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불면증

오토산 2022. 2. 6. 14:25

사랑방이야기(275)

불면증

 

최 부자는 몇 년째 악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도 오지 않을 뿐더러 비몽사몽간에 헛것이 보이고 환청에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다.
천석꾼 최 부자가 무슨 약을 안 먹어봤겠는가.
조선 팔도강산 용하다는 의원 다 찾아가 백약을 처방받아 정성껏 달여 먹어도 모두 허사였다.


그날도 잠이 안 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까만 밤하늘에 초승달이 칼처럼 꽂혀 있었다.
뒷짐을 지고 대문을 나서자 하인들이 따라 나오는 걸 돌려보내고 혼자서 걸었다.
끼룩끼룩 기러기들이 밤하늘을 날아가고 대나무숲은 바람에 서걱거렸다.
논두렁길을 걷다가 둑길을 걷다가 산자락길을 걸었다.
웃음소리가 났다.
“내가 웃어본 지 언제였던가.”
최 부자가 웃음소리를 따라갔다.
산허리 외딴 초가집 불빛에 노랗게 물든 들창에서 새어 나오는 남녀의 정담과 웃음소리에 그는 발이 붙어버렸다.
살짝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 들창 밑에 섰다.
“임자도 한잔 하구려.”
“싫어요, 싫어.”
“내 입속의 술을 받으시오.”
“어머머~"
적막강산에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너무나 또렷했다.
쪽쪽 소리가 나더니
“아이고, 망측해라. 이불이나 펴고 불이나 끄고요….”
헉헉 숨소리가 가빠지더니
“간지러워요~” 하는 소리만 들어도 방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철퍼덕 철퍼덕, 황소가 진흙 갯벌을 걸어가는 소리에 여자의 감창소리가 자지러졌다.
“내가 저 짓을 해 본 게 언제였던가!”
최 부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폭풍이 지나고 남자는 금방 쿠르르 쿠르르쿨 들창이 떨리게 코를 골아댔다.


바로 그때 최 부자가 입을 막을 틈도 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에취, 에취.”
마침 부엌에서 뒷물하고 그 물을 버리러 나왔던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방 안으로 뛰어들자 남자가 낫을 들고 뛰어나왔다.
여자가 뒤따라 초롱불을 들고 나오자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최 부자를 보고 소리쳤다.
“이게 누구야?
운봉이 아이가!”
함께 서당 다니던 불알친구 만석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만석이 마누라가 차려 온 술상을 마주하자 최 부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만석이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어릴 때 만석이와 운봉이는 남의 참외밭 서리를 하고 여름밤에 처녀들 멱 감는 것을 훔쳐봤다.
겨울이면 산토끼 잡으러 함께 눈밭을 헤매던 친구였다.
하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최운봉은 천석꾼 부자가 되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오만석은 무지렁이 농사꾼이 됐다.
두 사람은 좀체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됐는데 느닷없이 밤중에 최 부자가 오 서방 들창 아래 쪼그리고 있다가 들켜
방으로 끌려들어가 술상 앞에서 흐느끼니 오 서방이 난감해졌다.


한참 울던 최 부자가 악성 불면증에 걸린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고 코 고는 소리가 하도 부러워
처마 밑에 앉아 있었노라 말하자 오 서방은 “컬컬컬” 크게 웃었다.
오 서방이 물었다.
“동구 밖 주막에서 들었네.
심마니가 산에서 산삼 일곱 뿌리를 캤는데 자네 산에서 캤으니 산삼을 몽땅 내어놓으라고 송사를 벌였다며?”
“그것뿐이 아니네.
기생년 머리를 얹어주고 집을 사줬더니 집을 몰래 팔아 도망가 추노를 보냈지.
머슴하고는 새경 때문에 송사 중이지.
모두 다섯 가지 송사가 걸려 있는데 사또가 이방을 보내 손을 벌리고 있지.”
“그만, 그만.
내가 잠 오는 명약을 갖고 있네.
내 약을 먹어보겠나?”
최 부자가 의아한 눈초리로 오 서방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논이 전부 몇 마지기인가?”
오 서방의 물음에 최 부자가 대답했다.
“573마지기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오 서방이 물었다.
“다섯가지 송사를 모두 이긴다면 논 몇 마지기 값이 되는가?”
최 부자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논 3마지기 상당이네.”
그러자 오 서방이 힘차게 말했다.
“모두 져 주게.
573마지기에서 단 3마지기를 포기하면 아직도 자네는 570마지기 천석꾼 부자네.
그게 수면약이야.”


심마니가 최 부자를 찾아와 큰절을 올리며 산삼 세 뿌리를 가져왔다.
새경 때문에 다투던 머슴도 꿀을 한 통 들고 와 최 부자에게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올렸다.
추노가 도망갔던 기생을 잡아왔지만, 그 자리에서 풀어줬다.
논 물꼬로 송사를 벌이던 노 생원은 씨암탉 한 마리와 감로주 한 병을 들고 왔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하초에 뻐근하게 피가 쏠려 최 부자가 참으로 오랜만에 안방을 찾았고
마누라 엉덩이를 두드리며 코를 골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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