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송재종택과 도계정사】

오토산 2024. 5. 15. 06:18
【송재종택과 도계정사】
 
도산면 온혜리에 송재 이우선생의 유서가 깃든 퇴락된 도계정사와 송당종택의 보수정비사업을
시,도의 지원과 이경락 대종회장의 성력으로 2018년에 착수하여 6년만에 공사를 완료하고
2024년 5월 4일 준공하였다.
 
진성이씨 노송정종택이 있는 온혜리는
서쪽에는 용두산(龍頭山)에서 흘러내린 용계(龍溪)가 마을앞에서는 온계(溫溪)가 되고,
북쪽 태자리에서 마을 동쪽으로 흘러내린 청계(淸溪)가 마을 입구에서 합수되어 쌍계(雙溪)를 이루어
남쪽으로 흘러 도계(兜溪)가 되고 아래로 흘러 퇴계종택 앞에서 퇴계(退溪)가 되어
하계를 거쳐 낙천(洛川)에 합쳐진다.
 
퇴계의 상류마을을 상계(上溪), 아래쪽을 하계(下溪), 퇴계의 남쪽 마을을 계남(溪南),
재 넘어 마을을 원촌(遠村)이라 하는데 이 곳은 대개 진성이씨 후손들이 사는 마을로 ‘추로지향’이라 일컬어진다.
 
송재 이우선생은 퇴계의 숙부이며
도계정사(兜溪精舍)는 안동 도산면 소재지 네거리에서 퇴계종택 방향 200m 우측 도계 개울가에
14대종손(鍾洙)이 기거하였던 송재종택과 함께 있고 청음석(淸吟石) 시비가 입구에 있다.
 
도계(兜溪)라 하고 도계정사(兜溪精舍)라 명명한 뜻은
송재선생과 자질(子姪)들의 유서(由緖)가 깃든 이곳을 후세들이
신선이 사는 이상세계 도솔천(兜率天)으로 미화하여 도계정사라 한 것인지,
아니면 개울가의 바위가 두건같이 생겨서 도계라 한 것인지 상고할 길이 없다.
 
○ 송재 이우(李堣,1469~1517)
이우선생의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로 진사 노송정 이계양(繼陽)의 둘째 아들이며 퇴계의 숙부이다.
1492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498년(연산군 4)에 진성이씨 최초로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조에
사간원정언, 헌납, 장령, 이조좌랑, 병조정랑, 군기시부정을 지냈고,
승정원 동부승지 재임시 대궐 숙직중에 궐밖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궐문을 열고 나가자
반정군에 포위되어 대비전에 중종등극의 전교를 받아오는 승지의 중책을 맏게 되어
졸지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청해군(淸海君)에 봉해졌다.
 
그 후 우부승지, 진주목사, 경연특진관, 호조참판,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외직을 청하여 강원도관찰사, 경상감사, 1515년 안동부사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다.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그의 시문 중 ‘딱다구리’라는 시는 우리 나라 한시사(漢詩史)에서 명시로 꼽히고 있다.
그는 정신과 기골(氣骨)이 청수(淸秀)하고, 운치(韻致)가 고원(高遠)하며 온량개제(溫良愷悌)하여
효도(孝道)와 행의(行誼)에 돈독(敦篤)하였다. 특히 재질(才質)이 뛰어나 조정에서 밝게 드러났다.
 
1512년 관직에서 물러나 장남 수령(壽苓), 조카 온계 해(瀣), 퇴계 황(滉) 등자질들의 교육에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
시집 《귀전록(歸田錄)》과 《동국사략(東國史略)》 2권과 『송재집』 1권이 전하며.
묘갈(墓碣)은 조카 퇴계가 찬(撰)하였다,
1937년 수곡의 묘소 입구에 동강 김영한(金寗漢)이 찬한 신도비가 세워지고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啄木/딱다구리 --이 우--
粲粲彩羽明/찬찬채우명/울긋불긋 채색 깃 분명하여
照影朝日紅/조영조일홍/붉은 아침 햇살이 비추이네.
一樹硺未盡/일수탁미진/한 나무 다 쪼지 못하고
又向槎牙槐/우향사아괴/또 엉성한 괴목나무로 옮기네
柳中翩翩謀爾腹/류중편편모이복/버들속에서 팔랑팔랑 너의 배 채우려 하나
於木亦足除內訌/어목역족제내홍/나무에도 속병 없애주니 만족하네.
雖然木朽蠧乃生/수연목후두내생/그러나 나무도 이지러지면 좀이 생기니
啄之己晩何言功/탁지기만하언공/이미 쪼아 버렸으니 어찌 공을 말하랴.
 
