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소산마을 ‘꾸미지 않는 소박함(素)

오토산 2023. 2. 17. 10:25
● 불원재 유교문화해설 (100)
*소산마을 ‘꾸미지 않는 소박함(素)'
 
○ 안동에는 입향조를 중심으로 그 후손들이 5,6백년동안 대대로 함께 살면서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이름난 집성촌(集姓村)이 아직도 많이 있다.
안동 풍산지역만 하더라도 풍산류씨 하회마을, 안동권씨 가일마을, 안동김씨 소산마을, 풍산김씨 오미마을, 광산김씨 구담마을, 전의이씨 상리마을, 예안이씨 하리마을 진성이씨 마애마을, 영양남씨 매곡마을 등이 있다.
소산마을은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두 안동김씨의 요람으로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 김은열(金殷說)을 시조로 하는 선안동김씨(상락김씨)와 고려개국공신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후안동김씨(신안동김씨)가 세거하는 전통마을이다.
 
후안동김씨는 태사 김선평의 후예로 조선초(1419) 비안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이 벼슬에서 물러나 소산마을에 입향한 후 그 후손이 대대로 살면서 이름난 동성마을이 되었다.
조선초 김삼근의 맏아들 김계권(金係權)은 한성판관을 지냈고, 둘째 보백당 김계행(金係行)은 청백리로 도승지, 대사간을 지낸뒤 만년에 만휴정을 짓고 ‘우리집에는 보물이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은 청렴과 결백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고 읊은 시에서 그 후손이 조상의 정신을 이어가면서 길안 묵계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안동김씨의 학통은 고려말 성리학의 도통인 회헌 안향(安珦)→역동 우탁(禹倬) →불훤재 신현(申賢)→포은 정몽주(鄭夢周)로 이어지고 원나라 황제의 사부(華海師)였던 불훤재 신현의 학통을 물려받은 손자 신득청(申得淸)의 제자가 바로 소산의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다.
 
고려때 태복판사를 지낸 신득청이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는데 당시 문도(門徒)인 소산의 김삼근과 아들 김계권 부자가 함께 시신을 찾지 못한 스승의 의관을 봉정산에 묻고 초혼장(招魂葬)을 지냈다고 한다.
○ 한성판관을 지낸 김계권(金係權)은 유복하여 자녀 11남매중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하였다. 맏아들 학조대사는 세조의 국사(國師)로 명성을 떨쳤다. 둘째는 영전(永銓)으로 사헌부감찰, 셋째 영균(永勻)은 진사, 넷째 영추(永錘)는 수원도호부사, 다섯째 영수(永銖)는 장령(掌令)을 지냈다.
막내아들 사헌부장령 김영수(金永銖)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삼당 김영(金瑛)은 문과로 이조참의를 지낸 유학자이고, 둘째 김번(金璠)은 문과로 평양서윤을 지냈는데 그 후손이 서울 장동에 정착하여 장동파(壯洞派)의 파조가 되었다. 셋째 김순(金珣)은 진사로 효성과 행실이 두터웠다.
서울에 정착한 장동파는 장동김씨라고도 하고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의 증손 선원 김상용(尙容), 청음 김상헌(尙憲) 형제는 절의와 문장으로 이름났고 청음의 손자 김수흥(壽興), 김수항(壽恒) 형제는 함께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명신(名臣)이다.
장동파는 인조(仁祖)와 숙종(肅宗)에 걸쳐 명신(名臣), 석학(碩學), 문장(文章)들이 줄이어 배출되었고 순조(純祖) 이후 60년간 세도정치로 나라를 주름 잡아 정승(政丞)이 15명, 판서(判書)는 51명, 대제학(大提學)이 6명이며 또 3명의 왕비(王妃)가 났고, 문과 출신이 172명, 무과 출신이 146명에 이르고 선비로 유고(遺稿)나 문집(文集)을 남긴 학자가 175명에 달할 정도로 현달(顯達)한 인물이 많았다.
 
