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성씨의 고증(진성이씨

오토산 2011. 9. 16. 09:24

 

 

眞寶李氏,眞城(진보이씨,진성)

 

▣ 由 來

 

 

始祖(시조)  : 李 碩(이석)


眞城李氏(진성이씨)는 李碩(이석)을 始祖(시조)로 한다.
眞城(진성)을 本貫(본관)으로 삼은 것은 先祖(선조)들이 代代(대대)로 眞寶縣(진보현)(現 眞城)에 살았기 때문이다. 眞城李氏(진성이씨)의 祖上(조상)들은 이 고을의 衙前(아전)[高麗時代(고려시대)의 衙前(아전)은 높은 官職(관직임)]이었다고 한다.代代(대대)로 衙前職(아전직)을 이어오다가 高麗末(고려말)李碩(이석)이 學文(학문)에 뜻을 세워 生員試(생원시)에 合格(합격)해 家門(가문)을

새出發(출발)시켰다.그의 아들 李子脩(이자수)가 忠肅王(충숙왕)때 明書業[명서업,글씨 잘 쓰는 사람을 뽑는 科擧(과거)]에 及第(급제),나중 紅巾賊討伐(홍건적토벌)에 功(공)을 세우고 安社功臣(안사공신)으로 松安君(송안군)으로 封(봉)해지며 벼슬이 判典儀寺事(판전의사사)에 올라 家門(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 人物

 

 

眞城李氏(진성이씨)의 기틀은 高麗末(고려말) 李子脩(이자수)에 依(의)해 싹이 트고 朝鮮時代(조선시대)退溪(퇴계) 李滉(이황)에 이르러서 成長(성장)하기 始作(시작)한다.學文(학문)의 家門(가문)답게 文集等(문집등)著述(저술)을 남긴 學者(학자)만도 朝鮮時代(조선시대)에 50餘名(50여명)을 헤아리며 58名(58명)의 文科(문과)及第者(급제자)를 輩出(배출)한 韓國(한국)의 知性(지성)을 代表(대표)하는 名門(명문)이다.

退溪(퇴계)李滉(이황)은 始祖(시조)李碩(이석)의 6代孫(6대손)으로 1501年 安東(안동)陶山面(도산면)에서 進士(진사)李埴(이식)의 막내로 태어나서 1571年
文廟(문묘)에 配享(배향)될때까지 그의 70年 一生(일생)은 誠(성)과 敬(경)으로 聖人(성인)을 追求(추구)해간 構圖(구도)와 精進(정진)의 나날이었다.34살에 文科(문과)及第(급제)했고 그 學問(학문)과 人格(인격)이 나라안을 感化(감화)시켜 大提學(대제학),禮曺判書(예조판서),右贊成(우찬성),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等(등)높은 벼슬도 했으나, 그보다는 學文(학문)과 自己修養(자기수양)에 뜻이 있어 벼슬을 辭讓(사양)하고 故鄕(고향)安東(안동)陶山面(도산면)에 돌아가 硏究(연구)와 著述(저술),後進(후진)指導(지도)에 몸바쳤다.
退溪(퇴계)는 當時(당시)의 學者(학자)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朱子學(주자학)(
性理學)을 쫓았다.그러나 硏究(연구)와 實踐(실천)을 通(통)해 朱子(주자)의性理學(성리학)을 再整理(재정리)하고 發展(발전)시켜 退溪學(퇴계학)으로 鼎立(정립)했다.
退溪(퇴계)의 兄(형)인 李海(이해)는 仁宗(인종)때 禮曺參判(예조참판),大司憲(대사헌)에 올랐고 退溪(퇴계)의 孫子(손자)李安道(이안도)가 退溪(퇴계)의 性理學(성리학)을 이어받아 많은 第子(제자)를 길렀다.