○ 도계정사기
온계 통로에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도계"는 곧 우리집의 근원이 되는 곳이다.
흐르는 물 아래에 반석이 있으니 내려다 보면 물이 맑고 깨끗하여 좋아할만 하였다.
조선조 중종때 선조 송재선생께서 강원관찰사로 계실때 향리에 돌아와 반석 위에서 시 한구절을 읊었는데,
이때 종선조(從先祖) 퇴계선생께서는 어린시절 모시고 유람하셨다.
 
그 뒤 30여년후 퇴계선생은 여러 형과 조카와 함께 여기에서 만나 옛일을 생각하며 느낀바로
차운시를 읊고 겸하여 바위 이름을 선조시(先祖詩) 청음환패의(淸吟還敗意)라는 구절에서 취하여
‘청음석’이라 명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 반석은 우리문중의 유적이 된지 사백여성상이 지난 것이다.
조상의 자취가 남아있는 계산일구를 바라보면 어찌 조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두 할아버지께서 소풍하시며 시를 읊고 좋아하시던 자리이리오.
 
지난 정사년(1917)에 유계(儒契)를 모아 정사를 지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무인년(1938)에 여러 족친들이 모여 다 말하기를 이 일은 이루지않을 수 없으므로
각자 형편대로 추렴하여 기묘년(1939) 봄에 반석에서 한발 남짓한 언덕 위에 터를 닦았다.
 
이듬해에 정사 여섯칸 재사 열두칸 문간채 네 칸을 짓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를 하는동안 족형 종소(鍾韶) 족제 종한(鍾漢)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맡아 감독하고
퇴계종손 충호(忠鎬)씨 노송정 종군 범교(範敎)도 많은 도움을 보태었다.
 
정사가 낙성이 된 뒤에 편액을 도계정사, 마루를 청음헌이라는 현판을 앞에 걸고
마루에는 송재 퇴계 숙질분의 시판과 뒤를 이어 차운한 제현들의 시를 판각해서 붙이고 보니
사백여년 동안 긴 세월속에 묻혀버렸던 옛일이 어제와 같이 새롭구나.
 
지금부터 후손들이 이곳에 자주와서 정사에 붙여둔 현판과 시판을 우르러 보면
선조의 당일 일을 추모할 수 있을 것이며
‘비스듬히 우뚝한 바위에 조용히 맑은 한시내가 돌아 흐르네’(坡陀巨石在, 窈窕一溪回)라는
퇴계선생의 시귀가 이 곳의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할 것이다.
 
정사 창건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나에게 기문이 없을 수 없다고 하니
마침내 종수(鍾洙)가 외람되이 그 전말을 적어서 뒷날의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경진(1940)년 5월 5일 송재 14세손 鍾洙 謹記 (송재 14대종손)
14세손 鍾國 書 (녹동파 敬庵 漢膺 玄孫)
 
○ 도계정사 중수기
우리 일문(一門)의 근원지인 온혜에서 아래로 흐르는 개천을 도계(兜溪)라 하였는데
송재 이우(李堣,1469~1517)선생이 강원관찰사 재임시 어버이를 뵙고자 고향에 돌아와
도계 반석에 소요(逍遙)하면서 자질(子姪)들이 착한 심성을 길러 후일의 성취를 기약하는 시를 읊었고,
그 후 퇴계는 숙부를 따라 소풍하였던 이 바위에서 옛 일을 회상하면서 시를 읊고
이 바위를 숙부의 싯구(詩句)에 따라 청음석(淸吟石)이라 한 아름다운 사연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집이 도계정사이다.
 
도계정사 마루를 청음헌(淸吟軒)이라 하였는데 선현의 시판과 14대종손 이종수(李鍾洙)가 쓴 기문이 붙어있고
마루 밖에는 현판이 걸려있다. 창건기문에 정사를 짓게 된 연유와 전말(顚末)이 잘 드러나 있다.
 
조상의 유서(由緖)가 깃든 유적을 소중히 보존하여 후세에 넘겨주는 일이 후손된 도리인데
1940년에 도계정사와 주사(廚舍)가 지어진 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비바람에 찟기어
기울고 퇴락(頹落)하여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였으나 세상이 핵가족화 되고
후손들의 추렴(抽斂)으로 보수재원 마련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우리 대종회 이경락(李京洛)회장이
지난 10여년간 조상의 위선사업에 온 힘을 쏟아 큰 업적을 이룩하였는데
2018년부터 도계정사의 중수를 위해 발벗고 나서서 2019년에는 도로변에 청음석 시비를 세우고
이어서 경상북도 김관용(金寬容)지사와 이철우(李喆雨)지사의 힘을 입어
국,도비 11억원의 정부예산을 들여 지난 5년간 문화재공법에 맞도록 도계정사와 주사, 대문채를
전면 해체 보수하고 주위에 토석담장을 둘러 공사를 완공하게 되었다.
 
