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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간행 「진성이씨족보」의 편찬과정과 그 성격
김문택(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2003년 서울화수회에서 발행한 진맥 3호에 실린 내용을 옮겼습니다.) 1. 머리말 2. 퇴계 이황의 가계정리 과정 1) 1520년 족숙族叔 이윤정李允貞의 증언 2) 1549년 선대문적先代文籍 20폭 발견 3) 1564년 분재기分財記 발견 3. 「진성이씨족보」의 간행과 그 특성 1) 1583년 필사본 작성과 1600년 목판본 인쇄 2) 1600년 간행 「진성이씨족보」의 구성과 특성 4. 맺음말 1. 머리말 1600년 경자년庚子年에 도산서원에서 진성이씨의 첫 족보가 간행되었다. 이 족보는 도산서원에서 만들어졌다고하여 세칭「도산보陶山譜」로 알려졌다. 족보의 공식명칭은 「진성이씨족보眞城李氏族譜」로 우리나라 초기 족보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시조로부터 당시까지의 가계가 매우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이나 이 집안에 세전되어 온 전적 등에서는 족보간행의 과정을 알려주는 기사가 산견되고 있는데 이들 자료를 통해서 당시 족보의 간행 배경과 그 과정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먼저 퇴계 이황이 선대의 가계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을 살피고, 이어서 1600년에 간행된 초간 「진성이씨족보」의 구성과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본래 족보는 가계의 기록으로서 가문별로 먼 조상으로부터 작성 당시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이래 족보의 발간이 널리 행해지고 조선 말기에는 각 가문의 성세를 재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족보는 가문의 역사를 기록해 나간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반면, 이것이 지나쳐서 자기 가문에 나타나는 개인에 대해서는 생졸년生卒年, 자字와 호號, 배우자와 그의 부친, 묘의 위치, 그 외에 관직임용 여부 등 개인의 신상과 이력사항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족보는 전통사회에 대하여 가장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요긴한 자료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에대한 사료비판과 동시에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지금까지 초간보初刊譜로서 널리 알려진 족보로는 1476년에 발간된「안동권씨족보」, 1565년의「문화유씨족보」, 그리고 「강릉김씨족보」등이다.(*안동권씨족보는 세칭「안동권씨성화보」로, 문화유씨족보는「문화유씨가정보」로, 그리고 강릉김씨족보는 「강릉김씨을축보」란 이름으로 학계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족보들은 15~16세기에 발간된 초간보들의 대명사이다. 그런데 이들 족보 외에도 현존하지는 않지만 기록상으로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지는 것들이 있고, 판본으로 인쇄되지는 않았지만 필사본 상태로 전하는 족보 등도 있다. 본 글에서 소개하는 1600년 「진성이씨족보」는 처음에 언급하였듯이 진성이씨 집안에서 발간한 최초의 족보인 초간보이다. 그런데 이 족보는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족보와 비교해 볼 때 어느 족보 못지않게 간행에 있어서 적실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는 조선조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의 노력에 기인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족보의 간행은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 정도 지난 후 그의 제자와 자손, 그리고 친척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생시 그가 기울였던 가계에 대한 정리 작업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이 족보에는 시조 석碩으로부터 자수子脩와 자방子芳 형제가 나오고 이어서 자수의 아들로 운구云具와 운후云侯 두 아들이 기재되었다. 이들 형제들은 그들의 출생 순서가 명백하게 판명된 상태로 기록되었는데, 이러한 점은 다른 족보가 시조를 비롯한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여러 대에 걸쳐 부자지간이 1대 1 단선單線으로 기록되어 그 적실성이 모호한 점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전체적으로 본 족보의 사실성과 역사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는 퇴계 이황이 그 선대의 세계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서 가계를 정리해 나간 노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본 글에서는 이황에 의한 선대 가계의 정리 작업에 대해 서술하고 이를 토대로 1600년에 간행된 「진성이씨족보」의 발간 과정을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이어서 족보의 구성과 특성을 서술하였다. 2. 퇴계 이황(1501~1570)의 가계정리 과정 「진성이씨족보」의 발간은 15세기경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집안의 몇몇 인물들에 의한 가계정리 사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삼촌 이우(1469~1517), 그의 형 이해(李瀣, 1496~1550), 그리고 당시 종손인 이정회(李庭檜, 1542~1613)등이 자신들의 조상들에 대한 자료 발굴의 노력과 이를 정리하는 사업을 지속함으로써 가계에 대한 정리 사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황이 본격적으로 조상의 세계에 대하여 정리작업을 시행하기 이전 그의 조상에 대한 정보는 대략적인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가 알고 있었던 정보는 신용개(1463~1519)가 찬한 그의 조부 이계양(1424~1488)에 대한 묘갈명을 통해서였다. 