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칸 짜리 강릉 선교장...실제로는 300칸<하인거주포함하면>
102칸 짜리 강릉 선교장
강원도 유일의 만석꾼
족제비가 만들어준 부잣집
한국 최고의 부잣집 한옥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궁궐이 아닌 일반 양반집으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은 99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나친 낭비를 막기 위해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 전통 한옥을 살펴보면 99칸보다 큰 집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102칸 집이 있다. 하인들이 살던 집들까지 모두 합치면 300칸에 이르렀던 집이다. 현존 살림집 한옥 중에서 가장 큰 집이다. 바로 강릉의 명물 ‘선교장’이다. 집이 하도 커서 집 안에 대문만 12개가 있을 정도다.
선교장은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최고 부잣집이다. 역사가 300년에 이르는 이씨 집안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그리고 이 집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큰 전통 한옥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많다. 먼저 그 이름부터 다르다. 보통 양반집들은 ‘~당’이나 ‘~각’ 등의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이 집은 유독 ‘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집의 경제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선교장은 ‘장원’이기 때문에 이름에 ‘장’자가 붙었다. 장원은 단순히 식구가 많고 큰 집이 아니라 한 집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갖춘 것을 말한다. 선교장은 이 집의 건물과 가구 등을 전담하는 목수, 옷가지를 만드는 침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전용 전문 인력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장원 체계의 부잣집은 조선 시대 만석꾼 집안 중에서도 유례가 거의 없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집안이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된 것이다. 농토가 넓은 전라도나, 세력가들이 많았던 경상도가 아닌 산 많고 기후가 거친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나온 경우는 이 집이 유일하다. 한때 선교장 집 땅은 북쪽으론 주문진, 남쪽으론 울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넓은 것인지는 지도를 펴보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곡창지대가 아닌 변방 강원도에서 이 집이 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실은 족제비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설마 그 족제비? 맞다. 그 족제비다. 선교장 집안을 일으켜세운 이내번이란 사람에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가 집 지을 터를 찾아 강릉 일대를 돌아다니던 어느 날 산 속에서 갑자기 족제비 무리를 만났다고 한다. 족제비가 떼를 이뤄 몰려가는 게 신기해 그는 족제비들을 좇아갔는데, 어느 곳에 이르더니 족제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의아해진 그가 주변을 돌아봤는데, 그 순간 자기가 있는 곳이 놀라운 명당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 선교장이 있는 배다리골이다. 어떤 신기한 기운이 족제비 떼를 시켜 그에게 명당 터를 일러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명당이란 개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법도 해보인다. 좌우지간 이렇게 집터를 고른 선교장 집안은 1760년께 집을 짓기 시작했고, 이 집이 점점 커져 지금의 선교장으로 진화해갔다. 그럼 이 집이 얼마나 큰 집인지, 왜 진짜 부잣집으로 꼽히는지 돌아보자.
선교장은 전면이 통째로 집으로 이어져 있다.
집은 무지하게 앞면이 길고 그 앞에는 우물이 있다. 이 집 앞쪽으로 수구(水口)가 넓게 벌어져 있으므로
선교장은 집 방향을 남서향으로 틀었다.
그리고 열린 수구를 비보하기 위해 긴 건물로 닫힌 형태를 만들어
풍수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입구부터 나온다. 저 사진 오른쪽으로 대문이 보인다. 이 집은 앞서 말했든 집안에 문이 12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 대문은 하나가 아니라 2개다. 집 앞쪽이 이렇게 길게 처리되고 대문이 2개가 있다는 점에서
선교장은 창덕궁 낙선재와 비슷하다. 저 평대문 말고 더 멋진 솟을대문이 그 옆쪽에 있다.
자, 여기가 가장 중요한 이 저택의 대문이다. 이 솟을대문으로는 남성들과 손님들이,
옆쪽 평대문으로는 가족들과 여성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시대의 사회구조를 문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럼 문으로 들어가보자.
도대체 얼마나 큰 집인지.
들어가면 또 문이다. 이 문 너머로 사랑채 공간이 있다. 언뜻 문 사이로 봐도 넓다. 선교장은 남성들의 공간이자 손님을만나는 공간인 사랑채가
그어떤 집보다도 크고 중요했던 집이다. 그래서 다른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채가 크다. 그 이유는 이 집안이 손님을 환대하고 교류하는데
전국에서 가장 신경을 쓴 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옥들과 가장 비교되는 부분이
사랑채가 집 한 채가 아니라 무려 3채나 된다는 점이다.
