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퇴계선생의 도산기(陶山記)】

오토산 2024. 11. 2. 06:15

 

● 불원재 유교문화 해설(158)
【퇴계선생의 도산기(陶山記)】
퇴계선생은 50세시 풍기군수에서 물러나 도산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정착한 후
이듬해(1551)에 조그마한 서당을 짓고 10여년을 독서,강학한 곳이 계상서당(溪上書堂)이다.
 
계상서당은 너무 좁고 한적하여 제자들이 포부를 펴기에 적당치 않아서 60세에 새로이 마련한 서당이 도산서당이다.
이듬해(1561) 11월 퇴계선생이 서당 건립에 대한 소회와 감흥을 기술한 도산기는
당실(堂室)의 명칭과 주변자연에 명명(命名)한 의의를 밝히고 18절 7언시와 26절 5언시로
주변의 자연을 예찬(禮讚)한 도산잡영(陶山雜詠)의 서문이기도 하다.
이 도산기는 2021년 퇴계선생 친필을 판각하여 현재 농운정사 암서헌에 게판되어 있다.
 
○ 陶山記(도산기1)
靈芝之一支。東出而爲陶山。或曰。以其山之再成。而命之曰 陶山也。或云。山中舊有陶竈。故 名之以其實也。爲山不甚高大。宅曠而勢絶。占方位不偏。故其傍之峯巒溪壑。皆若拱揖環抱於此山然也。
영지산(靈芝山)2)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도산(陶山)이 되었다.
어떤 이는, “이 산이 두 번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산이라 불렀다”3) 하고,
또 어떤 이는, “옛날 이 산중에 질그릇을 굽던 곳이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따라 도산이라 하였다” 했다.
이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나 그 골짜기가 넓고 형세가 뛰어나며 방위(方位)도 치우침이 없어,
주위의 봉우리와 계곡들이 모두 읍(挹)하면서 이 산을 빙 둘러 안고 있는 것 같다.
 
山之在左曰。東翠屛。在右曰 西翠屛。東屛來自淸凉。至山之東。而列岫縹緲。西屛來自靈芝。至山之西。而聳峯巍峩。兩屛相望。南行迤邐 盤旋八九里許。則東者西。西者東。而合勢於南野莽蒼之外。
왼쪽에 있는 산을 동취병(東翠屛)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것을 서취병(西翠屛)이라 한다.
동취병은 청량산(淸凉山)에서 나와 도산 동쪽에 이르러 늘어선 산들이 멀리 아득하고,
서취병은 영지산에서 나와 도산 서쪽에 이르러 봉우리들이 높고 크다.
동취병과 서취병이 서로 마주 보면서 남쪽으로 구불구불 휘감아 8,9리쯤 내려가다가,
동쪽에서 온 것은 서쪽으로 들고 서쪽에서 온 것은 동쪽으로 들어 남쪽의 넓고 넓은 들판 아득한 밖에서 합세(合勢)한다.
 
水在山後曰 退溪。在山南曰 洛川。溪循山北 而入洛川於山之東。川自東屛而西趨。至山之趾。則演漾泓渟。沿泝數里間。深可行舟。金沙玉礫。淸瑩紺寒。卽所謂濯纓潭也。西觸于西屛之崖。遂幷其下。南過大野。而入于芙蓉峯下。峰卽西者東 而合勢之處也。
도산 뒤에 있는 시내를 퇴계(退溪)라 하고, 도산 남쪽에 있는 것을 낙천(洛川)이라 한다.
퇴계는 도산 북쪽을 돌아 도산 동쪽에서 낙천으로 들고,
낙천은 동취병에서 나와 서쪽으로 도산 기슭 아래에 이르러 넓어지고 깊어진다.
몇 리를 물을 따라 내려가고 올라가 보면 물이 깊어 배가 다닐 만하다.
금 같은 모래와 옥 같은 조약돌에 물 맑게 빛나며 검푸르고 차디차다.
여기가 이른바 탁영담(濯纓潭)이다.4) 서쪽으로 서취병의 벼랑을 지나서 그 아래의 물까지 합하고,
남쪽으로 큰 들을 지나 부용봉(芙蓉峰) 아래로 들어가는데,
그 봉(峯)이 바로 서취병(西翠屛)이 동취병(東翠屛)으로 와서 합세한 곳이다.
 