실로 이 사업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도 조상의 음덕과 대종회장의 후손된 도리로 이룩된 것으로
우리 일문의 광영(光榮)이 아닐 수 없다.
 
공사가 완공되고 불민한 나에게 기문을 쓰라 명하니
어쩔 수가 없어서 그 간의 경과를 소략하게 기록하고 생각하기를
도계정사 앞에 흐르는 실개천과 아름다운 청음석은 옛날과 변함이 없다.
당시 숙질간에 있었던 기대와 효성이 시문에 남아 있으니 정사를 짓고 중수한 지극한 정성을 잊지 말고
조상의 아름다운 정신을 계계승승 이어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23 계묘(癸卯)년 가을 시조 22세손 東秀 근기 (원촌파 恥巖 주손)
 
○ 청음석 차운 (퇴계)
溫溪下流有盤石臨溪 辛未年中叔父松齋府君以江原監司 來觀出游石上 滉以童子侍側 有紅衣官人來謁 乃昌樂丞也
叔父有詩曰 “欲得溪山妙 松門獨自回 淸吟還敗意 誰遣督郵來” 今與諸兄姪會此 追念前事感歎久之 因名其石曰
‘淸吟石’ 用其韻 二絶云
 
온계 하류의 시냇가에 넓적한 바위가 있다. 1511(辛未)년에 숙부 송재부군께서 강원감사시에 오셨다가 보시고
나아가 바위 위에서 노셨다. 내가 동자로서 곁에서 모셨더니 붉은 옷을 입은 관원이 와서 아뢰니 창락역의 역승이었다.
숙부께서 시로서 이르기를 “계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소나무 가린 산문을 홀로 돌았네.
흥겨워 시 읊다가 맑은 뜻이 깨어지니, 뉘라서 저 독우를 보내왔단 말인고.”하셨다.
이제 여러 형님과 조카와 이곳에 함께 모여 옛일을 추억하면서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윽고 그 돌을 ‘청음석’이라 이름하고 그 운자를 그대로 써서 두 수를 읊는다.
 
總角陪游地/총각배유지/총각 시절 숙부 모시고 놀던 곳에
吟魂去不回/음혼거불회/읊었던 시혼은 가고 돌아오지 않네
唯餘溪響石/유여계향석/오직 개울물 소리와 돌이 있으니
似欲慰重來/사욕위중래/다시금 찾아옴을 위로하는 듯하여라.
坡陀巨石在/파타거석재/언덕 비탈에 커다란 바위돌이 있고
窈窕一溪回/요조일계회/아늑하게 한 개울물 굽이쳐 흐르네
更待山花發/갱대산화발/산꽃이 활짝 필 때를 다시 기다려
吾今較早來/오금교조래/오늘에 내가 조금 일찍 왔나 보네
[原詩: 退溪先生文集 卷一]
 
○ 청음석 안내문
도계정사 앞 개울가에 우뚝히 솟은 반석이 있으니 「청음석」이라 한다.
조선조 중엽 송재 이우(李堣, 1469~1517)선생께서 1511년 강원도 관찰사로 계실때
휴가차 고향에 돌아와 자질(子姪)들과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착한 심성을 길러
후일의 성취를 기약하고자 이 반석에 노닐면서 맑은시 한 수를 읊었다.
 
그 후 1547년 3월 퇴계(李滉, 1501~1570)선생은 어린나이에 숙부를 따라 소풍하였던 이 바위에
여러 형님, 조카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아름다운 옛일을 회상하면서
숙부께서 읊으신 시구(詩句)에 따라 이 바위를 「청음석」이라 이름하고
그 연유를 서문에 밝힌 다음 숙부를 그리워하는 시 두 수를 지었다.
 
그 후 선현의 아름다운 유서가 깃든 이 유적을 기리기 위하여
1939년 도계정사(兜溪精舍)가 지어지고 현재의 도로와 교량이 생기면서
주변의 환경은 바뀌었지만 개울가「청음석」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바위에는 송재선생이 어린 조카에게 거는 기대가 담겨있고
그 후 퇴계선생이 숙부를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사연이 깃든 청음석을 잘 보전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안동시의 도움을 받아 이 빗돌을 세운다.
진성이씨대종회장 이경락
 
○ 송당종택과 애련정
송재선생은 1487년 19세시 경주이씨 대사헌 이승직(李繩直)의 손녀이자 진사 이시민(李時敏)의 딸에게 장가들어
노송정 종택 서쪽에 분가하여 살면서 아버지 노송정(老松亭)의 단종에 대한 절의정신을 기려
당호를 송당(松堂)이라 하였다.
지금도 송재선생이 살던 집터 축대가 남아있고 뒷산을 송당골이라 부르고 있다.
 
