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안동의 비보풍수

오토산 2012. 4. 4. 19:53

 

 


안동의 주산인 영남산 성진골의 여근형국과 관련된 문헌자료와 구전자료를 수집하여 보고하고, 그에 따른 비보풍수 신앙과 안동의 흥망성쇠를 읽는 인문지리학의 체계로서 풍수지리설을 해석한 조사보고서를 <<안동의 비보풍수 이야기 - 영남산 여근형국에 관한 풍수 전설과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민속원에서 2004년 12월 30일자로 간행하였습니다. (302쪽, 정가 13000원)

차례와 머리말은 아래와 같습니다.

차례. 안동의 비보풍수 이야기

머리글 : 비보풍수를 읽는 주민들의 눈길

1. 영남산 성진골의 풍수지리 전통
안동의 주산은 영남산
성진골의 여근형국과 경주의 여근곡

2. 문헌에 기록된 성진골 전설과 풍속
성재정, 그 마르지 않는 샘
음기풍수를 다스리는 맹사성과 일본인
맹부사는 맹사성이 아닌 맹주서

3. 구비전승자료의 현지조사와 제보자

4. 영남산의 정기와 안동의 풍수지리
여근형국에는 남근석을 세워야 음양조화
배형국인 안동을 비보하려고 쇠돛대 세워
영남산의 정기와 현인들의 출현 인식
영남산의 지맥이 맺혀 있는 임청각의 산실
백두대간의 산세와 낙동강의 정기가 집중된 안동
산신령이 깃든 영남산과 산신당이 있었던 성진골
신성한 길지 인식과 ‘삼산이수’의 지리 인식
일본인들이 영남산에 쇠말뚝을 박아
팔선녀가 내려와서 노닐었던 옥정당
신성한 옥정당도 중장비로 밀어붙여

5. 여근형국 구조와 천지우물의 약수 기능
여근형국을 상징하는 성진골의 공알산
무지개가 서는 사철 마르지 않는 샘
자국의 생생력을 상징하는 맑은 샘
고질병을 고쳐주는 신이한 샘물
아들도 점지해주는 신통한 우물

6. 성진도사의 신이한 행적과 절터로서 성지
성진골의 지명유래와 여근형국
신라때 성진도사가 살았다고 하는 성진골
성진도사의 신통력과 ‘사자생존’ 전설
여근형국의 명당구조와 명풍수 성진도사

7. 공알산의 화냥기를 잠재우는 남근석
여성들의 바람기를 잡으려고 세운 ‘짐대’
맹부사가 물길을 돌려 만든 비보풍수
여근형국의 비보풍수로 세운 남근석의 자취
남근석을 대신하는 문화적 구조물 5층전탑
당간지주 또는 짐대도 남근석 구실
당간지주를 남근석으로 여기를 성적 상상력
성진골과 안동역의 조응에 따른 풍수해석
취수탑을 남근석으로 여기는 풍수적 상상력
귀래정의 형상과 원이엄마의 사랑

8. 영남산 성진골에 대한 주민들의 풍수인식
향토사학자가 보는 성진골과 안동풍수
낙동강의 흐름을 읽는 또 다른 해석
풍수지리적 해석과 주민들의 지역사회 인식
남성들의 요절과 과부가 많은 동네
성애형 음기풍수와 성차형 음기풍수
문화재조사를 남근석 발굴로 착각하는 믿음
성진골을 허무는 공사에 대한 두 가지 인식
권력과 부를 자랑하던 동네의 쇠퇴
풍수지리설의 원인론과 결과론에 따른 인식
영남산의 훼손과 옥정동의 흥망성쇠

9. 성진골 풍수설의 지속과 풍수신앙의 재인식
비보풍수 전설과 다양한 인문지리적 정보
바람기에 따른 비보풍수와 맹부사의 정체
아직도 살아 있는 비보풍수의 남근석 신화
풍수훼손의 비판적 인식과 실천력의 한계
자연과 문화를 지키지 못하는 시민사회
미신의 논리를 넘어서는 풍수지리설의 재인식

10. 성진골 풍수관련 현지조사 자료
영남산의 음기풍수 전설
성진골의 마르지 않는 샘과 천지 웅굴
성진골의 유래와 성진도사
공알산과 옹당못의 화냥기 처방
짐대와 남근석
음기풍수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
영남산의 훼손과 옥정동의 흥망성쇠

11. 영남산과 성진골 풍수관련 문헌자료
영남산의 음양풍수에 대한 자료
성진골 관련 지명유래 자료
옥정동 관련 지명유래 자료
주변지역 지명유래 자료

참고문헌


머리글: 비보풍수를 읽는 주민들의 눈길


산을 봅니다. 물을 헤아립니다. 바람을 읽습니다. 이런 일은 좋은 터를 가려잡는 지관의 소임입니다. 땅의 형상과 물의 흐름, 바람의 기운을 가늠하여 길지를 찾고 터를 잡는 전통 지리학을 우리는 풍수지리설이라 하고 줄여서 풍수라고도 합니다. 세간에서는 풍수를 잘 헤아리는 지관(地官) 또한 풍수라 일컫기도 합니다.

