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 276
● 객실정보 - 큰방 2실 10인 기준으로 요금은 별도 문의 - 취사 불가하며 조식제공도 불가능함 - 마애솔숲공원 및 낙동강 백사장 체험가능, 낙동강 레프팅 체험 가능
● 사진자료 미비로 추후 촬영하여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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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천파 세거지 마애촌 전설
지금으로부터 6백여년전 진보에서 안동으로 나오셔서 망천기지를 잡으신 송안군 선조께서 남기신 일화도 많으려니와 이곳 망천마을에 전해오는 전설도 허다하다. 일찍이 송안군 선조께서 말씀하시기를 『富不過百石이은 천년香火不絶之地이며 兵火不入이요 避亂入處也라』하셨다고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있다. 그리고 선조께서 택지하신 마애촌은 저멀리 신라시대에는 마루촌으로 일컬어 오다가 전조에 와서는 마라촌(磨羅村)으로 개칭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갈 마」(磨)字가 불길하다고 인정되어 오늘날처럼 마애麻厓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차례 개칭하게된 마애 마을 앞에는 낙동강 상류 황지에서부터 360여리를 굽이쳐 흐르는 장강이 수천년째 수레바퀴처럼 감돌고 그 맞은편에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뒤켠에는 학가산 일지맥이 주산으로 뻗어오다가 세 갈래로 갈라져 후산을 이루고 있으니 천년의 피난처인 배산창수지背山愴水地가 분명하다. 더욱 장관은 병풍처럼 마을 앞을 둘러싸고 있는 층암창벽의 기암괴석들이 석양에 빛을 내고 백사십리에 청파만리하는 광경이다. 자연풍치가 이러할진대 『백구는 편편이요 청송은 삼삼한데, 삼월춘풍화개절과 구월단풍한상절이면 시인묵객과거처려라』는 싯귀가 떠오르게 마련이 아닌가. 마을앞 강변에 임좌병구로 자리잡고있는 아담한 산수정에 오르면 그 운치가 더욱 돋보인다. 이 정자는 공안군 칠대손이신 호봉공(휘 돈) 선조께서 당시 안동부사이던 김동보公과 더불어 주유어절벽하舟遊於絶壁下 하시고 애산수지승자愛山水之勝者 하시던 소구지처所構之處이다. 그리고 서쪽으로 둘러싼 양백허의 청룡산하 안터는 주기主基라는 뜻인데 일찍이 송안군 선조의 처소가 있던 유서깊은 곳으로 지금은 망천파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동남쪽에 있는 맛무덤은 송안군이 기지를 정하신 후 낙동강 상류의 수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두 개의 마주보는 구릉을 축조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어 후손들에게 감명을 깊게 하고 있다. 종택앞 수식상手植桑은 송안군 선조께서 손수 심으신 뽕나무로서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600여년 동안 보존되어 오다가 수령이 노쇠하여 원목은 없어지고 60여년전 그 뿌리에서 총생이가 다시 돋아나 높이 10미터 직경 10센티의 기념수로 보존케 되어 여기에 수식상단手植桑壇을 쌓고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종택에 보관되어있는 보검은 망천분파조 참군부군께서 쓰시던 패도佩刀로 길이가 1미터 8센티나되고 칼자루는 어피魚皮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가보이며 오동금梧桐琴 역시 석병(휘 회보) 선조께서 여가에 타시던 악기로서 오동판에 우륵사로 만든 길이 1미터 40센티 폭 24센티의 귀중한 가보로 수백년째 종택에서 보존하고 있다. 이처럼 송안군 선조께서 택지하신후 6백여년동안 많은 유래와 유적을 지니고 있는 마애촌에 대해 일찍이 송안군 10대손인 瑪川公(휘 섭)께서 망천별업輞川別業을 지어 예찬한 바 있다. 열화 2호(1981년)에서 옮김
2. 山水亭
이 건물은 조선 선조 광해 년간에 관직을 수행한 호봉(壺峯) 이돈(李燉)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마애에 돌아와 학문에 정심하고 후진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풍산읍 동남쪽에 있는 마애마을의 아래쪽에서 낙동강과 마애 절벽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자는 1610년경에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야 김양근이 쓴 상량문이 남아 있다. 최근에 보수한 흔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납도리 오량가구의 팔작기와집이다. 가운데 마루를 배치하고 양쪽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꾸몄다. 정자 좌우에는 판문을 달았으며 전면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고 기타 기둥은 각주를 사용하였다. 정자 사방에는 담장을 둘렀는데 정자와 너무 가까워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출입문은 전면과 후면에 모두 만들었다. 이돈(1568∼1624)의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호는 호봉이고 자는 광중(光中)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지평,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영해부사로 좌천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산수정을 지었다. 인조 반정 후 영천군수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가 주민의 칭송을 받았으나 1년 뒤에 관아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호봉집』 2권을 남겼다.
산수정 현판
산과 물을 그려 놓은 전형적인 전서체이다.
3. 怡老堂 이로당
이 정자는 진성이씨 마애파 소유의 정자이다. 풍산읍의 동남쪽에 있는 마애의 동북쪽 언덕 위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흙돌담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전면의 사주문으로 출입을 하게 한 이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중앙에 2칸의 마루를 설치하고 좌측에는 1칸의 온돌방과 반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오른쪽에는 뒤편에 1칸의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전면 우측의 반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막돌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가운데 기둥 하나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각주이다. 마애는 진성이씨가 진보에서 안동에 터를 잡을 때 입향조인 이자수(李子脩)가 맨 처음 정착했던 곳으로 나중에 두루로 옮겨 갔다가 증손인 흥양(興陽)이 다시 돌아온 이래 약 500여 년을 세거해 오고 있는 곳이다. 흥양의 6대손인 돈(燉)과 그의 아들 회보(回寶)대에 연이어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진사 14인을 배출하는 등 집성촌으로 문한을 이어온 곳이다.
이로당 현판
해서체로 이강호(李康鎬)가 썼다. 노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의미로 경로의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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