작은 두번째 문을 지나 사랑채 마당으로 간다. 정말 길다. 입구에서 보았던 그 긴 전면 건물이다. 행랑 건물인데, 행랑이 줄지어서 있어서
‘줄행랑’이라 부른다. 이 무지하게 긴 행랑채는 모두 23칸이다. 우리나라 집의 규모를 세는 단위는 칸(기둥과 기둥 사이)인데,
가장 작은 집은 3칸짜리다(초가삼간 같은).
이 행랑 건물은 작은 세칸집 8채를 붙여지은 수준이다.
저 행랑채에서 사랑채 마당을 바라보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저 맞은 편 건물, 딱 보기만 해도 이상해 보인다.
한옥 건물 앞에 뭔가를 붙였다. 그 모양이 생소하다. 저건 뭘까?
저 앞에 붙인 부분은 햇빛을 가리는 차양이다.
마치 한옥 같지 않아 보인다. 외국 양식을 한옥에 혼합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저런 집이 아주 드물 뿐, 우리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다. 가령 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의 경우 이보다 훨씬 큰 차양을 달았다.
▲ 창덕궁 선향재. 건물 전면에 큰 차양을 달았다. 출처=문화재청 누리집 선향재말고도
서울 종로의 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에도 저렇게 차양을 댄 건물이 있다. 그런데 선향재와 윤보선 고택 차양은 모두 나무로만 만들었다.
반면, 이 건물의 차양은 지붕을 구리로 했다. 구리는 엄청나게 비싼 재료다.
구한말, 이 선교장의 초청으로 방문했던 러시아 공사가
답례품으로 선물한 구리로 저 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독특한 선교장 안에서도 가장 독특한 건물이 ‘열화당’이다. 가족끼리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집이란 뜻이다. 열화당이란 이름은 아마도 미술이나 책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낯익을 것이다. 미술전문출판사로 유명한 출판사 열화당의 이름이 이 건물에서 따왔다. 열화당 이기웅 사장이 선교장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열화당이 선교장의 사랑채 3종 세트의 으뜸이다.
큰사랑으로,
여기서는 손님들과 선교장 주인이 이야기도 나누고 중요한 손님이 숙식을 하고,
토론도 하고 파티도 했다. 선교장은 사랑채가 3개여서,
손님의 등급을 보고 머물 숙소를 정해줬다고 한다. 저 열화당 옆으로 중사랑이 있는데,
이 중사랑에 집사가 머물면서 손님이 찾아오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안 내력과 학식을 테스트한 뒤
가장 뛰어난 손님이면 당연히 저 열화당으로, 중간급이면 중사랑으로,
그리고 좀 처지는 사람이면 아래사랑에 방을 내줬다. 그 아래사랑이 바로 우리가 본 길디 긴 행랑 건물이다.
23칸, 다시 봐도 길다. 일반적으로 조선 양반집에서 행랑은 하인들 숙소와 마구간, 창고 등으로 쓰는 건물이다. 그러나 선교장 행랑은 사랑채 기능을 했다.
열화당에 찾아오는 손님은 물론, 교장이 불러 온 각종 전문인력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도대체 손님이 얼마나 많았기에 이렇게 손님 공간을 크게 마련했을까? 선교장은 손님 환대 전략으로 집안을 키웠다.
강원도는 한양을 기준으로 볼 때 변방이다. 이 변방에서 선교장이 명성을 유지한 것은
‘문화적 소통’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양반들 최고의 유람 코스는 관동팔경과 금강산이었다. 강릉 선교장은 바로 그 길목에 있었다. 당대의 인사들이 찾아와 선교장에 머무는 것이 코스가 되었다. 워낙 환대해주고 문화적 분위기가 좋았다고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손님들은 선교장을 문화 인맥의 핵심이자,
한양 정계와 이어주는 존재들이었다. 선교장이 얼마나 손님을 잘 치렀느냐면 절정기에는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고,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겐 일일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옷 만드는 침모용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사랑에 머물다가 떠날 때에는 글이나 그림을 남겨 환대에 보답했다. 지금의 선교장 곳곳에 있는 명필들의 글씨와 그림들이
모두 이런 사랑손님들의 작품들이다.
낮은 급 손님은 때가 되면 상차림의 국과 밥의 그릇 위치를 바꿔
알아서 떠나달라고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 건축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저 길고 긴 행랑은 특별한 효과를 내는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선교장은 도면으로 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행랑채 건물이 뒤쪽 건물들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비스듬히 틀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이다.