풍수가 널리 통용되었던 전통사회에서는 전문적인 지관들만 풍수를 헤아린 것이 아니라 예사 사람들도 풍수를 헤아려 지세를 읽고 터를 잡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풍수는 전통사회 지식인들의 필수교양이자 상식이었을 뿐 아니라, 민중들의 전승 지식이자 오랜 관행이었습니다. 자연히 민중들 사이에는 풍수에 관한 전설들이 널리 이야기되고 그에 따른 문화적 전통들도 다양하게 형성되어 최근까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땅의 형상이나 강의 흐름이 독특하면 그와 관련된 풍수 전설과 신앙들이 지역주민들에게 특히 관심거리가 되게 마련입니다. 안동의 주산인 영남산 성진골은 그 형상이 여성 성기 모양과 흡사한 까닭에, 지역 주민들을 모두 풍수전문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도나도 성진골의 여근형국을 두고 한 마디씩 지리적인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진골 형상이 여근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안동의 여성들이 바람기가 많다는 풀이입니다.

형상이 그렇게 독특하다가 보니 성진골은 예사 골짜기와 다르게 인식되었습니다. 성진골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산을 일러 아예 공알산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여성의 음핵과 꼭 닮았다는 것입니다. 성진골의 서쪽 봉우리는 옥녀봉입니다. 옥녀봉에는 옥정이라고 하는 우물이 있었는데, 팔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며 노닐었다고 전합니다. 여근의 중심에 해당되는 곳에는 천지우물이라고 하는 샘이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않는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어서 아직도 수돗물을 제치고 긴요한 식수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영가지』에는 이 우물에 때때로 붉은 무지개가 섰다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여근형국에 관한 지리적 해석은 풍수전설로서 널리 이야기되는가 하면, 마침내 풍수신앙이 되어서 남근석을 깎아 세우는 처방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풍수지리적 행위를 특히 비보풍수라고 합니다. 풍수지리의 이치에 따라 결함이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나무를 심거나 돌탑을 쌓는 행위를 비보풍수라 하는데, 땅의 기운이 강하면 억누르고 약하면 북돋우어주는 까닭에 흔히 비보압승(裨補壓勝)이라 일컫습니다.

성진골이 여근형국으로 생긴 까닭에 비보풍수의 이치에 따라, 안동시내 곳곳에 남근석을 세워서 여성들의 바람기를 잠재우려 했습니다. 음기가 성하게 생긴 여근형국을 비보하려면 양기가 강한 남근석을 깎아 세워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던 까닭입니다. 남근석이 없을 때는 탑이나 짐대, 취수탑 등 남근 형상처럼 높이 솟은 구조물이 그러한 구실을 대신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공알산이나 여근곡을 비보하는 경우에 다른 고장에서는 남근석을 하나 정도 세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안동에는 유독 남근석을 세 개나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 상황을 특히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보다 철저하게 음기를 다스리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비보풍수로 순조롭던 안동의 풍수지리 환경은 두 시기에 걸쳐서 불행한 훼손의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남근석을 묻어 버리거나 공알산의 바위를 깨뜨렸던 일입니다. 둘은 개발논리에 따라 중장비로 성진골을 허물어버려서 아예 원형을 짐작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공알산의 바위는 우리의 자연환경이요, 애써 깎아 세운 남근석은 지역의 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에 의해 산도 훼손되고 남근석도 매장되고 맙니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옥녀봉에다 아예 쇠말뚝을 박아서 영남산 정기를 결정적으로 훼손하는 일도 저질렀다고 합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탓에 겪은 수모라고 하기에는, 주권을 되찾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더 심각합니다. 올해 안동가톨릭상지대학에서 학교부지를 확장하고 교육 시설물을 짓기 위해 성진골의 상당 부분을 중장비로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옥녀봉 산봉우리 하나를 완전히 허물어 내는 대단히 거창한 공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진골은 본디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물론, 풍수 전설과 신앙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훼손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성진골의 형상과 지리적 이치를 읽고 그에 따른 비보풍수로서 창조적인 문화활동을 하였습니다. 남근석을 세 개나 깎아 세웠던 것입니다. 성진골을 염두하고 탑도 쌓고 짐대도 세우며 정자도 지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 주권을 잃게 되니까, 남근석과 같은 문화유산이 땅에 묻히고 성진골의 바위까지 파괴되는 자연 훼손 현상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성진골의 여근 형상은 여전히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는 선녀가 내려와서 노닐 던 옥정이나 산신을 모시던 산신당이 있어서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지역으로 믿었기 때문에 묘지조차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풍수지리설의 전통이 살아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왜 주권국가인 지금 와서 성진골이 중장비에 의해 무참하게 허물어져 버리고 그 자리에 운동장이 만들어지고 새 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나라 주권을 상실한 까닭이 아니라 문화주권을 상실한 까닭이자 자연생명을 인정하지 않는 탓입니다. 풍수지리설의 전통이 우리 문화로서 꿋꿋하게 자리매김되지 못한 까닭으로, 대학발전이라는 명분 앞에 성진골의 여근형국은 더 이상 본디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생명이 인간생명처럼 대등한 생명주권을 인정받지 못한 까닭으로, 개발논리의 명분 앞에 옥녀봉의 아름다운 산세와 나무들도 더 이상 살아남을 없게 된 것입니다. 성진골의 훼손과정을 보면, 나라 주권을 잃은 것보다 오히려 문화주권과 생명주권을 잃은 것이 더 치명적인 파국에 이르게 된 셈입니다.