○ 소산(素山)마을의 유적으로는 입향조 비안공구택인 돈소당(敦素堂), 안동김씨 대종가인 양소당(養素堂), 삼구정(三龜亭), 청음선생의 청원루(淸遠樓), 동야 김양근의 동야고택(東埜古宅), 묵재 김이형의 묵재고택(黙齋古宅), 태고정, 성균진사 김정근(金正根)의 효자 정려문(旌閭門), 별묘사당, 역동재사, 역동재(嶧洞齋), 청음선생시비, 상락김씨 삼소재(三素齋)등이 있다.
 
소산의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북쪽으로 학가산이 우뚝하고 그 한 지맥이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거물산(巨物山)과 정산(鼎山)이 솟아있고 그 마지막에 순하게 자리잡은 소요산(素耀山) 언저리에 동남향으로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멀리 안산(案山)이 높이 솟아있고 마을 앞에는 비옥한 풍산 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을 뒤 소요산 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마을을 중심으로 좌.우로 병풍을 친듯 바람을 막아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학가산(鶴駕山)에서 내려온 화천(花川)과 곡강(曲江)이 마을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풍수지리적으로 전형적인 명당마을이다. 이 마을 왼쪽 산 끝자락이 동오봉인데 여기에 삼구정(三龜亭)이 있다.
 
1496년 사헌부장령 김영수(金永銖)가 여러 형제와 함께 연로한 노모의 장수(長壽)를 기원하여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 입구에는 거북모양의 세 개의 고인돌이 있고, 거북은 본래 신령스럽고 오래 사는 동물이라 어버이의 장수를 염원하여 정자의 이름을 삼구정(三龜亭)이라 하였다.
‘삼구정’에는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이 쓴 ‘삼구정’ 현판이 걸려있고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의 기문과, 후손 김우순(金宇淳)의 삼구정기략, 김신겸(金信謙)의 중수기, 김영한(金甯漢)의 중건기와, 당시 안동부사 김극검과 이요정(二樂亭) 신용개(申用漑)의 삼구정 원운(元韻) 시판과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의 차운(次韻)시가 있다.
 
제 삼구정(題三龜亭) 안동부사 김극검(金克儉)
諸子怡愉色養時/제자이유색양시/여러 자식들이 기쁜 안색으로 봉양하던 때
板輿扶持此娛嬉/판여부지차오희/어버이를 가마에 모시고 이곳에서 즐기셨네
作亭會役三州守/작정회역삼주수/정자를 짓는데 세고을 수령이 힘을 모았고
負柱誰煩五摠龜/부주수번오총구/기둥을 지는일 오형제 누가 괴로워 하였겠나
四野秋禾誇潁栗/사야추화과영율/온 들판의 가을벼 여문이삭 자랑 하는데
一篙春水賞漣漪/일고춘수상련의/봄 강에 뜬 배한척 잔잔한 물결 즐기네
長風萬里將新月/장풍만리장신월/만리밖 먼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초생 달
解向樽前一倂吹/해향준전일병취/술잔앞을 향해 불어와 함께 어우러지누나
 
