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경술국치의 한이 서린 치암고택]

오토산 2025. 4. 28. 04:42
[경술국치의 한이 서린 치암고택]
▢ 고택소개
치암고택(경북민속문화재11호)은 조선 고종때에 언양현감, 홍문관 교리를 지낸
치암(恥巖) 이만현(李晩鉉,1832-1911)의 고택이다.
그는 퇴계선생의 11대손으로 문과(文科)로 벼슬길에 나아가 삼사(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관료로
기울어 가는 나라를 지키고자 직분과 소임을 다하였다.
 
은퇴후 만년(晩年)에 경술국치를 당하자
“5천년 예의의 나라가 수치와 욕됨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오늘날 선비 된자 죽을 곳도 없으며, 살아도 죽은 거와 같으니 내 장차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며,
날마다 허둥지둥 눈물을 흘리고 어쩔줄 몰라하며
“집앞의 바위도 5천년을 제자리 지키고 있거늘 이 바위에 조차 부끄럽다”하여
치암(恥巖)이라 자호(自號)하고 통분(痛憤)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이듬해 세상을 마친 우국지사(憂國志士)이다.
 
이집은 당초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안동시 안막동으로 이건하였다.
건물규모는 본체 22칸 ㅁ자형 기와집으로 5간의 솟을대문과 7간 별당채, 7간 내별당, 4간의 주방이 있다.
집의 구조는 안채보다 사랑채가 더 높고, 사랑채의 좌우가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의 특이한 형태이며
사랑채에 감실(龕室)이 있고, 높다란 헌함(軒檻) 누마루가 특색이다.
 
치암고택의 가계는 기곡(시조)-작산(송안군)-두루(경류정)-온혜(노송정)-상계(추월한수정)-하계(수졸당)-
원촌(원대정)으로 가통이 이어져 직계로 불천위가 5분이며,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직계 고택,종택이 10집이나 되는
그 유례는 국내외로 찾아볼 수가 없는 600년의 전통과 명문가의 맥을 이은 고택이다.
 
□ 不 遠 齋 記
안동 映南山기슭 안막재 아래에 국가문화재인 恥巖古宅이 있다.
이 고택은 退溪선생의 11대손이며 조선조 文科로 홍문관교리, 언양현감을 지내고
은퇴후 庚戌國恥의 치욕을 당하자 ‘집 앞의 돌에 조차 부끄럽다’는 뜻으로 恥巖이라 自號하고
비분강개하여 憂國逝世한 치암 李晩鉉선생의 고택이다.
이집은 도산 遠村마을에 있었는데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一九七六년
치암의 曾孫인 重隱 李源琫公이 誠力을 다해 文化財로 지정받아 이곳으로 移建하였다.
 
치암공의 胄孫이자 중은공의 四형제중 맏분인 현안동문화원 李東秀원장은
儒家의 후예답게 성균관청년유도회 중앙회장을 역임하였고 동양학을 전공하여
周易으로 학위를 취득한 哲學博士로서
평소에 『주역』의 〈不遠復이라 无祗悔니 元吉하니라〉에서
착한 本性을 保存하겠다는 의지와 10대조 遠臺處士의 〈遠俗塵 遠恥辱〉의 가르침을 지켜온
'원촌마을에서 멀지 아니하다’는 뜻에서 서재 이름을 《不遠齋》라고 하였다.
 
내가 因緣이 있어 고택에 출입하던중 愚衲에게 書齋記를 써주기를 下託함에
菲才鈍根임을 무릎쓰고 辭讓치 못하여 短文으로 顚末을 記錄하고자 한다.
 
이 고택의 書齋에서 返本還源과 原始復本을 위한 끊임 없는 工夫을 통하여
修身齊家, 治國, 平天下하는 人物이 계계승승 하기를 懇切히 祈願하는 바이다.
檀帝紀元 四三五三年 庚子 重陽節에
華城 龍珠寺 肇翁 無門 謹記
茂朱 艮向齋 玄樵 이호영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