앞으로는 누구도 성진골을 보고 더 이상 여근형국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풍수전설과 풍수신앙 및 비보풍수의 내력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진골의 여근형국이 사라지기 전에 음기풍수에 얽힌 전설과 신앙에 관한 전승자료와 주민들의 생각을 조사하여 자료로 남겨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자료를 남겨 놓지 않으면 뒷날 안동사람들은 지역의 소중한 풍수 전통은 물론, 본디 안동의 지리적 형상까지 떠올릴 수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주민들로부터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현지조사 작업은 조정현 선생과 조연남, 김성채, 김진형 군이 함께 거들어 주었으며, 자료를 해석하는 작업은 쓴이가 맡아서 담당하였습니다. 조사기간은 2004년 3월초부터 10월 말일까지 약 8개월이었으며, 수집된 자료를 근거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해석 작업을 하는 데 10월부터 11월까지 약 2 개월이 걸렸습니다. 다행히 가톨릭상지대학의 조사비 지원으로 작은 보고서나마 성진골에 관한 풍수문화의 전통을 조사하여 기록자료로 남길 수 있게 되었고, 또 가톨릭상지대학에서는 이 보고서를 근거로 성진골의 형상을 모형으로 만들어 새로 짓는 건축물의 일정한 공간에 전시하여 그 자취나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진골에 얽힌 풍수전설과 풍수신앙을 조사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지리적 인식에 관한 이해지평을 새롭게 확장하였을 뿐 아니라, 풍수지리설에 관한 문화적 전통이 아직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지역 어른들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안동의 어제와 오늘은 물론, 지역사회의 흥망성쇠를 풍수설에 따라 적절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진골의 풍수해석 못지 않게 지금 안동의 풍수를 읽는 주민들의 눈길이 퍽 흥미롭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군청과 법원, 검찰청 등 중요 관청이 자리잡고 있어서 기세가 등등하며, 부자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어 부촌으로 인정되던 옥정동과 동부동 일대의 동세가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현실을 한결같이 주산인 영남산의 지맥을 자른 까닭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러한 보기입니다. 실제로 영남산의 훼손과 더불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관청들이 강남으로 이주하거나 통폐합으로 없어져 버렸으며, 누대로 권력과 부를 누리던 부잣집들도 최근에 대부분 떠나 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풍수지리설은 과거 한 때의 문화이거나 한갓 잊혀진 전통이 아니라 여전히 지역사회의 변화 양상을 읽고 해석하는 인문지리의 긴요한 체계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남근석의 실체를 믿는 주민들의 믿음도 여전히 변함 없습니다. 성진골의 해체에 따른 안동대학 박물관의 문화재시굴조사활동을 두고서, 주민들은 마치 옥녀봉을 밀어붙이는 토목공사 과정에 남근석이 나타나서 공사가 중단되고 문화재 당국에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하러 나온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마침내 옥녀봉을 밀다가 남근석이 나왔다는 새로운 전설을 창출하기까지 하였으며, 할머니들은 이 전설을 믿고 발굴된 남근석을 직접 보기 위해 가파른 발굴현장까지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남근석이 발굴되지도 않았고 또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문화재시굴현장을 보고 마치 남근석을 발굴해서 덮어두고서 외부 출입을 금지하는 것으로 탄탄히 믿고 있어, 주민들 사이에는 새로운 남근석 출현 전설을 의심 없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진골의 비보풍수도 여전히 주민들의 의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셈입니다. 오히려 이 보고서가 주민들의 꿋꿋한 믿음을 흔들어 놓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성진골의 비보풍수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하도록 경비를 지원해 준 안동가톨릭상지대학과 류강하 학장님께 먼저 고마운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 출판과정에 원고를 교정하고 사진자료를 챙겨준 강사 조정현 선생과, 조사보고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도록 실무적으로 도와준 박물관의 권두규 박사, 읽을 맛이 나는 책으로 편집을 담당해준 안상학 시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땅의 이치를 읽고 그에 따라 지역사회의 변화양상까지 해석하며 다양한 비보풍수 정보를 일깨워주신 여러 어른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지킬 만한 가치가 있고 또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도 있는 안동의 주산 영남산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한 채, 기껏 조사보고 작업으로 최소한의 앞가림이나 하려드는 제 자신을 성찰하며,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머리말을 여밉니다. 왜냐하면 성진골의 훼손에 따른 적절한 비보가 되기에는 이 보고서가 지나치게 미흡한 까닭입니다.


2004년 12월 5일 임 재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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