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진보이씨는 진성이씨입니다

오토산 2012. 5. 19. 16:14

 

 

  李殷植
 
 
  眞寶李氏는 眞城李氏는 입니다.

 


■ 역사(歷史) 문헌(文獻)의 진보이씨와 족보(族譜).가첩(家牒)의 진성이씨 
   시조부군(始祖府君)께서는 신라계(新羅系) 고려(高麗)의 진보인(眞寶人)이시며 맏아들 송안군(松安君)이
   출사(出仕)한 시기인 고려 공민왕조(高麗 恭愍王朝-1365年) 공첩(公貼)인 [전의 정안 典儀政案]의 
   기록(記錄)에는 본관(本貫)이 보성부(甫城府)로 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朝鮮初期)까지 공첩(公貼)에 
   본관(本貫)을 보성부(甫城府)로 하여 내려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보성부는 곧 진보현을 통합(統合)한 행정명(行政名)으로 후일 조선초에 다시 신라 때의 원래 이름인 진보현
   (眞寶縣)으로 분리(分離)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朝鮮中期)에 이르러 본관을 진보(眞寶)로 하였으며,퇴계선생(退溪先生)의 숙부이신 
   송재공(松齋公)의 貴로 因하여 부군(府君)되시는 노송정공(老松亭公)이 진성군(眞城君)에 추봉(追封)되신 
   이후로 관향(貫鄕)을 '진성(眞城)' 으로 하여 내려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성은 곧 진보현의 별호(別號),또는 별칭(別稱)임을 추정(推定)해 볼 수 있으니 우리 이문(李門)을 진보
   (진성)이씨-眞寶(眞城)李氏라 하는 이유(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 우리이문의 관향을 진성이라 부르는 데에는 세 가지 유력한 설(說)이 있습니다. 
 (1). 그 첫째는,진성이 신라시대 진보현의 별호나 별칭으로써 시조이전부터 진보현에 세거해 온 우리이문에서 
       고려 말 시조의 본적지(本籍地)로 지칭하여 관향(貫鄕)으로 택하였다는 설(說)이 있는데,여기에는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초의 진보성(眞寶城)에서의 유래(由來)와 고려 초부터 조선 초의 지명이었던 보성부(甫城府)
       에서의 유래(由來)를 들 수 있겠습니다. 
       보성부는 고려 현종 때 예주(禮州)-現영덕에 잠시 귀속(歸屬)되었다가 조선초 보성감무(甫城監務)를 두었고 
       이후 조선 세종원년(1419年)에 청부(靑鳧)에 합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昇格)되었다가 다시 진보로 
       환원(還元)이 되었습니다. 

(2). 그 둘째는,조선중기 중종 때 퇴계선생의 숙부이신 송재공(松齋公)이 반정(反正)에 공로가 있어 청해군
       (靑海君)에 봉(封)해 지는데서 기인(起因)하며 부군(府君)이신 노송정공(老松亭公)에게 보조공신으로서 
       진성군(眞城君)의 군호를 추증을 받게 하신데 연유(緣由)한다는 설(說)입니다. 

(3). 그 세째는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유계(遺戒)를 따른 설(說)이라 할 수 있는데,퇴계선생의 유계에 따라 
      묘소의 작은 돌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墓碑)가 세워졌습니다. 
      물론 타당성(妥當性)으로 본다면 두 번째의 설이 가장 유력(有力)하다 할 수 있겠으나,당대 봉(封)함을
      받으면서 함께 내려지는 군호(君號)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통 본관지의 고호(古號)나 별호(別號)를 받는 바,
      그 이전부터 진보현의 별호가 진성이라 하여 내려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정확한 고증(考證)이 더욱 아쉬운 부분입니다... 

※ 시조 본향(本鄕)인 진보의 옛 별호(別號)가 진성었다면 우리가문을 진성이씨로 부를 수 있는 근거(根據)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사료(思料)되며,이후 조선 중기 진사 노송정공이 진성군(眞城君)에 추증(追贈)되어 
     진보의 다른 이름인 진성을 군호로 증시(贈諡)받은 사실(史實)로써 그 명분(名分)이 있다고 하겠으며,또한 
     퇴계선생의 유계(遺戒)를 상고(詳考)하면 그 당위성(當爲性)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저의 견해(見解)로는 이 세 가지의 설(說)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모두 해당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추정(推定)됩니다... 

