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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공민왕 친필 -
안동시기(市基)의 풍수는 그 내용이 무척 다채롭다.
개성(開城)과 같은천작(天作)의 장풍(藏風) 명당도 아니요, 한양과 같은 사신사(四神砂: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구비한 득수(得水) 명당도 아니지만 풍수설 하나만큼은 그들 두 옛 왕도(王都)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시 터를 이루는 산 하나 하나, 강줄기 하나 하나에 모두 전통적인 풍수 관념이 배어 있을 정도다. 때로는 독자적인 형국(形局: 지세의 생김새)으로, 또 때로는이웃한 산과 결합하여 다른 형국으로 승화되는 안동시기의 산(山)풍수는그야말로 관념풍수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런 안동 풍수 얘기들 중에는 현대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도 있고, 또 이 땅의 여느 고을이 지닌풍수 내용과 대동소이한 것도 많다. 하기야 조선시대에는 양반네들이 풍수를 일종의 교양으로 습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다, 이 고을 저 고을을 다스려 보았던 신임 부사(府使)가 안동의 비슷한 지세에 대해 타지역과 동일한풍수설을 펼쳤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되는 바이다. 현재 안동시기에는 물론 옛 풍수경관(景觀)이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지금도 시내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불탑과 당간지주, 절터, 정자와 누각들은 고도(古都) 안동의 예스러운 풍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게다가 현대에 와서 축조된 안동댐과 임하댐, 그리고 낙동강 둔치는 안동시기의 전반적인 풍수환경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안동이라는 삶터는 한순간도 풍수와 연(緣)을 끊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안동시기는 주산(主山)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는 희한한 특징을지니고 있다. 아니, 주산뿐 아니라 진산(鎭山)에 관한 기록도 전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산천조'를 보면 안동보다 훨씬 작았던 고을에도 거의대부분 주산이나 진산 이름이 표기돼 있는데, 안동부(府)의 그것은 빠져있다. 주변에 그럴듯한 산이 없는 경우에 수십리 밖에 있는 명산을 끌어다 진산을 삼은 고을도 있고 보면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옛 안동 도회도(都會圖)를 보면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 그림에는 안동시기를 위호해 주는 명산들이 총 망라돼 있다. 부기(府基) 바로 뒤로는 영남산(映南山)과 목성산(木城山)이, 그리고 더 북쪽 멀리로는 일월산, 청량산, 태백산, 학가산 등이 동에서 서로 흘립하여 그 터를 위호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문필산(혹은 葛羅山)과 봉수산(烽燧山 혹은 남산)이 부기를 받쳐주고있다.
안동웅부지도
그림상으로는 물론 가까이 있는 영남산과 목성산이 멀리 떨어져 있는 명산들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지만, 그 풍수적인 속내는 아마도 정반대였을성 싶다. 즉, 부기에서 곧장 바라보이는 주변 산들은 하나같이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이지만 멀리서 그 외곽을 두르고 있는 산들은 모두 명산중의 명산들인지라 굳이 특정 산을 주산 혹은 진산으로 지목함으로써 그 나머지 다른 명산들의 위호를 외면하는 잘못을 범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선조들의 그런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요즘 안동 지역 풍수연구가들은 시기의 주산 설정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혹자는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산경표(山經表)'를 참고하여 안막동 뒷산인 저수산(猪首山)을, 또 다른 사람은 옛 안동부가 영남산 밑에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영남산을 각각 안동시의 주산이라고 얘기하는 반면, 또 어떤사람은 아예 그 두 산 모두를 안동시기의 주산이라고까지 얘기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런 각각의 견해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왜굳이 주산을 설정하려 드느냐에 대해서는 또 다른 관념풍수의 일단(一端)을 보는 듯하여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예전의 안동부와 안동군청이 영남산 남쪽 지맥에 닿아 있었고, 옛 향교 터에 자리잡고 있는 지금의 안동시청이 목성산 동쪽 지맥 끝에 닿아 있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명륜동과 신안동을 지나 북쪽 안막동 깊숙이 들어 갈수록 영남산이나 목성산의 위상보다 오히려 저수산의 풍수적 위상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태화동의 주산은 마을 뒷산 태화봉(옛 西嶽)이고, 용상동의 주산은 마을 뒷산 기산(岐山 혹은 巫峽山)이라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안동시기를 이루는 고만고만한 구릉성 산지들이 이미 고유의 산이름과 지세 형국을 지니고 있었는 데다, 산 골짜기들마다 일찍부터 서당골, 법석골, 논골, 배나무골, 성진골 등과 같은 수많은자연마을들이 들어섰을진대 누가 감히 함부로 특정 산을 주산으로 임의 설정 할 수 있었으리오.