始余卜居溪上。臨溪縛屋數間。以爲藏書養拙之所。蓋已三遷其地。而輒爲風雨所壞。且以溪上偏於闃寂。而不稱於曠懷。乃更謀遷 而得山於山之南也。爰有小洞。前俯江郊。幽敻遼廓。巖麓悄蒨。石井甘冽。允宜肥遯之所。野人田其中。以資易之。
처음에 내가 계상(溪上)에 터를 잡고 시내를 굽어 두어 칸 집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양졸(養拙)하는 곳5) 으로 삼으려 했는데,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6)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계상은 너무 한적하여 포부를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아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도산 남쪽에서 땅을 얻었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골이 있는데, 앞으로는 강과 들이 내려다 보이고 깊숙하고 아늑하면서도 멀리 트였으며,
산기슭과 바위들은 선명하며 돌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가와7) 참으로 은둔하여 수양할 곳8)으로 적당하였다.
어떤 농부가 그 안에 밭을 일구고 사는 것을 내가 값을 치르고 샀다.
 
有浮屠法蓮者幹其事。俄而蓮死。凈一者繼之。自丁巳至于辛酉。五年而堂舍兩屋粗成。可棲息也。堂凡三間。中一間曰 玩樂齋。取朱先生名堂室記。樂而玩之。足以終吾身 而不厭之語也。
법련(法蓮)9) 이란 승려10)가 그 집 짓는 일을 맡았다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죽었으므로,
정일(淨一)이란 승려가 그 일을 계승하였다.
정사년(1557)에서 신유년(1561)까지 5년 만에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두 채가 그런대로 이루어져 거처할 만하였다.
서당은 모두 세 칸인데, 가운데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그것은 주자(朱子)의 명당실기(名堂室記)11)에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
[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東一間曰 巖棲軒。取雲谷詩 自信久未能 巖棲冀微效之語也。又合而扁之曰。陶山書堂。舍凡八間。齋曰時習。寮曰止宿。軒曰觀瀾。合而扁之曰隴雲精舍。堂之東偏。鑿小方塘。種蓮其中。曰凈友塘。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운곡(雲谷) 시의
“능하지 못함12) 을 스스로 믿은 지 오래거니 산속에 거처하며 미미하나마 효험 바라네”13) 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합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농운정사(舍)는 모두 여덟 칸이니, 재는 시습재(時習齋)14) 숙소는 지숙료(止宿寮)15)
마루는 관란헌(觀瀾軒)16) 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합해서 농운정사(隴雲精舍)17) 라고 편액을 걸었다.
서당 동쪽에 조그만 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였다.
 
又其東爲蒙泉。泉上山脚鑿。令與軒對平。築之爲壇。而植其上梅竹松菊。曰節友社。堂前出入處。掩以柴扉。曰幽貞門。門外小徑 緣澗而下。至于洞口。兩麓相對。其東麓之脅。開巖築址 可作小亭。而力不及。只存其處。有似山門者 曰谷口巖。
또 그 동쪽이 몽천(蒙泉)인데 샘 위의 산기슭을 파서 암서헌과 마주 보도록 평평하게 하여 단을 쌓고는,
그 위에 매화,대[竹],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
서당 앞 출입하는 곳을 사립문으로 가렸는데 그 문 이름을 유정문(幽貞門)18) 이라 하였다.
문 바깥의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 동구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서로 마주 보는데 그 동쪽 기슭 옆에 바위를 깎고 터를 닦으니 조그만 정자 하나를 지을 만하나,
힘이 모자라서 짓지 못하고 다만 그 자리만 남겨 두었다.
마치 산문(山門)과 같아 이름을 곡구암(谷口巖)이라 하였다.
 
