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백당선생을 기리는 묵계서원을 다녀와서

1593년 한산도대첩, 진주대첨과 함께 임진왜란 3대대첩으로 알려진
행주대첩이 일어났다는 3월 14일 영남예술아카데미 전 학장님의 초대로
묵계서원 구경을 하기로 약속하고 시내버스로 신시장에서 내려서
왔니껴시장을 거쳐 3.1.만세운동의 모의장소였던 안동교회를 돌아
광석동지점앞에서 권 본부장님과 함께 하 회장님의 차를 타고
묵계서원으로 출발을 하였다.
안동을 출발하여 동안동나들목을 지나서
묵계서원으로 가는 구간은 국도 4차선공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었고
묵계계서원입구에는 <선항리>라는 새로운 표지석이 눈에 띄었으며
묵계서원에서 영남예술아카데미 학장님을 지내신 이학장님과
월간조선 편집장을 지내신 송선생님, 전매청에 근무하셨던 권선생님,
역장을 지내셨던 임선생님과 만나서 7명이 함께 묵계서원을 구경하였다.
묵계서원(默溪書院)은 보백당 김계행선생과 응계 옥고선생의
덕행과 청백정신을 기리기 위해 1687년(숙종 13)에 창건하여
1706년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모시다가 1871년 훼철되어 1915년 복설되었으며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선생은 풍산 하리(불정촌)에서 태어나
5세부터 소산에서 자랐고 1480년(성종 11) 문과급제로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지내다가 대사간때 연산군의 폭정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고쳐지지 않자
1498년(연산군 4) 안동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힘써 청백리로 추앙을 받았고
선생이 읊었던 시 구절 가운데 <우리집에는 보물이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은
청렴과 결백이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에서 '보백당'이란 호를 삼았으며
응계(凝溪) 옥고(玉沽 1382~1436)선생은 고려말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399년(정종 1) 18세에 문과급제로 여러관직을 지내다가
안동지역에 부임(안동통판)하여 선정을 펼쳤다고 전한다.
진덕문(進德門)을 들어서니 2층루각인 읍청루(揖淸樓)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읍청루 아래층 기둥에는 지난해 산불이 스쳐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2층에는 체험객들이 앉을 책상과 방석이 가즈런히 정리되어 있었으며
정면에 묵계서원 현판이 걸린 입교당(立敎堂)이 자리하였고
강당(입교당)에도 다과상과 방석이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입교당 앞마당에는 윷놀이와 트호놀이를 할 수 있는 멍석이 깔려있었으며
마당 좌측의 극기재(克己齋)에는 스탬프대와 툇마루 포토죤이 설치되어 있었고
읍청루앞에는 홍매화 한 그루가 붉은꽃을 피우고 있으나 일부는 지고 있었으며
사진작가들이 카메라에 열심히 담고 있는 모습들도 보였다.
입교당 뒷편에는 보백당선생과 응계선생을 모신 청덕사(淸德祠)가 자리하고
서원옆 소나무가 울창한 원림에는 산물피해의 흔적들이 많이 보였으며
원림 서쪽 산자락의 선장대(仙莊臺?)에는 국립교육평가원 유성종 원장님이
김주현 교육감에게 주신 액자가 걸려 있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묵계서원과 주변에서 두 분 선생님들의 유덕을 기리는 시간을 가지며
지난해 산불의 화마속에서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올해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 매화향기 내뿜고있는 홍매화도 구경하면서
서원옆에 있는 <카폐 만휴정>에서 잠시 휴식하며 차를 한 잔씩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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