안동 조상들은 부기 주변 지세의 바로 그런 특성을익히 알았기 때문에 어쩌면 역사 오랜 웅도(雄都)로서의 체면이있음에도불구하고 안동부의 주산과 진산을 설정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안동시기 풍수는 비단 주산 설정만이 문제 되고 있는 게 아니다. 시기에대한 형국론도, 비록 다같이 관념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예전의 그것보다훨씬 못하게 변질되고 있다. 예컨대 시기의 북쪽을 두르고 있는 목성산과영남산 줄기를 뭉뚱그려 활(弧)로 상정한 후, 그 앞을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를 화살(矢)에 비유하면서, 그 터를 이른바 만궁형(彎弓形)의 길지로 보는 물형론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그것은 어찌보면 시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들을 모란꽃에 비유한 후, 거기에다 동남쪽으로 보이는 문필봉을 덧붙여, 예로부터 안동 땅에서 인물이 많이 난 것은 모두 그런 지세의 소응(所應)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얼풍수적이다. 왜냐하면후자는 그래도 안동지방이 예로부터 소위 삼다(三多)의 땅, 즉 산 많고(山多), 물 많고(水多), 인물 많은(人多) 고장으로 알려져 온 점을알고 교묘하든 어쨌든 그것을 지리 발복론으로 귀결 시키고자 애쓴 흔적이라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두 형국론은 결코 예전의 물형론에미치지 못한다. 지맥의 독자성과 지형 생김새의 고유성을 보는 안목 수준으로 봐도 그렇고, 또한 그런 물형 지세론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측면으로 봐도 그렇다. 목성산과 영남산은 알고 보면 풍수 형국론적으로 이미 조선초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산들이다. 그 두 산은 결코 하나의 물형으로 통합될수 없을 만큼 그 지리적인 정체성(正體性)이 너무나 뚜렷하다. 우선 목성산은 그 생김새가 누에의 머리를 닮아 일명 잠두산(蠶頭山)으로 불렸다고전해온다. 그런데 그 산 밑 길지에 세거한 경주김씨 집안과 조선초 안동부사로 내려왔던 맹사성 간에 있었다는 풍수 압승 얘기가 자못 흥미롭다. 그 내용인 즉, 당시만 해도 경주김씨의 세도가 워낙 등등했던지라 신임안동 부사들을 예외없이 그 집으로 부임 인사를 하러 가야만 했는데, 맹사성이 그 일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 집안이 잘 된 내력을 알아 보니 누에의 머리 혈처(穴處)가 집터고, 또 그 앞쪽으로 뽕밭이 펼쳐있어 그야말로 주안(主案) 길격의 발복지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러 천리천(泉里川)의 물줄기를 돌려 그 집터와 안산 사이로 하천이 흐르도록 하고, 제방에 옻나무를 심어 지덕을 압승한 결과 결국 김씨 집안은 몰락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풍수를 일종의 권선징악적인사회적 계도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얘기 주제가 무척 재미있다. 안동 부녀자들의 풍기 문란을 영남산의 여근형(혹은 공알형) 지세 탓으로 돌린 풍수 얘기는 더욱 사회 계몽적이다. 맹부사가 부임해보니 부녀자들의 음풍(淫風)이 실로 대단한지라 그 지세가 잘 바라보이는 곳 세 군데에 남근석(혹은 腎石)을 세워 그런 기운을 중화시켰다는 것인데, 그 풍수비보(裨補) 석주들은 일제시대때까지만 해도 원래의 자리에 서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그럴 듯한 형태로 생긴 산과 바위 같은 자연 지물을 성기로 유추하는 것이야 범(汎)세계문화적인 현상이지만 그 유감(類感)을 인간행태로까지 연결시켜 비보물로써 그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 것은 실로 우리문화다운 기발한 착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 9년(1581)에 안동부에 살던 신복(申福)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그 위풍당당하던 안동 고을이 그만 현(縣)으로 강등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한번 상기해보라. 당시에는 위정자로서도 자신이 다스리는 관할지 내에서 그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주민들에게 경계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인즉,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근형 지세 대(對) 남근석으로 상정된 영남산의 옛 관념풍수는 요즘의 지리 물형론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안동웅부공원 주변
