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儒敎)는 공자(孔子)에 의해 개창되어 한자문화권에서 수천 년 동안 주류를 이루었던 종교·철학사상이다. 공자는 스스로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하였지만, 그 이전의 문화를 집대성하고 체계화시킴으로써 유교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공자 이후 유교는 공자가 가르친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방법에 따라 시대적 변화에 조응하여 그 가르침을 보완하는 역사를 이루게 된다.
공자가 집대성하고 체계화시킨 이전의 문화는 주로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문화를 가리킨다. 유교의 경전인 『서경(書經)』에 따르면 하왕조 이전에는 요(堯)의 당(唐), 순(舜)의 우(虞)왕조가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요와 순은 공자와 맹자(孟子)에 의해 도덕정치의 이상을 이룬 성자(聖者)로 추숭되었는데, 그 이후 요순시대라면 태평성대의 대명사가 된다.
여기서 공자와 맹자가 특히 이상으로 삼은 것은 요순시대에 이루어진 왕위계승제도였는데, 선양(禪讓)제도라고 일컬어진 이 제도는 나라 안에서 인재를 골라 통치 경험을 쌓게 한 후 그 결과에 따라 다음 왕위 계승자로 지명해 뒤를 잇게 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요의 당왕조나 순의 우왕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하왕조의 실체에 대해서는 크게 밝혀진 것이 없어 전설상의 왕조로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하왕조의 경우 근래에 와서 유적 발굴과 새로운 유물의 출현에 의해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어 왕통의 세계(世系)까지도 확인이 되고 있다.
하왕조는 순의 뒤를 이은 우(禹)에 의해 창립된 왕조로서 요순의 선양제도는 이때부터 장자상속의 왕위계승제도로 바뀌게 된다. 하왕조는 이후 17세(世) 439년 동안 지속되다가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걸(桀)에 이르러 왕조의 운명을 마감하게 된다. 공자는 “은대의 예(禮)는 하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 빼고 더한 것을 알 수 있고, 주대의 예는 은에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 빼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 주를 계승할 이가 있다면 비록 100세가 지나더라도 그 빼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공자의 사상이 하왕조의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지만,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 다음 왕조인 은·주의 문화이다. 은대에는 왕의 조상신을 비롯한 천지·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일상의 모든 일들을 점복(占卜)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종교문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조상에 대한 제사와 풍작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는 씨족연합의 단결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조상신이나 자연신을 주재하는 최고신인 상제(上帝)는 초월적·절대적 존재로서 인간의 운명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자연 현상과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궁극적 근원이었다. 은왕조는 폭정을 편 제28대 왕 주(紂)에 이르러 기원전 1,122년 경 주왕조의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주대의 문화 역시 은대의 종교문화적 요소가 존재하였지만 인간 본위의 인문적 정신이 새롭게 흥기하게 되고, 절대적 주재자인 상제가 천(天)으로 대체됨에 따라 상제와 같은 절대적이면서 무형적인 존재의 실체와 권위는 의심받게 된다.
여기서 천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궁극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상체처럼 신비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천의 뜻[天命]을 따라야 하지만, 그 천명은 인간의 덕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덕은 인간이 수양하여 얻어진 사회적·도덕적 능력이다. 예를 들어 은왕조가 멸망한 것은 천명을 상실하였기 때문인데, 그것은 과도한 음주와 정치·군사의 부패가 원인이 되었다는 식이다. 따라서 주왕조는 밝은 덕을 쌓아 은왕조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원하여 새롭게 천명을 받은 것으로 된다. 이것은 초월적 주재자의 외적 권위보다는 인간의 책무와 도리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조상신에 대한 제사에서도 주왕조는 종묘(宗廟)의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의례(儀禮)에 따라 제사를 지냈는데, 의식에 참가하는 성원의 동작·언어·복장 등 의례상의 모습을 통해서 우아하고 절도 있는 조화의 미를 정신생활에서 길렀으며, 이 예속(禮俗)으로서의 의례가 축적되어 내부적 질서의 유지 규범으로까지 발전되고 인륜질서의 일반원리로 관념화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공자께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으뜸으로 계승하시고 문왕을 본받아서 그 법도를 밝히셨다”고 적고 있듯이 위와 같은 전대의 문화를 집대성하고 체계화시켜 유교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공자는 중심 사상으로 인(仁)을 창도해 사랑을 강조했고 문화 현상으로 예(禮)를 일으켜 사회 질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맡은 자는 덕(德)을 베풀고 믿음[ 信]을 지켜야 한다는 덕치주의(德治主義)를 내세우기도 했다. 각계 각층의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부여된 이름[名]과 분수를 지켜야 안정과 평화·화합 그리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정명사상(正名思想)을 강조했고, 인간은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평등을 누릴 수 있고 정의를 분별할 수 있으며 새로운 역사의 창조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자를 가르치는 데는 육예(六藝) 곧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를 과목으로 삼았는데, 이 육예에 달통한 72인의 제자 중에서도 안회(顔回)·민손(閔損)·언언(言偃)·복상(卜商)·재여(宰予)·단목사(端木賜)·염구(求)·중유(仲由)·증삼(曾參) 등이 뛰어났는데, 증삼에 의해 자사(子思)에게 도가 전해졌다.