     추측하건데,진보현의 고호 또는 행정명이 신라조에서 시조가 발적(發跡)하신 고려말까지도 수 없이  
     변천(變遷)하고 통,폐합(統,廢合)되어 왔기에 행정명에 예속(隸屬)되지 않는 별호(別號) 또는 별칭(別稱)을 
     관향으로 택하였던 것이라고 사료(思料)됩니다. 

    한편,청송 군지(靑松 郡誌)의 지명사에서...진보면(眞寶面)은 약오백년전(若五百年前)에 진보현(眞寶縣)을 
    치(置)하여 진안현(眞安縣) 또는 진성현(眞城縣)으로 개칭(改稱)하여 이조태종3년 청부군(靑鳧郡)과 
    합하였다가 세종19년에 분리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기는 하나 정확한 상고(詳考)와 문헌(文獻)의 고증(考證)이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와 같이 잠시 진성현으로 개칭(改稱)했던 기록이 보이기는 하나,이로 미루어 지명의 연혁(沿革)은 필히 
    상고(詳考)하고 고증(考證)이 있어야 하겠으며,다만 노송정공의 군호 추봉으로 인해 진성이라는 관적(貫籍)의
    입지(立志)를 더욱 굳건하게 세운 계기(契機)가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 진보의 별호(別號).노송정공의 군호(君號)-진성(眞城) 
    거의 모든 씨족들이 시대의 흐름과 지명의 변천을 거치는 과정에서 각 성씨의 본관을 고호나,별호에서 현재의 
    지명으로 개관(改貫)한 예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현(現) 지명 중에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지명(당대의 행정명,고호)으로 환원(還元)한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의 진보라는 이름도 이미 신라 경덕왕16(757년) 때의 지명으로써 환원된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아직도 본관지의 고호나,별호를 쓰고 있는 우리이문에 대해 그 후예로써 자긍심(自矜心)을 가져도 좋을것이며,
    그것이 퇴도(退陶)선생이 남겨주신 의미(意味)가 있는 유계(遺戒)라는 점에 데에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사료(思料)됩니다. 


■ 호적상(戶籍上) 두 관향의 당위성(當爲性)-진보와 진성 
     지금도 우리 이문에는 호적상(戶籍上) 두 관향을 각기 쓰고 있어 이 문제는 반드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이 됩니다...본향(本鄕)의 합일점(合一點)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진성이문의 모든 종중(宗中)과 지파
     (支派)후손들이 그 당위성(當爲性)과 정체성(正體性)에 대해 고찰(考察)하고 이해(理解)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역사 문헌(文獻)과 공첩(公貼)에는 진보(眞寶)를 공식(公式) 본관명(本貫名)으로 인정하지만,우리 대종회
     (大宗會)의 명칭(名稱)이 진성이고 또한 우리 李門의 본 고장인 안동지역의 종중과 지파후손들이 진성을 
     쓰고 있고 各 門中의 선대에서 부터 관향을 진성으로 이어 왔기에 진성으로 쓰는 것이 타당(妥當)하다고 
     사료(思料)됩니다. 

     호적의 본관이 진성 또는 진보라 하여도 어느정도의 진실성을 추정받아 호적자체가 지니는 공적(公的),
     법적(法的)효력에 의해 공인(公認)을 받게 됩니다. 다만 호적도 개인의 신고에 의한 것으로서,오류(誤謬)나 
     오기(誤記)가 있다면 정정(訂正)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러나,호적상(戶籍上) 진보와 진성을 바꿔 정정(訂正)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후손들은 본향(本鄕)의 
     유래(由來)나 지칭(指稱)에 관해 그 시대적 당위성(當爲性)과 명분(名分),그리고 근거(根據)나 고증(考證)에 
     심도(深度)있는 접근과 재조명(再照明)이 필요함을 인식(認識)하여야 하며 또한,무엇보다도 정체성(正體性)
     에  대해 고찰(考察)하고 이해(理解)하는 자세가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본관(本貫),즉 
     관향(貫鄕)을 정정(訂正)하는 문제(問題)는 그 성격상(性格上) 가볍게 판단할 사안(私案)이 아니라고 사료
     (思料)됩니다. 

     또한 그 이유가 되는 하나는 우리 李門의 족보(族譜)를 현재는 진성으로 간행(刊行)하는 추세지만,예전에는
     진보/진성을 병용(竝用)하여 간행하였다는 점과 관향(貫鄕)으로써,진성이 곧 진보를 달리 지칭(指稱)하는 
     것이고,진보를 별칭(別稱)으로 진성이라 세칭(世稱)하기 때문입니다. 



      再2003.4. 19-4. 26    周村宗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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