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진성이씨 일가(派)들의 내력

오토산 2022. 4. 19. 15:20

 

진성이씨 일가(派)들의 내력
松河22翰邦57추천 0조회 5421.11.02 16:08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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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경자보庚子譜(西紀一六○○年)에는 내외손內外孫을 다 등재登載하고 있어서 아마도 찾아보기 쉽게 하기위해서 파명派名을 모두 이름으로 하지 않았나 생각 된다. 즉卽 이양검파李養儉派,남백경파南伯庚派,유봉수파柳鳳壽派,이우양파李遇陽派,정보문파鄭普文派,이주파李疇派,박근손파朴謹孫派,권종파權悰派,이흥양파李興陽派,이계양파李繼陽派,손의파孫義派 모두 십일파十一派이다. 이중 친손親孫은 4파四派이다.
 
무진보戊辰譜(肅宗十四年,西紀一六八八年)는 경자보庚子譜와 같은 방법으로 간행刊行을 하였고, 무오보戊午譜(正祖二十二年,西紀一七九八年)부터는 풍기파豊基派,읍파邑派,주촌파周村派,일직파一直派,의성파義城派,구노동파九老洞派,망천파輞川派,온계파溫溪派,영해파寧海派,용궁파龍宮派,대헌공파大憲公派,계상파溪上派,송재공파松齋公派,진보파眞寶派,등친손等親孫으로 구성된 파명派名만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이 西紀一九一二年에 간행刊行된 임자보壬子譜에는 97파九十七派(派名省略)로 되어있다.
 
* 세거지世居地 : 시조始祖의 생거지지生居之地는 현現 청송군靑松郡 진보면眞寶面 이촌李村이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시조始祖가 이촌李村을 떠나 청기현靑己縣(현청송읍現靑松邑)기곡岐谷(감곡甘谷)에 살았으나 洪武十六年(西紀一三八三年)고려우왕9년高麗愚王九年 계해癸亥 왜구寇倭의 노략질이 심하고, 고려왕조高麗王朝도 서서히 해가 질무렵 무렵, 송안군松安君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避하여 살찐땅 아름다운 산수山水에 세상世上 풍진風塵을 잊을만한 외따른 안동安東땅 풍산현豊山縣 마라촌磨羅村 (마래輞川) 에 옮겨 살았다.
 
송안군松安君을 봉향奉享하는 작산사鵲山祠 상량문上樑文에 [시거망천승지始居輞川勝地 만개주촌오구晩開周村奧區]라 했으니 송안군松安君은 만년晩年에 부북주촌府北周村(현現 안동시安東市 와룡면臥龍面 주하리周下里)에 터전을 열어 정착定着한 것이 분명分明 하다고 사료史料 된다.
 
송안군(松安君)은 이남(二男)을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운구(云具)이고 참의(參議) 이다. 차남(次男)은 운후(云侯)인데 부정(副正)이다. 후(後)에 이증손 우(以曾孫 堣)의 귀(貴)로 통훈대부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을 증직(贈職) 받았다.
 
참의(參議) 운구(云具)는 삼남(三男)을 두었다.장남(長男)은 양공(養恭)이고,둘째는 양검(養儉)인데 군수(郡守)이고, 셋째는 양호(養浩)이며 주부(主簿)이다. 장남(長男) 양공(養恭)의 후손(後孫)들은 경자보(庚子譜)(西紀一六○○年),무진보(戊辰譜)(西紀一六八八年),무오보(戊午譜)(西紀一七九八年),임자보(壬子譜)(西紀一九一二年)간행시(刊行時)까지도 등재(登載)를 못하였고,셋째 주부(主簿) 양호(養浩)는 아들 후담(后聃)를 두었으나 후사(後嗣)를 보지못하고 무후(无后) 되었으며, 군수양검(郡守養儉)은 삼남(三男)을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기담(基聃)이고 현감(縣監)이다. 그의 墓碑文을 參考하면 代代로 岐谷(甘谷)에 살았다 했으니 周村에서 다시 先鄕으로 돌아 갔음이 分明하나 後孫이 없다. 次男은 如聃인데 正郞이다. 正郞이 豊基縣 栍峴에 살았으므로 戊午譜上에는 豊基派라 했고,그後 正郞의 五代孫 友松이 豊基縣 殷豊(現 醴泉郡 下里面 殷豊里)으로 移居한 까닭에 壬子譜上에는 殷豊派라 했다. 正郞의 二男인 別侍衛 允貞의 後孫은 계속 栍現에 世居하고 있어 栍現派라 한다. 三男은 從聃인데 進士다. 戊午譜上에는 邑派라 했으나 進士의 五代孫 天彛가 義城 並方으로 移居하여 世居한 까닭에 壬子譜上에는 並方派라 했다.
 
