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1600년 족보

오토산 2012. 5. 19. 16:29

 

 

  이한방
 
 
  1600년 간행 「진성이씨족보」의 편찬과정과 그 성격-2: 김문택/ 이동언 옮겨 씀

 

3. 「진성이씨족보」의 간행과 그 특성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가계 정리 작업은 그의 사후, 아들 자손들에 의한 족보의 편찬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1600년 도산서원에서 자손들의 주도로 목판본「진성이씨족보」가 간행되기 오래 전에 이미 족보가 만들어진 바 있다. 

 이는 1571년 이황이 사망하고 10여년이 지난 후인 1583년 그의 아들 준(寯, 1523~1583)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이 때는 필사본 형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다시 준이 사망한 이후, 퇴계의 손자 영도 등의 주도로 1600년 도산서원에서 목판본 「진성이씨족보」가 만들어졌다. 1600년 경자년에 간행된 「진성이씨족보」의 특징은 계보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통상적인 초간본과 같이 남녀의 기재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 즉 시조로부터 남녀간 출생 순서에 따라 엄격히 써 내려가고 그들에게서 난 모든 혈손들은 다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한 그들의 시조를 여말 향리에서 면향한 인물인 ‘碩’으로 하면서 계보상의 엄밀성을 추구하였다는 점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많은 족보들이 신라말의 경순왕이나 고려초의 공신들을 시조로 삼아서 시조로부터 여말선초까지 계보가 이어지는 동안 계보가 중간에 연결되지 않거나 어렵게 연결되더라도 수백 년 동안 계보가 단선으로만 이어져서 그 사실성이 의심받는 양상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1) 1583년 필사본 작성과 1600년 목판본 인쇄 

 퇴계 이황은 생전에 가계 정리 사업을 완수하였으나 족보를 작성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황이 정리한 가계를 토대로 족보를 만든 것은 그의 아들 이준李寯대에 이르러서였다. 준은 자신이 의성義城의 수령으로 재직하던 시기인 1583년「진성이씨족보」를 작성하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족보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족보 작성을 알려주는 기록이 「송간선생실기松澗先生實紀」의 연보에 나타나 있다. 또한 이 기록에 나오는 족보는 1600년 족보를 간행할 때의 저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족보의 형태는 필사본이었다고 보여 진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眞城李氏世譜」의 오운吳澐이 찬한 ‘도산구보서陶山舊譜序’에 따르면, “1600년 여름 진성이씨족보의 판각을 완성하고 이영도가 본인을 찾아와 서문을 부탁하는 과정에서 그의 돌아가신 형인 안도(1541~1584)가 생전에 족보를 완성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야 판각을 하게 되었다.”라고 증언하는 말 속에서 이전에 이안도가 만든 족보는 바로 「송간선생실기」에 언급된 1583년에 작성된 그 족보이며, 이 족보는 판각본이 아닌 필사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송간선생실기」의 기록에 따르면 1583년 5월 이준이 수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의성 관아에서 족보를 편집, 초본이 완성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때에 모인 사람들은 이준의 첫째 아들 이안도(李安道, 1541~1584), 둘째 순도(純道, 1554~1584), 셋째 영도(詠道, 1559~1637), 그리고 종손인 이정회(李庭檜, 1542~1612)와 함께 이정회의 족숙族叔이었던 유도(有道, 瀣의 孫, 1565~1626), 족제族弟인 득춘(得春, 1550~1619), 이정회의 동생인 정백(庭栢, 1553~1600) 등이었다. 

 당시 족보작성 장소가 의성이었던 것은 이황의 아들 준이 당시 이 지역의 수령으로서 장소를 제공하고 또한 족보의 편집에 소용되는 일정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족보를 만드는데 있어서는 많은 인원과 자금이 필요하였다. 족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의 가정으로 족보의 작성을 통지하는 일, 그리고 수단收單하는 일, 수단한 자료를 편집하는 일 등에는 일정한 인력과 자금이 필요하였는데, 이를 당시 의성의 수령이던 준이 담당한 것이다. 