이 묘갈명에서는 시조인 이석이 밀직부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자수가 판전의시사를 지냈으며 도 그의 손자 이정이 선산부사를 지내고 영변부 판관으로 공을 세웠다는 사실 정도가 기록되었다. 따라서 이황은 조부 이계양, 증조부 이정, 고조부 이운후, 5대조부 이자수, 6대조부 이석에 이르는 계보를 알고 있었는데, 그 외에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이력사항이나 그들의 형제 등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자수가 공신으로 송안군에 봉군된 사실, 그의 아들 운후가 형이 있었다는 사실 등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이황이 그나마 6대조 이석에 이르기까지 성명과 주요사항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숙부 송재 이우(1469~1517)덕분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우는 조선 중종조 문과에 합격한 후 호조참판을 지낸 인물인데, 이황의 성장은 그에게 힘 입은바 크다고 한다. 또한 신용개가 이계양에 대한 비문을 작성한 것은 이우의 부탁에 의해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 진다.) 그가 스스로 가계정리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세계는 ‘이석→ 자수→ 운후→ 정→ 우양·흥양·계양’ 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가계와 그들이 지낸 관직명 등이었다. 1500년대 진성이씨 집안의 이러한 사정은 집안에 다라서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다른 가문에서도 유사한 실정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당시 까지만 하여도 조선조 18~19세기에 필수적이었다고 인식하였던 족보의 제작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그 관심도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다. 1) 1520년 족숙族叔 이윤정李允貞의 증언 퇴계 이황에게 조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준 이는 풍기에 살고 있던 족숙 이윤정이란 분으로 그 시기는 1520년(중종 15)이황의 나이 20세 때였다. 이 때 이윤정의 증언으로 그가 알게 된 사실은 ① 6대조 석의 면향免鄕, ② 석의 아들로 자수와 자방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 ③ 자수가 고려 말 공신에 책봉된 일 등이었다. 이 시기에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한양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풍기에 사는 이윤정(이윤정은 진성이씨 풍기파로 운구의 증손이며, 이자수에게는 고손이고, 퇴계에게는 숙부뻘이 된다.)을 만나게 되고, 이 때 그로부터 조상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5대조(퇴계로서는 6대조)휘 석은 처음에 현리縣吏였는데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그의 아들로 자수와 자방을 두었다. 그 뒤 사마백패司馬白牌를 잃었는데, 전 조정의 법은 현리가 과명科名으로 면향이 되었다 하더라도 백패를 잃으면 환역還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방의 자손들은 본역으로 돌아갔는데, 자수공은 스스로 왜적을 막은 공으로 송안군에 봉해져서 면역하게 되었다고 운운하였다. 이윤정의 증언에 따른 계보 및 사실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碩(免鄕)--자수(松安君)--운후--정 --자방 그런데 퇴계 자신이 생각해 보니 이전에 신용개가 쓴 그의 조부 즉, 이계양의 비명에서 그의 선조를 언급하면서 봉군封君에 대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점 등으로 보아서 이윤정의 말 둥에 송안군이 왜적을 막은 공으로 봉군된 사실은 다소 불확실하다고 여겼고, 또한 백패를 잃어버려서 환역하게 되었다는 말도 믿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신용개의 비명은 퇴계의 글에 다르면 바로 그의 삼촌 이우의 행장을 근거로 하여 썼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이우의 행장에도 송안군의 봉군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심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윤정은 당시 집안에서 제일 연장자라서 그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이황 자신은 부친과 숙부가 일찍이 돌아가시어 질의할 곳도 없고 해서 다만 들은 바를 기록하고 후일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황은 부모와 숙부를 일찍 잃었으니, 그의 부친 이식은 그가 두 살 때인 1502년에 돌아가시고 그의 삼촌이면서 학문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이우 역시 1517년에 돌아가시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여서 이황이 이윤정의 증언을 듣기까지 조상에 대한 지식은 신용개가 지은 묘갈명에 있는 내용 이상을 넘지 못하였던 것이다. 2) 1549년 선대문적先代文籍 20폭 발견 1520년 이후 한 동안 이황이 그의 조상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1549년(명종 4)(‘퇴계선생연보’에 따르면 무신년인 1548년 10월에 퇴계는 풍기군수로 임명되고 그의 형 해는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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