司僕寺正 云侯는 子弟를 두분을 두었다. 長男은 禎인데 벼슬이 善山都護府使이르렀고, 以曾孫 滉의 貴로 嘉善大夫戶曹參判이다. 二男은 祥인데 无后이다.
戶曹參判 禎은 三男六女를 두었다. 庚子譜를 살펴보니 參判의 曾孫代에 각지의 內外孫이 무려 一三三名이다. 그의 後孫들이 繁昌하여 기틀을 마련하고 世上에 드러나 宗族이 되게 했음을 가히 알수 있다. 孫子 堣(參判),曾孫 瀣(大司憲),滉(贈領議政)같은분이 연달아 일어나서 한 世上을 울렸고,退溪는 道學을 처음으로 밝혀서 萬世의 師表가 되어 東方의 朱子로 尊崇되었으며 外孫으로는 芝山 曺好益,松巖 權好文같은 어진분들이 世上의 모범이되어 書院을 세워 祭享을 올리니 이는 진실로 어진이는 그 後孫이 繁昌 한다고 했으니 믿을만 하다.
參判 禎의 長男 遇陽은 武科에 登第하시어 벼슬이 仁同縣監으로 끝내셨다. 縣監 遇陽의 子女는 一男 一女를 두었고 아들은 哲孫(承義副尉)이다. 副尉 哲孫은 세분의 아들을 두었는데 長男은 壎인데 護軍이고, 次男은 堪
인데 副司勇이고, 副司勇堪은 伊溪派이다. 셋째는 從이다. 從은 禮安 虎洞으로 移居하여서 虎洞派라 한다. 護軍 壎은 二男을 두었는데 長男은 訓導 演이고 차남은 直長 漢이다.訓導 演의 後孫이 周村에 世居하고 있어서 周村派라 했고, 直長 漢은 西澗에 世居하였으나 長曾孫 敬遵이 晩年에 설가하여 一直에 移居하여 살았으므로 一直派라 한다. 直長 漢의 三男 希程 이 西澗에서 義城으로 移居하여 世居하고 있어 義城派(現 舍谷派)라 하고, 副司勇 堪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長男 沃은 无后이고 次男은 濟인데 벼슬은 通政大夫軍資監正이다. 軍資監正 濟는 아들 셋을 두었고 長男은 胤男이며, 次男은 亨男(進士,壬亂義兵大將)은 九老洞派이고, 三男은 好男(承仕郞敎授) 龜川派이다.
 
參判 禎의 次男은 興陽이며 武科에 及第하여 벼슬은 訓練參軍이다. 參軍 興陽은 松安君이 처음으로 移居한곳 磨羅村(輞川)으로 옮겨서 世居 하고 있어 輞川派라 한다.
 
