자네도 한잔 마시게.”
부마는 벌벌 떨면서 돌아앉아 술잔에 입만 댔다.
왕은 비단결 같은 목소리로 부마 아버지 안부도 물어보고 이것저것 자상하게 물어봤다.
“한잔 들게나~ 그렇지.
자작하니 술맛이 없지.
여봐라~ 술맛 나게 해줄 사람을 들여보내도록 하라.”
상궁 나인이 문을 열고 한 여인의 등을 밀어 넣었다.
“허허헉!”
부마가 새파랗게 질려서 와들와들 떨었다.
밀려들어온 명월관 행수기생은 하도 떨어 걸음을 못 걷고 주저앉았다.
상궁 나인의 지시대로 부마 옆에 앉아 호리병을 들고 부마의 빈 잔에 술을 따르는데
사시나무처럼 손을 떨어 술이 상 위로 흘렀다.
왕은 거푸거푸 잔을 비우고는 “우리 사위한테 술 한 잔 받아보세” 했다.
부마가 혼비백산 꿇어앉아 술을 따르니 술이 곤룡포로 줄줄 흘렀다.
공주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만 흘렸다.
공포의 술자리를 마치고 나오는데 내시가 비틀거리는 부마의 팔을 부축해주면서 소곤거렸다.
“공주마마께서 잉태만 하지 않았어도 부마께서는 발목에 돌을 달고 수장돼 고기밥이 됐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