自此東轉數步。山麓斗斷。正控濯纓潭上。巨石削立。層累可十餘丈。築其上爲臺。松棚翳日。上天下水。羽鱗飛躍。左右翠屛。動影涵碧。江山之勝。一覽盡得。曰天淵臺。西麓亦擬築臺。而名之曰 天光雲影。其勝槩當 不減於天淵也。
여기서 동으로 몇 걸음 돌면 산기슭이 끊어지고 바로 탁영담에 이르는데,
그 못 위에 커다란 바위가 마치 깎아 세운 듯 서서 여러 층으로 포개진 것이 10여 길은 됨직하다.
그 위를 쌓아 대(臺)를 만들었더니, 우거진 소나무는 해를 가리고,
위는 하늘 아래는 물이어서 새는 날고 고기 뛰며19) 물에 비친 좌우 취병산의 흔들리는 그림자가 강물에 잠겨
강산의 훌륭한 경치를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름을 천연대(天淵臺)라 하였다.
그 서쪽 기슭 역시 이것을 본떠서 대를 쌓고 이름을 천광운영대라 하였다.
그 훌륭한 경치는 천연대에 못지않다.
 
盤陀石 在濯纓潭中。其狀盤陀。可以繫舟傳觴。每遇潦漲。則與齊俱入。至水落波淸。然後始呈露也。余恒苦積病纏繞。雖山居 不能極意讀書。幽憂調息之餘。有時身體輕安。心神灑醒。俛仰宇宙 感慨係之。則投書携筇而出。
반타석(盤陀石)20) 은 탁영담 가운데 있다.
그 모양이 넓적하여 배를 매어두고 술잔을 돌릴 만하다.
큰 홍수를 만날 때면 소용돌이와 함께 모두 들어갔다가21) 물이 빠지고 물결이 맑아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나는 늘 고질병을 달고 다녀 괴로웠기 때문에, 비록 산에서 살더라도 마음껏 책을 읽지 못했는데
남몰래 걱정하다가 조식(調息)한 뒤 때로 몸이 가뿐하고 마음이 상쾌하여,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다가 감개(感槪)가 생기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서
 
臨軒翫塘。陟壇尋社。巡圃蒔藥。搜林擷芳。或坐石弄泉。登臺望雲。或磯上觀魚。舟中狎鷗。隨意所適。逍遙徜徉。觸目發興。遇景成趣。至興極而返。則一室岑寂。圖書滿壁。對案默坐。兢存硏索。往往有會于心。輒復欣然忘食。
암서헌에 임해 정우당을 구경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절우사를 찾기도 하며,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한다.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 구경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거나
물가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가까이하면서 마음대로 이리저리 노닐다가,
좋은 경치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 안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구할 때,
간간이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흐뭇하여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22)
 
其有不合者。資於麗澤。又不得則發於憤悱。猶不敢强而通之。且置一邊。時復拈出。虛心思繹。以俟其自解。今日如是。明日又如是。若夫山鳥嚶鳴。時物暢茂。風霜刻厲。雪月凝輝 四時之景不同。而趣亦無窮。
생각하다가 통하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좋은 벗을 찾아 물어보며,23)
그래도 알지 못할 때는 혼자서 분발해 보지만24) 억지로 통하려 하지는 않는다.
우선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그 문제를 끄집어내어 마음에 어떤 생각도 없이 곰곰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또 산새가 울고 초목이 무성하며 바람과 서리가 차갑고 밝은 달빛이 어리는 등
사철의 경치가 다 다르니 흥취 또한 끝이 없다.
 
自非大寒大暑大風大雨。無時無日而不出。出如是。返亦如是。是則閑居養疾。無用之功業。雖不能窺古人之門庭。而其所以自娛悅於中者不淺。雖欲無言。而不可得也。於是逐處。各以七言一首 紀其事。凡得十八絶。
그래서 너무 춥거나 덥거나 큰바람이 불거나 큰비가 올 때가 아니면,
어느 날이나 어느 때나 나가지 않는 날이 없고 나갈 때나 돌아올 때나 이와 같이 하였다.
이것은 곧 한가히 지내면서 몸 조리(調理)하기 위한 쓸모없는 일25)이라서 비록 옛사람의 문정(門庭)을 엿보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즐거움을 얻음이 얕지 않으니, 아무리 말이 없고자 하나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이르는 곳마다 칠언시 한 수로 그 일을 적어 보았더니, 칠언절구(七言絶句) 18 수(首)였다.
 