 이때의 족보 작성에 대해서는 「송간선생실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정회가 의성 관아에 가서 이준의 아들 안도·순도 등과 함께 편집에 참여해 7일 만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의 7일 이라는 기간은 단순히 족보를 처음부터 끝가지 작성하는데 걸렸던 시간이었다기보다는  최종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당시 완성한 족보의 분량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최소한 2,3천 명 정도를 수록하는 하나의 책을 완성하는 데에는 상당한 기일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의 족보는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1600년에 간행된 족보와 유사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 되는데, 다소 소략하여 권수가 구분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때의 족보에서는 이석을 시조로 하고 그 아래 자수와 자방, 그리고 운구와 운후, 다음에 정禎을 축으로 하는 골격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20년 가까이 지난 1600년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진성이씨족보」가 처음으로 목판으로 판각 인행되었다. 이때의 간행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에 만들어진 족보가 있었고, 도한 여기에 도산서원에서 퇴계선생 문집을 간행한 뒤에 기존의 각수 등의 인력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운吳澐이 찬한 ‘도산구보서陶山舊譜序’(1600년 간행「진성이씨족보」에는 서문이 누락되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1600년 간행족보의 서문은 뒤에 발간된 「진성이씨세보」(1912년간)의 「도산구보서」라고 된 내용을 참고하였다.)에 다르면 이때에 이르러 널리 묻고 조사하여 이전에 만들어진 족보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3권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이때의 작성본은 판각을 위한 저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족보의 판각을 위하여 근처의 자손들로부터 미포米布를 거두어 비용으로 삼고 퇴계선생 문집의 간행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문집 간행에 참여하였던 각수를 빌려 두었다고 한다. 실로 족보의 간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이다. 

 이때의 간행 작업에는 이황의 손자이자 이준의 셋째 아들로 당시 정랑正郞이었던 영도詠道가 주도하였다고 한다. 이전에 1583년 필사본을 작성할 때에는 이황의 아들인 준이 주도하였지만 이때 준은 이미 사망하고 난 뒤였다. 

 거기에 당시 족보의 작성에 참석하였던 준의 첫째 아들인 안도와 둘째 아들 순도(순도는 족보에 이력사항이 기재되지 않아서 생몰년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형 안도의 문집인 「몽재문집」연보에 1584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註: 의인파 의 증언에 의해 1554~1584년으로 바로잡습니다. )등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영도와 함께 족보 간행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은 종손인 이정회·이형남(李亨男, 1556~1627)·이유도 등이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업에 참여해서는 한 달을 넘기지 않고 완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시 족보의 간행이 본격화 되는 데에는 이황의 제자이자 당시 도산서원을 운영하고 있던 월천 조목(趙穆, 1524~1606) 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목은 이황의 고제高弟 중의 한 사람인데 족보를 만들기 직전인 1600년 봄에 자신이 주관하여 「퇴계선생문집」을 간행한 바 있다. 

따라서 「진성이씨족보」가「퇴계선생문집」간행의 여력을 활용한 만큼 족보간행에는 조목의 지원이 동반되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그가 족보 간행을 도운 사실은 오운의 ‘도산구보서’에 나오는데 이 기록에 다르면 조목은 선생의 문집 간행을 마친 후 여러 선비들에게 말하기를 

 선생의 도道는 ‘효제孝悌’ 일 따름인데, 지금 선생의 문집을 서원에서 간행하고 아울러 선생의 세계족도세계족도를 발간하여 족보 중에 이름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선생의 도의 소재를 알게 한다면 선조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니, 우리가 함께 스승을 존중하는 도를 이에서 다할 것이다. 

라고 하여 「진성이씨족보」의 간행이 곧 선생의 도를 파급하는 일 중의 하나로 보아서 족보 간행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선생의 문집 간행 후 남은 재목 및 공인에다가 좀 더 수집하여 일을 추진하니,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완성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경로로 작성된 진성이시 초간보는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초기 족보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이 족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시조 석으로부터 모든 자녀를 출생 순에 따라, 남녀 구분 없이 기재하였기 때문에 매우 정확한 사실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당시 유행하는 족보의 형식, 그리고 진성이씨를 중심으로 하는 안동과 그 일대의 친족 문화, 나아가 당시 실제 문중 역사의 틀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한편 족보 발간에 참여하였던 인물을 통해서 족보의 성향을 유추해 볼 수 있으니 이때 족보의 간행에 참여하였던 이들은 앞서 족보의 서문에서 오운이 밝힌 것처럼 모두 선산 부사를 지낸 이정의 후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내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정의 후손들 중에서도 첫째인 우양遇陽의 후손과 셋째인 계양繼陽의 후손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600년 족보 간행의 참여자로 소개된 인물은 이영도·이정회·이형남·이유도 등 4인이었는데, 이 중 이정회는 우양의 맏손으로 5대손이고 이형남은 우양의 4대손으로 이 둘은 우양 계열이며, 이영도는 이황의 손자이고 이유도는 이황의 형인 이해의 손자로 이 둘은 계양 계열이다. 

 그런데 이전에 1583년 필사본을 만들 당시 참여하였던 인물들은 이준을 비롯하여 이안도·이순도·이영도·이정회·이유도·이득춘·이정백 등이었는데, 이들의 구성을 보면 이황의 아들(준)과 손자 3형제(안도 순도 영도), 그리고 이해의 손자(유도) 등 5인은 계양 계열이며, 그 외에 종손인 이정회와 그의 동생 정백, 그리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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