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진성이씨의 등장

오토산 2012. 5. 1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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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성이씨의 등장

 

글쓴이: 東彦 

2. 진성이씨 가문의 등장 

진성 이씨 가문의 사족화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다. 시조는 이석李碩으로, 진보현의 서리 출신이다. 
공의 휘는 석이고, 성은 이인데, 가계는 진보에서 출발한다. 고려 시대에 현의 서리로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나중에 아들 송안군松安君 자수子隋가 귀하게 됨으로써 봉익대부 밀직사로 추봉되었다. 부친의 휘는 영찬英贊으로 호장이고, 조부의 휘는 송주松株로 역시 호장이다. 증조 고조 이상은 찾아 말할 수 없다. 전 부인은 호장 김현金玄의 여식이고 후 부인은 성씨를 알 수 없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는 송안군으로 김씨 소생이고, 둘째는 자방子芳으로 전 부인 소생인지 후 부인 소생인지 알 수 없는데, 지금 그 자손들은 사마 백패를 잃고 본래 신분으로 돌아가 대대로 현의 서리로 살아간다고 하나 믿을 수 없다. 

진성 이씨 대종회가 펴낸 『진성이씨세보』상권의 「묘갈명」에 10세 후손이 적고 있는 글이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진성이씨 가문이 대대로 진보현의 호장 직을 이어 내려왔고, 이석에 이르러 사마시를 통하여 사족으로서의 신분상승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 14세 후손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송안군이 공민왕 시대에 현달하였으므로 시조는 충렬왕이나 충선왕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석이 사마시에 급제하는 것이 초년의 일인지 만년의 일인지, 이석과 송안군 이자수 사이에 몇 년의 나이 차가 나는지 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석에 대해서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대대로 읍내에 거주하였는데 천성이 공손하고 근면하였다. 사저에 있을 때에도 수령이 관아에 정좌할 때 고각소리를 울리면 당 아래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있다가 소리가 그치면 당으로 다시 오르곤 하였다. 향리에서의 처신이 매양 이러하니 현의 수령이 이 소문을 듣고 미안하게 여겨 고각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청기현에 집을 지어 옮겨 가 살게 하였다. 

「세전유록世傳遺錄」의 일절이다. 

 이 기록이 맞는다면, 진성이씨는 시조 이석의 시대에 이미 진보를 떠나 청기에 옮겨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송안군 이자수와 안동 입향 

 이석의 부친과 조부의 이름, 이석이 전실부인과 후실 부인을 두고 있었다는 점, 전실부인이 김씨이고 그 소생이 이자수라는 점 등은 모두 주촌(두루) 종가에 전해 내려 왔다는 「송안군정안松安君政案」기록에 근거하는 모양이다. 

 위의 10세 후손의 묘갈명 중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석의 둘째 아들, 송안군 이자수의 아우인 이자방이 사마 백패를 잃었고, 그 후손들이 다시 서리직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14세 후손의 「묘갈명」은 이 점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고 있다. 

(주촌 종가에서 대대로 전해져 오는 기록에 의하면) 자방 역시 생원이었는데 병란 중에 백패를 잃어서 자손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뒷날 후인들이 정확하게 알아볼 일이다. 진보현에 갖추어져 있는 정통호적正統戶籍에는 ‘기관記官 이지李智. 증조부는 거인擧人 자방’이라는 현의 기록이 있으니, 백패를 잃어서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믿을 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 다만 (자방이) 전 부인 소생인지, 후 부인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퇴계가 쓴 글을 또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황은 정덕正德 경진년에 서울서 동쪽으로 돌아오다가 동종同宗의 윤정允貞씨를 만났다. 윤정씨는 “휘가 석이신 5세조께서는 처음 현의 서리로 사마시에 급제 하였다. 자수와 자방을 낳았는데, 자방은 후에 사마 백패를 잃었다. 전 왕조의 법에는 서리로 과거급제자에 이름이 올라 향리 신분을 면한 자가 백패를 잃는다면 본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자수 공은 왜를 물리친 공이 있어 송안군으로 봉해졌으므로 본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라는 등의 말들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신용개申用漑 공이 지은 선조고비명先祖考碑銘에 보면 휘가 석이신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이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휘가 자수이신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군으로 봉해졌다는 일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비명은 신공이 나의 숙부 송재松齋 선생이 손수 지은 행장을 가지고 쓴 것이니 윤정씨가 말 한 것과 같이 군으로 봉해진 것 같은 일이 있었다면 생략하여 쓰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백패를 잃어서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갔다는 일 역시 이런 법이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므로 윤정씨의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윤정씨는 그때 이미 연배가 높아서 우리 이씨 문중에서 현존하는 최고령자였으므로 선조들의 사적을 혹시 전해들은 바가 있어 이런 말을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퇴계가 의심하는 것은 이자수가 송안군으로 봉해졌다는 것과 이자방이 백패를 잃고 서리 신분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얽혀 있는 문제이다. 위의 윤정의 말에 의하면, 백패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은 자수와 자방 양자에게 다 주어져 있었는데 자수는 봉군이 되었던 탓에 서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때 퇴계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자수가 봉군 되었다는 것보다 자방이 서리로 되돌아갔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물론 퇴계가 이것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것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훗날 퇴계는 송안군 봉군 기록을 접하게 되고, 봉군에 대한 의심은 자연스럽게 풀린다. 