又有蒙泉・冽井・庭草・澗柳・菜圃・花砌・西麓・南沜・翠微・寥朗・釣磯・月艇・鶴汀・鷗渚・魚梁・漁村・烟林・雪徑・櫟遷・漆園・江寺・官亭・長郊・遠岫・土城・校洞等 五言雜詠二十六絶。所以道前詩不盡之餘意也。
또 몽천(蒙泉), 열정(冽井), 정초(庭草), 간류(澗柳), 채포(菜圃), 화체(花砌), 서록(西麓), 남반(南沜), 취미(翠微),
요랑(廖朗), 조기(釣磯), 월정(月艇), 학정(鶴汀), 구저(鷗渚), 어량(魚梁), 어촌(漁村), 연림(烟林), 설경(雪徑), 역천(櫟遷),
칠원(漆園), 강사(江寺), 관정(官亭), 장교(長郊), 원수(遠岫), 토성(土城), 교동(校洞) 등
오언(五言)으로 사물을 자유롭게 읊은 시 26수가 있으니, 이것은 앞의 시에서 다하지 못한 뜻을 말한 것이다.
 
嗚呼 余之不幸。晩生遐裔。樸陋無聞。而顧於山林之間。夙知有可樂也。中年妄出世路。風埃顚倒。逆旅推遷。幾不及自返而死也。其後年益老。病益深。行益躓。則世不我棄。而我不得不棄於世。乃始脫身樊籠。投分農畝。而向之所謂山林之樂者。不期而當我之前矣。
아! 나는 불행히도 뒤늦게 서울에서 먼 지방에서 태어나
투박하고 고루하여 들은 것이 없으면서도 산림(山林)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일찍 알았었다.
그러나 중년(中年)에 들어 망령되이 세상길에 나아가 바람과 티끌이 뒤엎는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돌아오지도 못하고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 뒤에 나이는 더욱 들고 병은 더욱 깊어지며 처세는 더욱 곤란해지고 보니,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가 세상에서 버려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굴레26) 에서 벗어나 전원(田園)에 몸을 던지니,
앞에서 말한 산림의 즐거움이 뜻밖에 내 앞으로 닥쳤던 것이다.
 
然則 余乃今所以消積病 豁幽憂。而晏然於窮老之域者。舍是將何求矣。雖然 觀古之有樂於山林者。亦有二焉。有慕玄虛 事高尙而樂者。有悅道義 頤心性而樂者。由前之說。則恐或流於潔身亂倫。而其甚則 與鳥獸同群。不以爲非矣。
그렇다면 내가 지금 오랜 병을 고치고 깊은 시름을 풀면서 늘그막을 편히 보낼 곳을 여기 말고 또 어디 가서 구할 것인가? 비록 그러하나 옛날 산림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현허(玄虛)27) 를 사모하여 고상(高尙)함을 일삼아 즐기는 사람이요,
둘째는 도의(道義)를 즐겨 심성(心性) 기르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전자의 주장에 의하면, 혹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하여 인간의 큰 윤리를 어지럽히는 데에 빠질까를 두려워하고,28)
심한 경우 새나 짐승처럼 살면서 그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由後之說。則所嗜者糟粕耳。至其不可傳之妙。則愈求而愈不得 於樂者有。雖然
寧爲此而自勉。不爲彼以自誣矣。又何暇知有所謂 世俗之營營者 而入我之靈臺乎。
후자의 주장에 의하면, 즐기는 것이 조박(糟粕)29) 뿐이어서
전해 줄 수 없는 묘한 이치에 이르러서는 구할수록 더욱 얻지 못하게 되니,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차라리 후자를 위하여 힘쓸지언정 전자를 위하여 스스로 속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니,
어느 여가에 이른바 세속의 명리(名利)를 좇는 것을30) 알아서 내 마음에 들어오게 하겠는가?
 