공자에 의해 개창된 유교의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그런데 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일정하지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의 물음에 각기 달리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질문하는 제자의 자질·처지·이해 능력에 따라 그 깨우침을 열어주는 방향으로 대답을 해 주었던 것인데, 제자들이 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내어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克己復禮)”라고 한 것이 그 예이다.
공자의 이런 말들을 종합해 보면 인이란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자를 풀어보면 인은 이인(二人) 즉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희(朱熹)도 인을 주석하기를 ‘사랑의 원리(愛之理)’이고 ‘마음의 덕(心之德)’라고 하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인(仁)은 친야(親也)”라고 했는데 친은 ‘사랑한다’, ‘가까이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는 “가까운 사람을 가까이 사랑하는 것이 인이다”라고 했으며, 그 밖의 여러 책에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이란 그 마음이 흔연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이란 사랑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인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 이른다”라고 되어 있다.
동서고금의 여러 종교가 대개는 그 근본사상을 사랑에 두고 있듯이 유교에서도 그 바탕이 되는 사상은 역시 사랑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유교에서의 사랑은 그 주고받는 과정에서 단계적이라는 점이다.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사랑하고서 남을 사랑하는 것’ 즉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그런 뒤에 그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남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를 “나의 늙은 부모를 늙은 부모로서 받들고서 남의 늙은 부모에게로 미치고, 나의 어린 자식을 어린 자식으로서 사랑하고서 남의 어린 자식에게로 그 사랑이 미치게 한다”라고 표현하였다. 사람이란 자기 부모·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본능적 정리이기 때문에 남의 부모 자식을 내 부모 자식과 다름없이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조건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널리 사랑하라거나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주라고 한들 심정적으로는 수긍이 될지 모르지만 그대로 실천하기란 누구나 쉽지 않다. 자칫하면 형식적인 사랑, 위선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본능적인 정리를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부모를 사랑하고서 그 절실한 사랑을 그대로 미루어서(확충해서) 남의 부모도 사랑한다든지, 내 형제를 사랑해서 그 사랑을 그대로 미루어 남의 형 아우도 사랑하며, 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확충해서 남의 자식도 사랑한다면 보다 생생하고 진실한 사랑을 남에게도 베풀 수가 있는 것이다.
단계적이라는 말은 차별과 의미를 달리한다. 내 육친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을 그대로 타인에게로 옮겨야 된다는 뜻이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아끼는 그 본능적인 사랑을 고스란히 남에게로 넓혀야 한다는 그런 뜻이다. 가까운 데에서 멀리로 뻗치는 이런 사랑의 단계적인 적용은 인간 아닌 짐승이나 사물에게도 미치게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널리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우주 안의 모든 사물에게도 베풀어야 하며, 그것은 한결같이 내 몸 사랑하듯이 절실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유교의 근본사상인 인은 이와 같이 가까운 육친에서 먼 타인에게로, 또 인간에게서 모든 사물에게로 번져가는 것으로 그 베풂의 원리를 삼는다. 또한 유교가 공자에 의해 개창되었음에도 공자의 이름을 따지 않고 ‘ 유(儒)’ 자를 쓰고 있는 것은 유교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 자는 그 문자 구성이 ‘인(人)’과 ‘수(需)’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구하여 갖추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또 자전(字典) 상으로는 유(柔:부드럽다)·유(濡:스며들다, 젖다)·윤(潤:붇다, 윤택하다) 등으로 설명되고 있으니, 이는 곧 ‘어진 이가 가르친 도리를 배우고 익혀서 자기 몸에 젖게 한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 ‘유’ 자는 학자 또는 선비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공자의 가르침도 결국은 이러한 ‘유’의 세계를 증진시키는 데에 그 궁극적인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유교의 경전인 『시경(詩經)』·『서경』·『역경(易經)』 등이 이미 공자 이전에 형성되고 있었던 사실 또한 그러한 입장에서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다. 결국 이 ‘유’ 자는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에 필요한 풍부한 지식과 드높은 품덕을 갖춘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유자(儒者)의 행실에 대해서 『예기』『유행(儒行)』에서는 “밤낮으로 열심히 학문하여 물음에 응대하고, 충성과 신의를 깊이 간직하여 천거되기를 기다려, 힘써 실행하여 취해지기를 고대한다.
의관의 옷차림은 예의에 알맞고, 동작은 공경되고 신중하며, 크게 사양함은 마치 거만스러워 보이고, 작게 사양함은 마치 거짓처럼 보인다. 금(金)이나 옥(玉)을 보배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충성과 신의를 보배로 삼고, 토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의(義)에 서는 것을 토지로 여기며, 많이 쌓아두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글로써 부를 삼는다. 자신의 한 몸이 위태로울 수 있더라도 뜻한 바를 빼앗길 수는 없고, 비록 자신의 거동이 위협 당해도 결국은 그 뜻을 펴가며, 언제나 백성의 고통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유자들은 현실을 중시하면서도 현실에 오염되지 않는 하나의 계도자적 역량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세계에서는 모든 자문에 응할 수 있는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 어떠한 권세나 물욕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적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회만 되면 정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평소 연마한 충성과 신의로써 공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것 등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사상적 영역은 실로 방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 사회적 역할은 실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교가 긴 역사 기간 동안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여 그 내용을 달리하면서도 유교로서 동일성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이러한 기본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