더구나 일제가 낙동강 제방 공사를 할 때 영남산 남쪽 개목(犬項) 팽나무 둑에 서 있던 남근석을 제방 밑에 묻어버렸다고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그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동역 구내에 우뚝 솟아 있는 급수탑(물탱크)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수십년 전부터 사용되지 않고있다는 그 물탱크는 생김새 자체도 묘할뿐더러 그것도 여근형 지세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혹여 일제가 예로부터 전해오던 개목 둑의 남근석을 없애는 대신 의도적으로 물탱크를 그런 모양으로 만들고, 또 그것을 공알산이 잘 보이는 곳에다 세웠던 것은 아닐까. 안동시기의 풍수 본질이 그같은 관념풍수에 있지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 물탱크에서 쉬 눈길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바로그런 의문과 더불어 옛날의 안동 조상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남근석 비보물을 바라보았을까 하는, 그 궁금증이 필자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기때문이었다.
옥동 뒷산에서 본 안동 낙동강
풍수가들은 흔히 안동시기(市基)를 양백(兩白: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놓인 대혈(大穴)이라고 얘기한다.
일개 시기를 논하면서 온 영남지방의 영 산(靈山)이나 다름없는 양백 산을 끌어들이는 점도 그럴 듯하고,
시가지 전체를 하나의 혈처(穴處)로 보는 거창한 풍수적인 시각도 꽤나 그럴 듯하 다.
하기야 안동시가 역사 오랜 고도(古都)인 데다 그동안 공간적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해왔으니
그 정도의 찬사로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시각은 사실상 두 가지 큰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그런 관점이 현재의 결과적인 도시구조만을 볼 줄 알았지, 그 변 모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이 너무 관념적인 것이어서 안동시기의 풍수를 보다 현시적.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혹여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다. 그같은 관념풍수적인 터 이해 방법은 알고 보면 백문보(白文寶)가 '금방기(金방記: 고려 공민왕이 영호 루라 쓴 친필은 원래는 황금칠을 한 金방이었다고 함)'에서 말했다는 다음 과 같은 안동부기 해석에서 조금도 진일보한 게 없다. "복주(福州: 안동의 옛 명호)의 앞을 흐르는 낙동강 줄기는 머리(得)를 간방(艮方: 북동)에 두 고 꼬리(破)를 곤방(坤方: 남서)에 두고 있는데, 그것은 하늘의 은하수와 도 같다. 해와 달이 형상을 드리우고 은하가 문채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아름다운 현상이다. 영호루(映湖樓)가 은하수 같은 길격의 낙동강 물줄기 를 두르고 섰으니, 복주에서 이따금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이 정기를 타고 나며, 하늘의 문채와도 같은 임금(고려 공민왕)의 제자(題字 : 영호루라 쓴 친필)를 얻어 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오는 세상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여기에서 간방과 곤방을 상생관계로 인식한 것은 안동시기를 대혈로 상 정하는 것만큼이나 관념적이다. ] 아니, 백문보는 아예 거기에다 한술 더 떠 안동에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는 것을 낙동강 물줄기의 방위 덕분으로 귀 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랴. 원래 북쪽 낙동강변에 서 있었던(안동교 서남쪽 200m 지점) 그 영호루는 홍수로 세 번이나 유실되는 호된 시련을 겪은 끝에 1970년 11월에 현재의 위치인 강 남쪽 정하동 산봉우리 위에 중 건되었다고 전해온다. 인물배출이고 뭐고 간에 바로 그 은하수와 같다는 강물이 마치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옛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 번 씩이나 영호루를 삼켜버렸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옛 안동도회도를 보면 부기(府基)가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류하는 물줄기(속칭 合江)의 공격사면 (침식사면) 쪽에 위치해 있어 그 터가 빈번히 수마에 시달려 왔으리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안동시기는 원래부터 뒤로 산 을 등지고 앞으로는 강물에 면(面)해 있는 천작(天作)의 배산임수 지세에 터잡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목성산과 영남산 기슭 골골에 터잡고 있던 취 락이 낙동강의 하상(河床)을 조금씩 메워나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시가지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마도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가 거 듭되었던 듯하다.