或曰。古之愛山者。必得名山以自托。子之不居淸凉而居此 何也。曰淸凉壁立萬仞。而危臨絶壑。老病者所不能安。且樂山樂水。缺一不可。今洛川雖過淸凉。而山中不知有水焉。余固有淸凉之願矣。然而後彼而先此者。凡以兼山水而逸老病也。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옛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명산(名山)을 얻어 의탁하였거늘,
그대는 왜 청량산에 살지 않고 여기 사는가?” 하여, 답하기를,
“청량산은 만 길이나 높이 솟아서 까마득하게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늙고 병든 사람이 편안히 살 곳이 못 된다.
또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려면 어느 하나가 없어도 안 되는데,
지금 낙천(洛川)이 청량산을 지나기는 하지만 산에서는 그 물이 보이지 않는다.
나도 청량산에서 살기를 진실로 원한다.
그런데도 그 산을 뒤로 하고 이곳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여기는 산과 물을 겸하고
또 늙고 병든 이에게 편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曰古人之樂。得之心。而不假於外物。夫顏淵之陋巷。原憲之甕牖。何有於山水。故 凡有待於外物者。皆非眞樂也。曰不然。彼顏憲之所處者 特其適。然而能安之爲貴爾。使斯人而遇斯境。則其爲樂 豈不有深於吾徒者乎。
그는 또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즐거움을 마음에서 얻고 바깥 물건에서 빌리지 않는다.
대개 안연(顔淵)의 누항(陋巷)31) 과 원헌(原憲)의 옹유(甕牖)32) 에 무슨 산과 물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바깥 물건에 기대가 있으면 그것은 모두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다” 하여,
나는 또, “그렇지 않다. 안연이나 원헌이 처신한 것은 다만 그 형편이 그런 상황에서도
이를 편안해 한 것을 우리가 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이런 경지를 만났더라면 그 즐거워함이 어찌 우리들보다 깊지 않았겠는가?
 
故 孔孟之於山水。未嘗不亟稱而深喩之。若信如吾子之言。則與點之歎。何以特發於沂水之上。卒歲之願。何以獨詠於蘆峯之巓乎。是必有其故矣。或人唯而退。 嘉靖辛酉日南至。山主老病畸人記。
그러므로 공자나 맹자도 일찍이 산수를 자주 일컬으면서 깊이 인식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대 말대로 한다면, ‘점(點)을 허여(許與)한다’는 칭찬이 왜 하필 기수(沂水) 가에서 나왔으며33)
‘해를 마치겠다’34) 는 바람을 왜 하필 노봉(蘆峰) 꼭대기에서 읊조렸겠는가?35)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자, 그 사람은 “그렇겠다” 하고 물러갔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동지(冬至)에 산주(山主) 노병기인(老病畸人)36)이 기술 하노라.
 
1)도산기 : 1561년 11월에 지은 「도산잡영」의 서문(序文)이기도 하다.
이 기(記)는 1566년에 임금께서 관직을 제수하고 특명으로 상경하다가 병을 얻어 중도에 사퇴하자
왕이 화공을 보내어 도산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고 이 기문을 쓴 병풍을 만들어 애완하였다.
2) 영지산 : 경북 안동 도산면 동부·분천·토계·온혜·의일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3) 《이아(爾雅)》에 “再成曰陶丘〔다시 만들어진 것을 도구라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설문해자》에 “陶,再成丘也. 在濟陰. 夏書曰‘東至于陶丘. 陶丘有堯城. 堯嘗所居. 故堯號陶唐氏’〔陶는
두 번 이루어진 언덕이다.
4) 탁영(濯纓) :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말로, 진속(塵俗)을 초탈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뜻하는데,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5) 양졸(養拙) : 재능이 부족하여 한가로이 지냄. 흔히 은사(隱士)의 겸사로 쓰인다.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숨기고 살아감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6) 선생 50세 2월에 처음으로 퇴계 서쪽(현 종택 왼편)에 자리를 잡고 살다.
이보다 먼저 하명동 자하봉(霞明洞 紫霞峯) 아래(도산초등 옛터)에 땅을 얻어 집을 짓다가 끝내지 못했고,
다시 죽동(竹洞 : 현 종택에서 하계 가는 길 가운데 왼편 계곡)으로 옮겼으나
또 골이 좁고 시냇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마침내 계상(溪上)으로 정하였으니
무려 세 번이나 옮겨 살 곳을 정한 것이다. 한서암(寒栖菴)을 짓다. 집의 이름을 정습(靜習)이라 하고,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7) 석정감열(石井甘冽) : 《역경(易經)》의 〈정괘(井卦)〉 "정렬한천식(井冽寒泉食)"에서 의미를 취하였다.
너그럽고 한가하게 자득(自得)하여 숨어 산다는 말이다.
“상구는 살찌게 물러남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上九 肥遯 无不利〕,
9) 법련(法蓮) : 당시 용수사(龍壽寺)의 승려. 선생께서 이문량(李文樑: 號 碧梧, 1498~1581)에게 보낸 편지에
“그 땅을 차지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헤아려 본다면 감히 지을 엄두도 내지 못하겠는데 중
법련이 그 일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니 이는 하나의 기이한 인연입니다.
10) 부도(浮屠) : 본래 범어(梵語 : sanskrit)의 음역(音譯)으로 부처(Buddha)를 가리킨다.
또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갈무리하는 사리탑(舍利塔) 또는 승탑(僧塔)을 이르기도 하고 승려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스님을 말한다.
 