30세에 문과로 출사한 후로는 서울과 관아에서 생활을 하였고
1516년(48세) 안동부사 시절 안동관아 인근(태사묘 앞)에 자비로 애련정(愛蓮亭)을 지어
자질들을 공부하게 하였다.
 
선생이 이듬해 49세시 안동관아에서 서세후 가족들은 온혜리에서 누대로 살다가
조선말엽 10대 종손(汝迪)이 난세를 피해 지손들이 사는 봉화 서벽(십승지)으로 이사하였다.
또 100여년후 일제 말엽 14대 종손(鍾洙)은 서벽에서 예천 종산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1940년 도계정사를 짓고 앞에 재사를 지어 종손이 기거하였다.
그후 1958년 15대 종손(鼎洛)이 옥정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소실된 애련정을 복원하고 가택을 지어 영정각에 송재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안동시내에 종손이 기거하게 되었다.
 
송재선생이 사재로 지은 태사묘앞 애련정(愛蓮亭)은
1518년 후임 안동부사 농암(李賢輔)이 개수하면서 ‘애련당’이라 하였고,
1817년 안동부사 윤노동(尹魯東)이 중건하였다.
 
1880년 송재 12대손인 서벽파 이계로(李啓魯,1828~1886)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애련정을 중수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후 애련정은 국유로 되었으나 1927년 14대 종손(鍾洙)이 사재로 중수하여
신간회 창립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애련정은 재산권이 송재종가로 귀속되었으나 6.25 전란으로 소실되어
1958년 15대 종손(鼎洛)이 또다시 옥정동 종가옆에 복원하고 별당겸 사랑채로 사용하였다.
그후 2004년에 애련정은 안동시에 기탁하여 성곡동으로 옮겨지고
정자에는 송재 이우,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이계로의 시판과 연민 이가원의 중건기문이 나란히 걸려 있다.
애련정은 소우 강벽원이 쓰고 송당(松堂)은 퇴계가 쓴 글씨이다.
16대 종손(柱東)이 안동시내 옥정동에 기거중에 별세하고 현재 종부가 살고 있으며
17대 종손(용희)이 도계정사 앞에 증조부가 기거하던 종택을 보수 정비하고
퇴계종손이 유작(遺作)으로 쓴 송당종택 현판을 안채 대문에 걸게 되니
송재선생 후손들의 숙원이던 송당종택이 다시 새롭게 중창하게 되었다.
 
○ 安東 愛蓮堂 幷序 안동 애련당 병서 --퇴계--
堂舊爲亭在蓮池中 叔父松齋府君莅官日 嘗有詩曰 “琴韻泠泠雜雨聲 敗荷無藕尙含淸 移葵間竹西墻下
紅綠分明各自旌” 後聾巖李先生繼爲府 改構爲堂 仍掛松齋詩于壁 竹移于北墻而葵無處矣
당이 옛날에는 정자였는데 연못 가운데 있었다. 숙부 송재부군께서 이 고을을 다스릴 때 일찍이 시를 지으셨는데
“거문고 소리 맑게 빗소리에 섞이는데, 뿌리 없이 시든 연잎 맑은 기운 머금었네,
서쪽 담장 대나무 사이에 접시꽃을 옮겨 심으니, 홍색 녹색 분명하게 제 모습 드러내네.”라고 하셨다.
그 뒤 농암 이선생께서 이어 이 고을에 원이 되자 정자를 당으로 고쳐 짓고,
여전히 송재부군의 시(詩)는 그대로 벽에 걸어 두었는데,
대나무는 담장 밑으로 옮겼으나, 접시꽃은 간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숙부 송재 애련당시 차운 --퇴계--
竹因風細笑無聲/죽인풍세소무성/실바람에 대나무 웃어도 소리 없고
荷爲秋凉韻更淸/하위추량운갱청/가을이라 연꽃은 운치가 더욱 맑아
不見西墻紅間綠/불견서장홍간록/서쪽 담장사이 접시꽃은 보이지 않고
空餘珠玉暎簾旌/공여주옥영렴정/부질없이 둥근 달만 발[簾]에 비쳐 흔들린다.
 
퇴계선생이 36세(1563년)시에 넷째 형(瀣)과 함께 휴가를 받아 귀가시,
지난해 12월에 별세한 장인(許瓚)의 빈소를 다녀오기 위해 8월에 의령으로 가는 길에
안동 애련당에서 숙부의 시판을 보고 감회가 없을 수 없어 차운하여 지은 작품이다.
이때 영호루에도 올라 역동 우탁(禹倬)선생 시를 차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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