안동민속축제에서
1608년에 편찬된 안동 지리지인 '영가지(永嘉誌)'에 갖 가지 삶터 비보(裨補)풍수 책략이 기재돼 있는 것만 봐도 안동시기의 확대 과정이 곧 낙동강물과의 투쟁사(史)였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된다. 그런데 삶터의 지리적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적용된 비보 방법의 내용이 무척 재 미있다. 관념적인 것에 덧붙여 실용적인 것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 라 그 양식도 제각기 다르다. 마치 우리나라 지리 비보법의 얼굴을 총망라 해 놓은 듯한 곳이 바로 안동시기인 것이다. 운흥동 안동역 입구 서편에 고풍스런 전탑(塼塔) 하나와 한 쌍의 당간지 주가 세워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두 유물은, 탑 은 옛 법림사지(法林寺址) 전탑이고, 당간지주는 옛 운흥사(雲興寺)의 당 간지주라고 한다. 원래 서로 떨어져 있던 유물을 한 곳에 모으면서 두 개 의 절이름을 붙인 것인지, 아니면 원래 하나의 절터에 있던 두 유물을 착 각하여 두 개의 절이름을 붙이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곳에 절 집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 괴이하기 짝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절 집은 모름지기 심심산골이나 아니면 최소한의 위엄이라도 보장해 주는 자연풍광을 지닌 곳에 터잡고 있게 마련인데, 그 터는 목성산과 영남산 기슭 의 마을에서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저지대에, 그것도 낙동강 물줄기 주 변 늪지대를 끼고 자리잡고 있었으니, 현대적인 감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될 구석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사찰터는 안동부기 주변의 산지에 위치한 동시대의 저 4악사(四嶽寺: 東嶽寺, 西嶽寺, 남산 順天寺, 북쪽 琴鶴寺 혹 은 水晶寺)의 입지양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나말 여초에 성행했던 우리네 비보사찰의 뚜렷한 입지패턴이었으니, 안동부기만 하더라도 동에서 서로 낙동강변에 법흥사, 법림사, 운흥사, 법룡사 등이 차례로 나란히 입지하여 홍수와 같은 유사시에 사찰 인력이 동원되었음은 물론 불력(佛力)으로써 삶터를 수마(水魔)로부터 지켜내려 했다. 4악사의 공간배치가 순전히 관념적인 것이었다면 이 비보사찰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그야말로 실생활의 국태민안을 도모한 현실참여적인 명찰에 다름아니었던 셈이다. 어디 그런 비보사찰만 세웠으랴. 부기 하천변 군데군데에 인공으로 조산 (造山 혹은 둔덕)을 만들고 숲(藪 혹은 쑤)을 조성하였으니, 낙동강변만 하더라도 동에서 서로 법흥(法興)쑤, 금문(金門)쑤, 진(陣)터쑤, 영호(映 湖)쑤가 이어져 그 쑤들이 홍수 피해를 막아주었음은 물론 부기의 공간적 인 품격까지도 한껏 고양시켜 주었다. 그같은 비보 풍수는 조선초 맹사성 부사가 안동부기의 하천 줄기를 어질 인(仁)자 형태로 바꾸고, 부기내 각 처에 목숨 수(壽)자 형태로 나무를 심은 데서 그 극에 달한다. 지금도 안 동시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바라보면 하천줄기는 인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즉, 반변천과 낙동강 본류가 인(人)자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안기천 과 천리천이 이(二)자 형태로 남류하여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안막골에서 흘러나와 부기 동쪽으로 흐르던 천리천이 홍수를 가져 올 위험이 다분히 있어 유로를 바꾸었겠지만, 그 일을 당시 사람들이 지니 고 있던 풍수관과 지혜롭게 연결시킴으로써 오히려 부기를 인자장수(仁者 長壽)의 터로 승화시키고, 부민들의 향토애를 더욱 진작시킨 것은 그야말 로 최고의 목민관다운 기발한 착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안동시기는 조선조 말엽에 낙동강 제방이 처음 만들어진 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시가지가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그것은 시기 남쪽으로 부설된 중앙선 철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데 철도의 부설과 관련하여 쉬 믿어지지 않는 얘기가 전해온다. 