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우리나라 풍수의 역사

오토산 2013. 3. 2. 12:16

 

 

[우리나라 풍수의 역사]


지난 시간에는 풍수의 원리와 발달과정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우리나라 풍수의 발생과 역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풍수는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엄연히 우리나라에도 자생풍수가 있었습니다. 문헌상에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관한 기록입니다.


“옛날 환인(桓因)이 있었는데 그 서자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욕심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는 삼위태백(三位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부르니 이 분이 환웅대왕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삼위태백의 3개의 산은 주산과 좌청룡, 우백호를 의미하고 ......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하는 대목에서 나라를 다스릴 길지를 살펴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나라를 다스릴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풍수지리를 보았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물론 단군신화 자체가 신화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것으로 정통풍수지리가 체계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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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가락국 10대왕이자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맹호수유형 형국에 무덤은 호랑이의 젖꼭지 부분에 정확히 안치되어 있다. 당시 가락국에 형국론 풍수가 자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신라 4대왕 석탈해(80년)가 2명의 노예를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산마루터기에 돌집을 짓고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 안에 자기가 살 만한 곳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 중 초승달처럼 생긴 언덕이 지세가 좋은지라 .......』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초승달처럼 생긴 언덕은 바로 경주의 반월성을 가리킵니다. 이는 석탈해왕이 풍수원리에 의해 궁궐터를 잡았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이 밖에도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유리왕이 위례성으로 천도하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한산에 도읍을 정할 때 땅을 살핀 기록이라든지 또한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벽화에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보건데 우리나라의 풍수역사는 최소한 삼국시대 초기 이전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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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의 현무도. 현무는 북쪽을 가리키며 풍수에서는 주산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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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의 청룡도. 청룡은 동쪽을 가리키며 풍수에서는 좌측 산자락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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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의 백호도. 백호는 서쪽을 가리키며 풍수에서는 우측 산자락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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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작도. 주작은 남쪽을 가리키며 풍수에서는 혈 앞의 안산과 조산을 나타낸다.

 

이런 기록들을 근거로 하여 삼국시대 초기 이전부터 통일신라 말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나라 고유풍수가 존재하였다고 보는데 이를 중국풍수와 비교하여 학자에 따라 자생풍수 또는 토종풍수라는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용어의 표현이야 어찌되었건 우리나라에 고유풍수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이로써 중국풍수가 한국풍수의 원조가 되었다는 학설에는 무리가 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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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삼사지기 중 하나로 유명한 경주의 여근곡, 형국론이 존재했음을 밝히는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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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있는 김유신 장군묘의 호석에 새긴 십이지신상. 십이지지를 무덤에 적용한 풍수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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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남쪽자락에 위치한 서악리 고분군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이다. 모두 다섯기의 고분으로 무열왕릉이 맨 앞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뒷쪽의 고분들은 모두 무열왕 이전에 쓴 무덤이다. 역사적으로 최소한 서기 661년 전에 조성한 것인데 형국은 금오탁시형이다. 금까마귀의 부리부분에 정확히 정혈하여 일렬로 봉분을 조성하였다. 형국론의 증거이다.

 

 

중국의 풍수이론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통일신라 말기에 선종계통의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귀국하면서 중국의 풍수이론을 배워 들어 온 것이 계기가 됩니다. 입당승들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뿐만 아니라 학문이나 문화 등을 함께 전파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중들에게 포교하는 방법으로 특히 풍수이론을 활용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풍수를 이용하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이가 도선국사(道詵國師)이며 중국풍수와 한국풍수를 접목하여 새로운 풍수이론을 정립하였기에 우리나라 풍수의 원조(元祖)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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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 초상


도선국사의 풍수이론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시기는 고려시대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풍수설 그리고 도참사상이 사회를 이끈 주도적 사상이었습니다. 태조의 「훈요10조」에는 풍수적 사고 관념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풍수설은 주로 승려들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도선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도선의 저술로 알려진 「비기(秘記)」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다녔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설이나 공민왕 때 보우의 한양천도설 등은 모두 도참사상과 풍수설에 근거를 둔 주장들이었지요. 이후 신돈은 충주 천도설을 주장했으며, 훗날 나옹선사와 그의 제자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불가에서뿐만 아니고, 유가에서도 많은 풍수 명사들이 나왔는데 특히 이성계는 역성혁명에 성공하자, 정권찬탈의 당위성과 민심수습을 위하여 풍수지리설을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국가였다면 조선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운 국가였습니다. 이런 조선조에도 풍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는데 이에 음양과를 설치하여 과거시험을 통하여 지관을 뽑았으며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풍수지리학을 모르고는 행세가 힘들 정도로 풍수는 생활속의 문화로 자리잡았던 것이지요. 그 결과 선비나 승려들 사이에서도 기인이나 도사들이 많이 나왔으며 민간에서는 풍수설이 신앙화되어 무덤발복을 염원하는 음택풍수가 널리 유행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고려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교가 통치이념이었던 조선조에서는 유교의 효사상의 영향으로 화장보다는 매장을 선호하게 되었고 그 결과 무덤풍수가 성행하고 여기에 호구지책으로 연명하는 반풍수 얼풍수들의 횡포와 맞물려 사회적으로 크나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답니다. 명당을 찾아 부모를 묻어 부귀영달하려는 이기적인 방법이 팽배해졌기 때문에, 묘지를 둘러싼 폐단이 심해졌던 것이지요. 이를 보다 못한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풍수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조의 무덤풍수 악습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민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권에 출마하는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까지도 편하게 누워있는 조상의 뼈다귀를 파서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는 실상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풍수란 그런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각설하고 근대 개화기 들어오자 일부 선각자들은 풍수지리설을 크게 비난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풍수가 미신으로까지 규정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정말로 유익하고 과학적인 우리의 전통 풍수이론이 세상으로부터 멸시 당하게 된 바탕에는 모두 풍수를 악용하여 한 몫 챙겨보려는 무식쟁이 사기꾼들의 농간 때문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풍수지리가 미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철저하게 풍수를 이용하였습니다.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풍수 자료를 수집하여, 명혈의 지맥을 자르고 정기 맺힌 명산에 쇠말뚝을 박는 등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였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해방이 되고 서구 문물에 밀려 우리나라 전통학문이 잊혀져 갈 무렵 1970년대에 들어와서 환경 문제가 대두되자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풍수지리 이론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풍수이론을 현대적 생활에 맞게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으며 도시 계획이나 집터를 선정할 때에도 풍수원리가 응용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나라 풍수의 내력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에는 풍수를 적용하는 부분들에 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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