○ 소산(素山)마을은 원래 금산촌(金山村)이라 하였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영가지(永嘉誌)에 “금산촌은 풍산현의 서편 5리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해 큰 들이 있고 땅이 비옥하여 온갖 곡식이 잘 된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소산은 병자호란(1636)후 청음(淸陰) 김상헌선생이 낙향하여 청원루(淸遠樓)에 은거할 때에 “김씨가 사는 곳을 금산(金山)이라고 하면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이름이라 온당치 못하다”하고 “검소(儉素)하고 신의(信義)를 소중히 하는 마을 이름이 좋겠다” 하여 소산(素山)으로 바꾸고 마을 뒷산도 여기에 유래하여 소요산(素耀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수백 년 내려온 마을 이름을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여기에는 모두가 수긍하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청음선생은 우선 김씨와 금산(金山)이 겹치게 되니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 뿐만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검소한 생활과 신의를 소중히 하는 삶을 심어주기 위하여 소산(素山)이라 이름하고 「꾸미지 않는 소박함」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 소산이라 이름한 까닭에는 주역(周易)의 깊은 이치가 들어있다. 금산촌의 자연의 형세는 마을 뒤로는 소요산이 있고 마을 앞에는 거북돌이 있고 그 안에 김씨가 살고 있다. 주역의 설괘전(說卦傳)에 거북은 불(火)이라 하였으니, 산 아래 불(火)이 있는 형상으로 『주역』의 이치로 보면 산화비(山火賁)괘가 되니 비(賁)는 ‘꾸미고 장식하는 것’이다. 또한 불은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으로 보면 화극금(火克金)이 되어 금산촌의 김씨(金氏)가 사는 마을엔 아주 상극(相剋)이 되는 자연형상이다.
불로 쇠를 녹여버리는 형상이니 인물이 나올수 없는 형상이다. 뿐만아니라 삼구정은 불덩어리가 세 개가 있는 산화비(山火賁)괘의 형상으로 풍산평야의 풍요로운 삶 속에서 마을사람들이 꾸미고 장식하고 허세를 부리게 되어있다.
사람의 마음은 부유해지면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 쉽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다는 것은 허영과 퇴폐를 의미한다. 허영과 퇴폐에 절제와 반성이 없다면 이는 내리막 길을 굴러 떨어지고 있는 수레바퀴처럼 몰락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청음선생은 이를 걱정하여 《산화비괘》의 구오효 내용중에서 “백비(白賁)면 무구(无咎)리라” 즉 ‘꾸미지 않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라는 말을 취하여 《천택리괘》의 ‘꾸미지 않은 타고난 바탕 그대로 밟아가면 허물이 없다(素履往无咎)’에서 소(素)를 취하여 금산(金山)을 소산(素山)으로 바꾸고 〈꾸미지 않는 소박함〉을 좌우명으로 삼아 후세에 사치와 허영에 빠지지 않게 경계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을앞 삼구정에 있는 세 개의 불덩어리(거북)가 김씨성(姓)을 녹이는 화극금(火克金)의 상극(相剋)이 되므로 불을 끄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불을 끄기 위해 삼구정 왼쪽에 비보(裨補)로 ‘창평반월부수지’라는 인공 못을 조성하였고 근년에 삼구정 앞에 또 인공못을 조성하였다.
이로부터 소산마을은 꾸미지 않는 소박함(素)를 삶의 부적으로 삼아 후손들은 자신의 호를 소은(素隱), 소리(素履), 망소(望素)라 하였고. 입향조 비안현감의 11대손 김언행(金彦行)은 당호를 돈소당(敦素堂)이라 하였고, 삼당(三塘) 김영의 11대손 동양(東埜) 김양근(金養根)은 종택의 당호를 양소당(養素堂)이라 하였다.
또한 상락김씨의 종택 또한 삼소재(三素齋)라 하고 행소리(行素履), 식소찬(食素餐), 거소산(居素山)의 삼소(三素)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 당호 기문에 의하면 소(素)라는 것은 예로부터 성현들이 숭상한 말로서 타고난 착한 바탕에서 행한다(素其位而行), 꾸미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白賁无咎), 흰 바탕이 되어야 그림을 그린다(繪事後素), 소박함을 귀하게 여긴다(以素爲貴)라고 경전에서 말하였다. 부귀는 음란하고 간사해지기 쉽고, 빈천(貧賤)자는 비굴하고 쉽게 뜻을 바꾼다. 군자는 그 행동을 바르게 지키고자 한다면 어찌 그 근본이 진실되고 소박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덕을 온전히 지키자면 그 욕심이 없고 꾸밈이 없는 본래의 마음을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素)란 욕심에 물들지 않은 타고난 착한 마음이며, 깎고 꾸미며 장식하지 아니한 순수한 그대로의 모습이며, 거짓 없는 진실인 것이며, 무색, 백색, 질박한 것을 말한다. 우주의 근원을 태소(太素)라 하였다. 거짓 없는 진실, 그리지 않은 흰 바탕, 때묻지 않은 착한 심성,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인들이 추구하였던 소산마을의 ‘꾸미지 않는 소박함’의 정신을 우리 모두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