參判禎의 三男은 繼陽인데 進士하고, 孫子 滉의 貴로 吏曹判書를 贈職받았다. 判書 繼陽은 三十一歲되던해 甲戌年에 宣城北쪽 溫溪里(現 安東市 陶山面 溫惠里)에 隱居해 살면서 泉石을 즐겼다. 判書 繼陽은 二男을 두었는데 長男은 埴인데 生員이고 아들 滉의 貴로 左贊成(從一品)을 贈職받았고, 둘째 아들은 堣인데 벼슬은 參判이다. 左贊成 埴은六男을 두었는데 潛,河,漪,瀣,澄,滉 이다. 長男 潛은 忠順衛이며 一男二女를 두었다. 長男은 寅인데 따님만 둘을 낳으시고 无后가 되었으며,
二男은 河이며 訓導이다. 後孫이 判書公이 卜居하신 溫溪里(現 溫惠里)에 世居하고 있어 溫溪派(現 溫惠派)라 하였고, 訓導 河의 次男 察訪 宏이 醴泉縣 白松里(現 醴泉郡 虎鳴面 白松里)에 移居하여 世居하고 있어 醴泉派(現 白松派)라 하고, 訓導 河의 季子 宬의 아들 主簿 善道가 寧海에 移居하여 世居를 하였으므로 寧海派(現 元臯派)라 한다.
贊成公의 三子 忠順衛 漪가 龍宮縣 大竹里(現 醴泉郡 龍宮面 大竹里)에 移居하고 있어 龍宮派(現 大竹派)라 했고, 贊成公 四子 瀣는 溫惠里에 世居하고 있으나 벼슬이 大司憲이므로 大憲公派(現 溫溪公派)라 했다. 大司憲 瀣는 五子를 두었으며 長男은 從仕郞 宓이며 无后인데 再從弟 冲과 從子 味道가 侍養을 하였다. 二男은 甯이며 벼슬은 縣監을 하였고, 三男 은 㝯이며 벼슬은 縣監을 하고 遠庵派이다. 四子는 寘인데 벼슬은 從仕郞이며 宜仁派 이다. 五子는 寭인데 벼슬은 吏曹佐郞하고 甘泉派이다. 贊成公 五子 澄도 亦是 溫惠里에 世居하였으나 벼슬이 察訪이라 察訪公派(現 莘野停派)라 하였다. 察訪 澄은 二男을 두었는데 長男은 忠順衛 宙인데 五男二女를 두었다. 長男은 勉道인데 參奉을 하였고 五男을 두었다. 長男은 瑛이며, 二男 珣이 忠淸道 玉川으로 移居하여 玉川派를 이루었으며, 三男은 璵인데 訓導이며 陶淵派이고, 四男은 瑨인데 善山派 이다. 忠順衛 宙의 三男은 從道인데 居昌派다.
察訪 澄의 二男은 騫인데 孝行賞薦擧 直長內賜孝經이며 東澗亭派이다.
贊成公의 六男 滉은 判中樞府使를 하고 領議政을 贈職 받으셨다. 溪上(現 安東市 陶山面 土溪里) 卜居하여 世居하고 있었으므로 溪上派(現 上溪派 )라 했다.
判中樞府使 滉은 三男을 두었는데 長男이 僉正 寯이고 二男은 寀인데 无后였다. 敬道(寂의長子)의 맏이 崑(現 蔚珍派)의 後孫들이 侍養을 하고 있다. 三男 寂은 通德郞을 했으며 三男을 두었으며 烏赤派이다. 僉正 寯은 三男을 두었는데 長男은 直長 安道인데 三女를 두었지만 後嗣가 없어서, 詠道의 二子였던 嶷이 系后가 되었다. 二男은 將仕郞 純道인데 一男二女를 두었다. 三男 詠道는 三男三女를 두었으며 벼슬이 正郞,原州牧使,宣武原從勳을 하고 下溪派이다.
吏曹參判 堣는 一男二女를 두었고, 松齋派(現 松堂派)이다. 長男 壽笭은 三男二女를 두었고,벼슬은 修義副尉,察訪을 하였으며,長男 憑은 副率僉正에 薦擧되었고,二女를 두었다.
둘째 潔은 二男二女를 두었고,벼슬은 牧使이며 道淵派이다.
셋째 冲은 三男을 두었고,벼슬은 忠順衛이며 古山派 이다.
始祖 密直司의 二男 子芳의 後孫들은 庚子譜(西紀一六○○年)를 刊行 할때는 子孫들이 未詳이였으나 壬子譜(西紀一九一二年)를 刊行할때 靑松郡 眞寶面 後坪里일대에 世居하고 있던 後孫들을 찾아서 登載하였는데, 後坪派이다.



출처: 진성이씨(眞城李氏)를 사랑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眉山)明基21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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