11) 명당실기(名堂室記) : 주자(朱子)의 서재(書齋) 회당(晦堂)에 걸린 기문
12) 남송(南宋)의 학자인 유자휘(劉子翬)는 주희(朱熹)의 아버지와 벗이었는데,
그가 주희의 자(字)를 원회(元晦)라 지어 주며 남긴 축사에
“나무는 뿌리에 감추어야 봄의 자태가 찬란히 펴지고 사람은 몸에 감추어야 신명이 안에서
넉넉하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고 하였다.
여기서 ‘능하지 못한’ 것은 이 말을 ‘실천함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3) 이 구절은 주자의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 중 「회암(晦庵)」 시에 나온다.
晦庵 회암
憶昔屛山翁 생각하니 지난날 병산선생께서
示我一言敎 나에게 한마디 가르침 주셨는데
自信久未能 오래도록 잘하지 못함을 스스로 믿었으니
巖棲冀微效 바위틈에 살면서 미미한 효과 바라도다
14)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주에 “습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새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하였다.
 
15) 《논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자로를 머물러 자게하고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먹이고  그의 두 아들을 뵙게 하였다.
다음 날 자로가 떠나와서 공자에게 아뢰니, 공자가 “은자이다”라고 말하고, 자로에게 돌아가 만나 보게 하였는데,
다시 와 보니 떠나가고 없었다〔止子路宿 殺雞爲黍而食之 見其二子焉 明日 子路行以告 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
至則行矣〕
16)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물을 관찰하는 방법이 있다.
반드시 여울을 보아야 할 것이니, 그러면 그 물의 근원이 있음을 알 것이다〔觀水有術 必觀其瀾〕”라는 말이 나온다.
 
17) 농운(隴雲) : 남조(南朝) 양(梁)나라 처사(處士) 도홍경(陶弘景,452-536)의 「조문산중하소유부시이답(詔問山中何所有賦詩以答)」에, “산중에 무엇이 있나, 언덕 위에 흰 구름이 많네. 다만 스스로 유쾌하고 기뻐할 뿐이요,
그것을 가져다 임금에게 줄 수는 없네[山中何所有, 隴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 하였다.
18) 《주역》 〈리괘(履卦) 구이(九二)〉에 “바른 길을 밟으니 탄탄하다.
마음이 조용하고 안정된 사람이라야 바르고 곧으며 길하리라〔履道坦坦 幽人貞吉〕”라는 말이 나온다.
 
19) 새는 날고……고기 뛰며: 연비어약(鳶飛魚躍) : 《중용장구》제12장의 “시(詩)에서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다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고 하니,
이는 천지의 도가 상하로 밝게 드러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20) 소식(蘇軾 : 소동파) 시 〈유금산사(遊金山寺)〉에도 반타석(盤陀石)이 보인다.
 