"내고장 七月(칠월)은 靑葡萄(청포도)가 익어가는 季節(계절)…"로 始作(시작)하는 詩(시)를 지은 詩人(시인)李陸史(이육사)도 이 家門出身(가문출신)으로 日帝(일제)의 監獄(감옥)에서 마친 짧은 삶과 함께 愛國的(애국적)인 抵抗詩人(저항시인)으로 오늘날 再照明(재조명)을 받고 있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李爾松(이이송) (1598 戊戌生) : 文科 仁祖13年(1635) 增廣試 甲科 壯元及第
李孝淳(이효순) (1789 己酉生) : 文科 純祖22年(1822)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李晩德(이만덕) (1809 己巳生) : 文科 憲宗12年(1846)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李晩燾(이만도) (1842 壬寅生) : 文科 高宗3年(1866) 別試 甲科 壯元及第
李滉(이황) (1501 辛酉生) : 文科 中宗29年(1534) 式年試 乙科
李閱道(이열도) (1501 辛酉生) : 文科 宣祖9年(1576) 別試 丙科
李回寶(이회보) (1594 甲午生) : 文科 仁祖7年(1629) 別試 乙科
李東標(이동표) (1644 甲申生) : 文科 肅宗9年(1683) 增廣試 丙科
李世泰(이세태) (1698 戊寅生) : 文科 英祖20年(1744) 式年試 丙科
李世澤(이세택) (1716 丙申生) : 文科 英祖29年(1753) 庭試 乙科
等 모두 178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59名, 司馬試 119名)

▣ 世居地

 

 

慶北(경북) 安東市(안동시)陶山面(도산면)溫惠洞(온혜동).安東市(안동시)陶山書院(도산서원)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조금가면 溫惠洞(온혜동)이다.入鄕祖(입향조)는 始祖(시조)의 高孫(고손) 李繼陽(이계양)이다.그는 奉化(봉화)訓導(훈도)로 있을때 安東(안동)서 奉化(봉화)로 가는 길에 굶주림으로 意識(의식)을 잃고 쓰러진 한 스님을 救(구)해주었다고 한다.목숨을 건진 스님은 李繼陽(이계양)에게 집터를 잡아주며 "이곳에 집을 지으면 子孫(자손)이 貴(귀)히 되리라"고 豫言(예언)했다.그後(후) 나라가 어지럽자 그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스님의 말대로 이곳에 집터를 잡아 살게되었다.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北道 靑松


眞寶(진보)는 慶尙北道(경상북도)靑松郡(청송군)에 있는 地名(지명)으로 新羅(신라)때에는 漆巴火縣(칠파화현)이라 하다가 757年(新羅景德王16)에 眞寶縣(진보현)으로 고치고,聞韶郡(문소군:義城)의 領縣(영현)을 삼았다.高麗(고려) 太祖(태조) 眞安縣(진안현)과 合(합) 甫城府(보성부)로 改編(개편)하였다. 1018年(顯宗9)禮州(예주:寧海)에 編入(편입)시켰는데 倭寇(왜구)로 因(인)해 그地方(지방)을 비워 두었다가 朝鮮(조선)太祖(태조) (현)을 設置(설치)하였다. 世宗(세종) 靑鳧(청부)를 合(합)하여 靑寶郡(청보군)이라 하다가 眞寶(진보)로 고쳐 縣(현)으로 삼았다.1474年(成宗5)靑松(청송)에 編入(편입)하였다가,1478年(成宗6)다시 復舊(복구)하였다.1895年(高宗32)에 地方制度(지방제도)改正(개정)으로 眞寶郡(진보군)이 되었고,1896年 慶尙北道(경상북도)에 移屬(이속)되었다. 1914年 郡面廢合(군면폐합)으로 東面(동면)과 北面(북면) 英陽郡(영양군)에 倂合(병합)되었고,나머지는 靑松郡(청송군)에 編入(편입)되었는데 그 中心地域(중심지역)은 眞寶面(진보면)으로 남아 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眞寶李氏(진보이씨)
1985年에는 摠 14,428家口 58,877名,
2000年에는 摠 20,890家口 66,407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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