황이 기유년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동종의 형제 호보壕堡, 균연均堧 등의 집에서 공(이자수)의 급제홍패 1폭, 고신 18폭, 정안 전준 1폭 등 도합 20폭의 선세 유적을 처음 본 연후에 공이 출신한 후 실제로 어떤 직책을 역임하였는지를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공을 이루어 군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은 없어서 더욱 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에 가형(李瀣)이 충청감사로서 홍주를 돌아보았을 때 외성外姓의 족인族人 박승이朴承李가 와서 보았는데, 이 사람은 우리 증조이신 합천동陜川公의 분파로 그 집에 비장되어 있던 공의 공신녹권을 바쳐서 형은 아주 기뻐하면서 후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형은 그것을 받아 다시 깨끗하게 꾸며 가지고 와서, 그 이후 지금까지 집안에 비장되어 오고 있다. 공신녹권 안의 글자들을 보면 지정 22년 홍건적을 평정한 일에 대해 지정 24년 9월에 의론에 따라 공에게 안사공신安社功臣을 내린다는 것....  


 지정은 원나라 순제順帝의 연호로, 지정 22년이라면 공민왕 11년, 1362년이다. 지정 21년,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은 10만 병력으로 대거 남하하고, 공민왕은 12월에 복주福州까지 남행한다. 


....정세운이 홍건적을 토벌하고 경성을 수복할 때 비장으로서 공을 세워 송안군에 봉군.... 


「송안군행장」의 기록이다. 

 자수의 봉군 사실은 확인 되었지만 퇴계는 자방이 서리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접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믿을 수 없다고 여겼던 윤정의 말이 공신녹권으로 확인되니 자방이 서리로 돌아갔다는 것도 막무가내로 내칠 수만은 없게 되었으므로 퇴계는 고려 역사 속에서 가능성의 일단을 유추하여 본다. 

다만 『동국통감』을 살펴보면 신우辛禑 때에 주 현의 서리들이 너무 많이 출신하여 그것 때문에 주 현 사무가 마비될 정도였으므로 서리로서 과거급제를 통해 출신한 자는 심사를 거쳐 본직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생각건대 혹시 이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도 윤정의 말이 맞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퇴계 당시에도 이 문제는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낼 수는 없는 일이리라. 따라서 여기서는 이런 의심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인들은 이 이야기를 적어 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정도로 그치기로 하자. 

 그 문제야 어찌되었든, 자방 계열은 『세보』에 효동孝童-연명連命-선호善浩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갖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파보』가 만들어질 때 찾아서 편입시킨 것이 아닌가 여겨지지만 정확한 사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발견하지를 못하였다. 

 진성이씨 일문은 누가 뭐라 해도 거의 전적으로 이자수 계열로 이루어진다. 이자수가 안동으로 옮겨 사는 선택을 하게 됨으로써 진성이씨 일문과 안동과의 인연은 시작된다. 

 이자수가 안동으로 옮겨 사는 선택을 하게 됨으로써 진성이씨 일문과 안동과의 인연은 시작된다. 

 이자수가 안동으로 옮겨 앉은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주촌 종가에 전해지는 문건은 건문建文 원년의 기록인데, 그 속에 “계해년에 왜란으로 인하여 떠돌아다니다가 안동으로 이거하였다.” 등등의 말이 있으니 이것은 필시 홍무洪武 16년의 계해년일 것이다. 

 역시 14세 손의 주석이다. 

 홍무는 명나라 태조의 연호로, 홍무 16년은 1383년이고 고려 우왕 9년이며 간지로는 계해년이다. 건문은 명나라 2대 혜제의 연호이고 건문 원년은 1399년이다. 지금 진성이씨 두루종가에 건문 원년에 작성된 기록이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4세 손이 이「묘갈명」을 지을 때에는 실재하였던 것이 분명한데, 이 기록이 믿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안동으로 이거한지 불과 16년 후에 작성되는 문건 속에서 말해지는 안동 이주년도는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이자수는 명서업明書業에 2과제4인二科第四人으로 급제하였다는 홍패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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