21) 與齊俱入 :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자맥질을 잘하는 사람이
“나는 소용돌이치는 물속에 함께 빠져 들었다가 다시 용솟음치는 격류와 함께 빠져 나온다
〔與齊俱入 與汨偕出〕”고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22) 밥 먹는 …… 잊어버린다: 《논어》 〈술이(述而)〉에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면 발분하여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리를 터득하면 즐거워서 걱정도 잊어버린 가운데, 늙음이 장차 닥쳐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23) 자어이택(資於麗澤) : 자(資)=자(咨 : 묻다), 이택(麗澤)=학우(學友)끼리 서로 도와 학문과 품성을 닦는 일,
즉 같이 공부하는 친구. 주역 중택태괘에 상에 이르기를 연결(걸린) 못이 태(兌)이니 군자가 본받아서 붕우강습하느니라. 두 못이 붙어 있으니 서로 번갈아 맑아지고 불어나며 유익해 지는 것을 말한다.
[易經 重澤兌 掛 象曰 麗澤 兌 君子以 朋友講習] 즉 벗들과 같이 공부하니 서로 유익해진다는 뜻이다.
24) 분비(憤悱) : 분비는 『논어』에 있는 말인데, 분(憤)은 마음에서 알려고 애쓰는 것이며
비(悱)는 입으로 말을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모양을 말한다.
 
25) 쓸모없는 일 : 《장자》에서 나온 말인데 세상에는 쓸 데가 없으나 참으로 자신에게는 쓸 데가 있다는 말이다.
26) 번롱(樊籠) : 번(樊)은 짐승을 가두어 두는 우리이고, 농(籠)은 새를 가두는 조롱(鳥籠)이다.
여기서는 벼슬살이를 가리킴.
 
27) 현허(玄虛) : 노자ㆍ장자의 도이다.
28) 《논어》 〈미자(微子)〉에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하여 인간의 큰 윤리를 어지럽히고 만다
〔欲潔其身 而亂大倫〕”라고 은자(隱者)를 비평한 말이 나온다.
 
29) 조박(糟粕) : 제 환공(齊桓公)이 당상(堂上)에서 글을 읽는데 수레바퀴를 만들던 목수가,
“임금님이 읽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니, 환공은 답하기를, “옛날 성인의 글이다” 하였다.
목수가, “그러면 그것은 성인의 찌꺼기[糟粕]입니다” 하였다.
환공이 물으니 목수가 대답하기를, “신이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로 한 평생을 살아오는데
연장이나 법도는 자식에게 전하여 줄 수 있으나
연장을 천천히 놀리고 더디게 놀리는 묘한 솜씨는 자식에게 전할 수 없습니다.
옛날 성인은 글은 남겼으나 그 묘한 뜻은 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글은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장자』.
30) 《초사(楚辭)》「구장(九章) 추사(抽思)」에 “일찍이 길을 알지 못했더니, 달과 별을 통해 방향을 알았네.
서울[郢]로 빨리 가고자 하나 가지 못함은, 영혼이 길을 알았지만 홀로 가서 함께할 이 없기 때문이네
〔曾不知路之曲直兮 南指月與列星 願徑逝而不得兮 魂識路之營營〕” 하였다.
 
3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顔回)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32) 원헌의 옹유: 춘추 시대 송(宋)나라 사람인 원헌(原憲)은 자가 자사(子思) 또는 원사(原思)로, 공자의 제자이다.
그가 노(魯)나라에 살 때 매우 가난하여 오두막집 마당에는 띠풀이 무성하고
쑥대로 만든 방문은 온전치 못했으며 깨진 독으로 구멍을 내서 들창문으로 삼고서,
위로는 비가 새고 아래는 습기가 찬 방에서 바르게 앉아 금슬(琴瑟)을 연주했다고 한다.
 
33)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기우제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쐰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34) 주자의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에 “온종일 스스로 즐겨도〔卒歲聊自娛〕”라는 구절이 있다.
 
35) 주희가 1175년 가을에 건양현(建陽縣) 서북쪽 70리 거리에 위치한 노산 꼭대기 운곡(雲谷)에다
회암(晦庵)이라는 초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36) ‘늙고 병들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나 하늘의 뜻에 부합하여 사는 사람’라는 뜻이니,
선생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