집을 지을 때는 직사각형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 한옥들을 보면 뜻밖에도
한쪽이 비스듬한 사다리꼴 구성들이 의외로 많다. 조선 사람들은 굳이 정확하게 각을 잡고 정확한
대칭 구조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선교장에서 행랑 각도를 본채와 평행으로 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건축 전문가들은 시각적 효과 때문일 것으로 분석한다. 행랑채를 열화당 쪽으로 더 좁아지게 배치해
중사랑 쪽 마당이 너무 휑하게 넓어 보이지 않게 만들었으리라는 추정이다. 실제 이 마당에서 보면 줄행랑 건물이 비스듬한 것인지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이런 배치는 조선 왕실의 궁궐인 창덕궁의 인정문 앞마당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지형적 요인을 시각적으로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 인정문 앞마당에
가보면 양쪽 끝의 거리가 멀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간 구획이 평행으로 이뤄진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 사랑채 건물 3개가 몰려있는 공간 뒤로는 근사한 쉼터 건물도 따로 있다.
집 뒷산으로 이어지는 경사지를 계단식으로 단을 내고
그 위에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도 되도 숙소도 되는 집을 지었다. 일부러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로 한 지붕이 더욱 정겹다. (이 근사한 집과 아래 긴 행랑채는 여행자 숙박이 가능하다.) 그럼 이제 남자와 손님들 공간을 봤으니
여성과 가족들의 공간 안채로 갈 차례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문 안에 또 문, 그리고 그 문 안에 다시 문이 보인다.
반대쪽에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의 풍경이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들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그 느낌이 사뭇 색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우뚝 올라서 앞을 굽어보는 오른쪽 건물은
안채와 붙어있는 동별당이란 건물이다. 이 건물은 현판이 일품이다.
‘오은고택’.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꼽혔던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선교장에 머물렀던 여초가 선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건물은 독특하게 건물 아래 기단부에 작은 쪽문이 달렸다.
무엇에 쓰는 문일까?
저 문은 건물 아궁이 출입문이다. 세상에, 저렇게 작은 문으로
저 비좁은 아궁이 공간을 드나들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게 신분 계급 사회다. 당시 하인들에겐 저런 것이 일상이었다. 이 동별당 건물에서 안채를 바라보면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채 건물의 변화하는 지붕 선이다.
지형에 따라 건물과 지붕 높이가 삼단으로 꺾이는 모습이 근사하다. 이 건물이 안채다.
ㄱ자로 꺾어져 있는데 정면을 바라보는 쪽이 당연히
여성들의 대장인 안방마님의 숙소이고,
그 옆으로 꺾이는 부분에 며느리가 산다. 안방마님의 방에는 어딘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자세히 보면 방 구조가 2겹이다. 앞쪽에 넓은 방이 있고,
그 안에 다시 좁은 방이 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앞쪽 방이 주인인 마님 방이다.
뒤쪽은 하녀의 방이다. 하녀는 마님 옆 저 방에서 마님과 함께 잤다.
중간마다 심부름 해야 하니까?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하녀가 마님 옆에 자는 주된 이유는
마님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하녀는 곧 ‘인간 텔레비전’이었던 것이다.
역시 신분사회의 모습이다.
뒤쪽에 돌담을 만들어 부엌에서 보이는 풍경이 액자처럼 멋지다. 한옥 특유의 매력.
그런데 솥 옆에 또 까맣게 뭔가 솥은 아닌 것이 부뚜막에 콕 박혀 있다. 이 부뚜막 일체형 그릇은 물을 데우는 것이다.
불을 땔 때 저기에 물을 부어놓으면 가열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
선교장이 다른 고택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이런 크고 복합적인 구조에 있다. 선교장을 연구한 차장섭 강원대 교수는 이 집의 특별함으로
‘남성 공간과 여성 공간’, ‘손님 공간과 가족 공간’, ‘주인 공간과 하인 공간’, 그리고 ‘산자의 공간인 생활 공간과 죽은 자의 공간인 제사 공간’ 이 공존하는 점을 꼽았다.
곧 선교장은 건축사전 같은 집인 동시에 조선 시대 양반 생활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건축으로 보여주는 문화사전 같은 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면 ‘건축과 조경의 조화’를 빼놓을 수 없다. 선교장과 그 앞 활래정 연못은 지금도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 활래정은 선교장의 독특한 건물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좋은 ‘스타’ 건물이다.
선교장 입구 연못 가에 지은 활래정은
뒤쪽은 연못 가장자리 땅에 기대고 있고, 앞쪽은 돌기둥에 의지해 연못 위에 올라서 있다.
줄행랑이 창덕궁의 낙선재를 닮았다면, 이 건물은 창덕궁 부용지 연못가의 부용정을 연상시킨다.
‘활수(活水)가 계속 들어오는 정자’란 뜻의 활래정은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다. 이곳 다실에서 연꽃이 가득한 못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기분은 궁궐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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