일제가 원 래는 안동에서 예천을 통과하는 철로를 계획했는데, 안동 양반님네들이 적 극 나서서 지금의 노선처럼 시기의 남쪽과 법흥동을 지나 와룡면쪽으로 철 로가 빠져나가도록 고집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가장 큰 이유는 현재의 중앙선 철로 바로 남쪽에 축조돼 있는 견고한 제방(지금 은 舊천방둑임)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듯하다. 즉, 늘상 범람의 위험이 있는 시기 남쪽 습지대를 철도 통과지로 고집함으로써 그에 따라 자연히 축조될 낙동강 제방의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지금은 물론 그 천방둑에서 남쪽으로 더 멀리 나온 지점에 새로운 낙동강 제방과 둔치가 견고하게 축조돼 있다 그에 따라 중앙선 철로가 안동시기를 양분하여 도시 발전을 저해하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요 몇년 동안 이설(移設) 얘기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저절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하기야 보다 상류쪽에 이미 안동댐과 임하댐이 들어섰으니 예전과 같이 시기를 덮치는 물난리는 이제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하지만 바로 그 두 댐이 안개일수와 그 지속 시간을 늘리는 바람에 연평균 일조시간이 무려 482시간이나 줄어들었을 뿐 더러 겨울이 길고 봄이 짧은, 이른바 장동단춘(長冬短春)의 이상기후 현상 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하니, 환경개조라는 것은 역시 얻는 게 있으면 반드 시 그만큼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조선조 개성부 유수를 지낸 이굉(李굉)이 세웠다는 정상동(亭上洞)의 귀 래정(歸來亭) 남쪽 산에 올라 안동시기를 살펴보는데, 오늘따라 시기의 기 운이 맑고 깨끗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옛 안동군청 터와 법흥동 도로 한복판, 그리고 귀래정 담장틈에 외로이 서 있는 노거수들을 둘러본 것이 옛 안동부기의 울창했던 쑤들을 연 상시켰기 때문이리라. 필자도 사람들의 지리관(地理觀)이라는 것이 저 영 호루의 현판 놓임새(누각이 강북에 있을 때는 공민왕의 친필이 누각 남쪽 면에 걸렸지만, 강남의 현재 누각에는 낙동강물을 바라보는 상대향을 중시 하여 누각 북쪽면에 걸려 있음)만큼이나 덧없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때문에 시기 내에 현대도시의 상징물인 고층건물을 세우는 것 도, 또한 고가도로를 만드는 것도 현재로서는 얼마든지 좋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댐 건설로 이미 하천유량 조절이 자유로운 데다 낙동강변에 그 토록 넓은 둔치가 마련돼 있으니, 그곳에다 각종 나무들을 심어 숲을 만든 들 그게 뭐 그리 해로울 게 있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안동 조상들의 삶터 비보정신을 되살리는 동시에 시기의 품격도 높일 수 있는 그야말로 일석이 조의 효과를 거두는 방법일지도 모를 일인 것을.풍수학자.지리학박사
정상동 귀래정 남쪽 산기슭에서 조망한 안동시기 전경. 오른 편이 낙동 강과 반변천이 합류하는 속칭 합강 지점이며, 왼쪽 뒤로 멀리 백설에 덮인 채 우뚝 솟아 있는 산이 학가산이다. 전반적으로 맑고 깨끗한 기운이 느껴 지는 명기이나 강변 둔치를 따라 숲을 일궈 시기의 품격을 한층 더 높였으 면 하는 바람이다. 운흥동 안동역 서편에 보존돼 있는 5층전탑과 당간지주. 입지상 옛 안동 부기의 허결처를 보완하기 위해 세워진 비보사찰터임이 틀림없다. 낙동강 남쪽 산봉우리 위에 중건된 영호루 모습. 강북에 있었을 때는 누 각 남쪽면에 현판을 걸었겠으나 지금은 낙동강을 바라보는 상대향을 중시 하여 북쪽면에다 현판을 걸어 놓았다. 남쪽면의 한글로 쓰여 있는 현판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